128화 <피처링>
헬레나의 말에 마이클이 손을 저으며 웃었다.
“헬레나! 앞으로는 걱정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이대한 선수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하긴 정말 화끈하게 몰아붙이더니 순식간에 끝내버리더라고요.”
“아오! 내가 그 경기를 꼭 봤어야 했는데.”
“다시보기로 보면 되잖아.”
“그래? 어디로 가면 되는데.”
마이클은 존의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다시보기를 찾아줬다.
얼마 후, 마이클에 이어 존까지 온갖 설레발을 다 치며 대한을 띄워줬다.
“이야아! 다음에는 직관하러 가야겠다. 정말 예술이네요.”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선수가 오늘 헬레나의 피처링 때문에 우리 녹음실을 찾아와줬다는 거야.”
“무하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대한에게는 우리 녹음실 무료개방입니다.”
웃고 떠드는 가운데 순식간에 30분이 지나갔다.
헬렌나가 시계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일 좀 해볼까요?”
“좋아요.”
그녀의 말에 존과 마이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들은 녹음실에 있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것 같은 기기들을 아주 능숙하게 잘 다루고 만졌다.
“대한이 이미 자기 파트를 완벽하게 숙지했다고 하니 녹음 한번 떠봐요.”
“좋습니다. 이대한 선수 부스로 들어가세요.”
“그냥 대한이라고 부르세요.”
“하하하! 그럴게요. 대한!”
기분 좋게 녹음실 부스 안으로 들어간 대한은 먼저 커다란 헤드폰을 썼다.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헤드폰에서 작게 울려 퍼졌다.
―피처링은 처음이시죠?
“네.”
―긴장할 것 없습니다. 모니터에 미리 대한의 파트를 표시해놓았어요.
“아! 이거군요.”
대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모니터에 떠오른 악보를 확인했다.
그의 파트는 노란색으로 잘 표시되어 있었다.
―헬레나의 목소리와 함께 음악이 나가면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시면 됩니다. 참 쉽죠?
“네, 아주 쉽네요.”
창밖으로 존이 신호를 보내자 마이클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드폰을 통해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이 들려왔다.
조금 지나자 헬레나의 청순하고도 처연한 목소리가 멜로디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I‘m not looking for a lover, And I don’t care what’s wrong with you.
이별을 아파하던 여인이 이제는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노래했다.
대한은 그녀의 음색에 맞춰 감정을 잡았다.
그런 후 자신의 파트를 속삭이듯 노래했다.
“Start now, release the worry and the memory. Feeling is come and gone.”
낮고 묵직한 저음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상처받은 여인을 위로하듯 다독거렸다.
존과 마이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헬레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헬레나의 눈동자도 그들 못지않게 놀람으로 변해있었다.
―Just do it! let it flow that thing is going to be shattered, Just another lesson has been learned,
이번에는 헬레나의 목소리가 진한 감정선을 건드리며 울려 퍼졌다.
이어진 것은 대한의 멜로디에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Don’t start it now so I can start now!
“Don’t start it now so I can start now!”
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대한의 부드럽고 묵직한 저음이 너무 훌륭했다.
무엇 보다 속삭이듯 번갈아 후렴구를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이클도 눈을 감으며 고개를 흔들고 박자를 탔다.
마치 실제의 연인들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헬레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는데도 대한의 목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자기 노래가 아니라 대한의 노래 같았다.
아니 대한의 노래에 자신이 피처링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좋았다.
잘 절제된 감정선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
너무나도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모든 노래가 끝났다.
마지막 여운을 남기며 악기들의 연주음도 사라져갔다.
“…….”
“…….”
잠시 녹음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헬레나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그녀의 볼에는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와아아!”
“야아아아!”
그제야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존과 마이클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들의 눈도 그렁그렁해져서 톡 치면 팍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대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부스에 달린 창을 통해 녹음실을 내다봤다.
녹음실에 있는 존과 마이클이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었다.
헬레나를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안심한 대한은 부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흐흑! 대한!”
“헬레나!”
헬레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대한의 품에 폭 안겨버렸다.
존과 마이클도 다가와 대한을 끌어 안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분위기상 왠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을 동혁이 전부 카메라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곡 전체는 오픈되지 않았다.
도입부 조금만 들려줬을 뿐이다.
하지만 녹음실에서 일어나는 일과 행동은 대충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채팅 창은 온갖 생각과 의견들로 넘쳐났다.
[건물주: 세상에 얼마나 노래가 좋으면 헬레나가 울까?]
[소리샘: 노래가 좋은 거야? 대한이 좋은 거야?]
[아리아나: 이거 나오면 꼭 들어봐야겠네.]
[탐방꾼: 제목이 Start Now라고 했어.]
[떡대좋은대학생: 졸라 부럽다.]
[홀로선남자: 대한아! 제발 자리 좀 바꾸자.]
[솔로20년: 장래희망 대한이!]
[태식형: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느아아아아!!]
[낼름: 어느새 헬레나 고메스까지 날름해버렸네.]
[대한좋앙: 미쳤다. 아니 왜 대한을 껴안는 거야?]
[팬입니다: 흑인 아저씨들도 껴안는다. 이거 미친 거 아냐?]
[에어컨기사: 흑인 아저씨들 운다. 울어!]
[등골브레이커: 뭐냐 이 분위기? ㅋㅋ 노래가 좋긴 좋은가 보네.]
[장경훈: 한국의 의자왕 대한이!]
시간이 가자 헬레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그녀는 대한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누가 보든 말든, 카메라가 있건 없건 상관 않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헬레나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통과했던 것이다.
