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맨해튼>
모니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대한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그러자 모니까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다 이내 그에게 몸을 슬쩍 기대왔다.
대한은 그녀의 떨리는 몸을 꼭 안아줬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안정감을 되찾았는지 모니카는 다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니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에요.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 말해줄게요.”
“그래요. 그럼.”
대한은 모니카의 상황이 무척 궁금했다.
그렇다고 에바를 동원해 그녀의 사생활을 엿보지 않았다.
모니카가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대한이 몰래 그녀를 염탐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마(亂麻)와 같다.
그리고 엉키고 설킨 인연의 끈이 어떻게 풀릴지는 신만이 아는 영역이다.
“배 안 고파요?”
“조금 고파요.”
“그럼 레스토랑이라도 갈까요?”
“아니요. 그냥 이렇게 대한과 같이 있고 싶어요.”
모니카는 대답하면서 시계를 쳐다봤다.
대한은 그녀가 시간에 쫓기는 것을 눈치챘다.
남모르게 한숨을 내쉰 대한은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했다.
“케인! 여기 햄버거와 콜라 좀 사다 줘요. 그리고 따뜻한 커피와 코코아도 부탁해요.”
모니카는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예요? 비서?”
“경호원이에요.”
“아!”
대한의 대답에 그녀는 짧은 감탄사를 발했다.
그가 경호원을 부리는 것에 놀랐다.
또한, 그럴 정도로 재력이 생겼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모니카는 대한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거 알아요?”
“뭐요?”
대한이 낮고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메라를 켜지 않고 이렇게 데이트를 하는 게 처음이라는 거요.”
“정말 그렇네요. 어! 이거 데이트였어요?”
그녀의 놀란 목소리에 대한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니었나요?”
“푸훗!”
모니카는 그의 어리벙벙한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끝내 이게 데이트인지 아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한은 이게 말로만 듣던 밀당이라는 것을 깨닫자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박, 자박, 자박!
케인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의 양손에는 햄버거와 콜라, 커피와 코코아가 들려있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케인은 모니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가왔을 때처럼 조용히 물러갔다.
“좋은 경호원을 구했네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대한은 대답하면서 수제 햄버거를 꺼냈다.
모니카에게 하나를 넘기고 콜라도 줬다.
둘은 사이좋게 수제 햄버거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카메라가 있었을 때도 모니카와 합방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카메라가 없자 더 좋은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방송 때문에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은 굳이 방송 때문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마도 이젠 굳이 방송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해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
“네.”
“그럼 코코아는 내가 마실게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모니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양보해줬다.
“대한! 나는 대한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모니카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
그녀의 질문에 역으로 대한이 질문을 던졌다.
모니카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싶은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은 그녀의 한숨에 땅이 내려앉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모니카가 뭣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을 바랄게요.”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해요.”
“우리 좀 더 서로를 지켜보기로 해요.”
“네, 대한도 날 잊지 말아 주세요.”
“물론이죠.”
묘하게 여운이 남는 그녀의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니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집에 데려다줄까요?”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갈게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전화할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대한을 뜨거운 눈으로 한번 쳐다봤다. 그러다 눈에 뿌옇게 습막이 차오르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니카가 남겨놓은 아련한 향기뿐이었다.
자박, 자박, 자박!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한은 흐느끼는 듯한 모니카의 옅어져 가는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 * *
“여기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입니다.”
대한의 소개에 조동혁은 카메라를 천천히 돌려 주변을 한번 비췄다.
카메라가 다시 돌아오자 하이스와 올리버가 그의 옆으로 붙었다.
“오늘은 이렇게 하이스와 올리버가 같이 따라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하이스에요.”
“저 아시죠? 올리버입니다.”
하이스와 올리버가 각자 나름대로 포즈를 취했다.
“어제 뉴욕패션쇼 보셨죠? 어떠셨어요? 끝내주지 않았나요?”
대한은 하이스의 어깨를 안고 카메라를 보며 호응을 유도했다.
둘만 투 샷으로 찍히자 옆에서 어떻게든 끼어볼 거라고 올리버가 얼굴을 디밀었다.
하지만 대한의 두툼한 손이 올리버의 얼굴을 밀어내며 원천봉쇄됐다.
뉴욕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하이스는 몰라보게 예뻐지고 있었다.
이게 소위 연예가에서 말하는 카메라마사지인 것 같았다.
덕분에 채팅 창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동그란액자: 하이스 너무 예뻐! 졸귀!]
[나는모델이다: 모델계에 떠오르는 신데렐라! 하이스 존버!]
[대하열전: 대한과 하이스 커플이 제일 낫다.]
[306호아저씨: 고리나와 류연은 왜 안 나오지?]
[CCTV기사: 갈수록 예뻐지네. 몸매도 착하고.]
[목각인형2: 모니카도 아주 예뻐. 그런데 브라질 미녀가 더 예뻐!]
[골프공맞고뒈져: 하이스의 미모가 물이 오른 건가!]
[아스피린머거: 역시 어리고 예쁜 게 최고야.]
[파란뚜껑: 나도 하이스 존버! 졸예! 졸귀!]
[다빈치비치: 확실히 슈퍼모델 감인 듯]
대한은 빠르게 채팅 창의 반응을 보면서 멘트를 날렸다.
“역시 다들 저와 비슷한 생각이시군요. 앞으로 하이스 보기 어려워질 겁니다. 지금 잘 봐두세요.”
“히히! 아니에요. 전 대한이 부르면 언제든지 대한TV에 나올 거예요.”
하이스가 말을 예쁘게 하자 채팅 창은 의