“대한! 너무 좋았어요.”
“고마워요.”
대한은 당황한 감정을 안으로 숨기며 담담한 척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존은 달랐다.
“대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다들 그런 소리 안 해요?”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음원을 3곡이나 냈죠.”
“아! 그렇구나. 그럼 꼭 한번 들어봐야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나랑 같이 음반 작업 좀 해요.”
마이클도 한몫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죠? 정말 놀랐어요.”
“고맙습니다.”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모니를 이룰 줄 아는 감각이 있어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네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존과 마이클은 칭찬 일색이었다.
대한도 노래를 부르면서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 결과가 좋게 나오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불러볼까요?”
그러다가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난 이걸로 만족해요. 많이 부른다고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냥 이게 딱 내 마음을 저격해버렸어요.”
“저도 동감이에요.”
셋은 이구동성으로 더 레코딩 할 필요가 없다고 나왔다.
확실히 미국과 한국은 녹음실 분위기가 달랐다.
마음에 든다고 단 한 번의 레코딩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
“우리 이제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좋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지요.”
“아니에요. 처음에 실수한 것도 있으니 내가 쏠게요.”
헬레나를 비롯한 존과 마이클 모두 자신이 사겠다고 난리들이었다.
대한은 그 모습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이날은 헬레나가 크게 한턱냈다.
올리버와 동혁은 물론 경호팀까지 따라와서 좀 부담스러웠을 텐데.
헬레나는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저 대한만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한도 그런 헬레나를 쳐다보며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올리버의 집에서 푹 쉬고 있는 하이디만 왜 다들 집에 안 들어오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 *
“삼촌! 어떻게 됐어요?”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그렇죠?”
노유상의 말에 노재정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노유상을 쳐다봤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이대한을 싫어하니?”
“그러는 삼촌은 왜 그렇게 이대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
노재정은 조카의 말에 잠시 커튼이 반쯤 처진 창문을 쳐다봤다.
아마도 김을남 코치를 통해 대한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땐 축구선수라는 놈이 몸 관리가 개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진이 다이어트를 하기 이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깟 어린놈 때문에 온갖 단물을 다 빨아먹을 수 있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라는 꿀 보직에서 내려온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왜 놈을 싫어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건 맞다. 네 할아버지가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벌써 녀석을 잘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제가 말한 대로 하셔서 조만간 놈의 눈꼴사나운 짓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흐음.”
노상규의 말이 맞는다.
대한TV인지 뭔지 하는 촌스러운 이름의 채널!
하루가 멀다고 셀럽들과 합방을 하며 유명해지는 놈을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 볼 수도 없었다.
준 것 없이 미운 놈을 확실히 보내려면 당연히 근황을 잘 알아야만 했다.
다행히 저렇게 미국에서 천지 분간도 못 하고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놀고 있을 때!
정확하게 뒤통수를 쳐야 한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조만간 놀랄 놈의 얼굴을 상상하니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나저나 넌 이번에 축구국가대표팀으로 뽑히지도 못했다며.”
“그걸 왜 지금 여기서 얘기해요?”
“어떤 놈은 UFC에서 최고의 유망주로 잘 나가고 있는데, 넌 U-17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놈이 국가대표도 못 됐냐?”
“그러는 삼촌은 왜 요새 백수로 계시는 건데요?”
“백수라니? 난 지금 사업구상을 하는 거야.”
“칫!”
아무리 봐도 백수가 맞는데 꼭 사업구상이란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너도 들어보면 관심이 좀 갈 거야.”
“됐어요. 저 돈 없어요.”
노재정은 은근히 노유상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노유상은 바로 감을 잡고는 돈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 할아버지가 너한테 벌써 우회 상속을 해줬다고 하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 사업할 돈 없어요. 먹고살 돈도 빠듯하다고요.”
“야! 그러지 말고 일단 한번 들어봐!”
“됐습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일 확실하게 처리하세요.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마시고요.”
“저, 저놈의 새끼가!”
노유상은 서둘러 노재정의 집을 빠져나갔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어찌나 귀가 간지럽던지 아주 치를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뒤통수에 대고 노재정은 한 시간 동안이나 욕을 해단다.
* * *
지이이잉!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대한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꺅!
그는 급히 스마트폰으로부터 귀를 뗐다.
“뭐지?”
갑자기 스마트폰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대한! 터졌어요. 대박이 터졌다고요.
“누구세요?”
―아이참! 저예요. 헬레나에요.
그제야 대한은 누가 자신에게 전화했는지 알아챘다.
“헬레나! 대박이 터졌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어제저녁에 디지털 음반을 발매했는데 오늘 빌보드차트에서 제 순위가 1위에요.
“아! 그러시구나. 축하합니다.”
―대한! 고마워요. 이게 전부 대한이 제 곡을 피처링 해주고 또 대한TV를 통해서 광고해준 덕분이에요.
“아니에요. 헬레나가 좋은 곡에 노래를 잘해서 그런 거예요. 어쨌든 빌보드차트 1위 축하합니다.”
대한은 기쁜 마음으로 헬레나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한동안 흥분이 극에 달한 헬레나에게 몇 번이나 축하 인사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축하 전화가 왔다는 바람에 간신히 그녀의 흥분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을까!’
―그동안 헬레나는 가수나 배우보다는 셀렙으로 이미지를 많이 소비했습니다. 이렇게 디지털 음반이 대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을 겁니다. 물론 결혼한 전 남자친구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터라 더욱 이렇게 좋아하는지도 모르지요.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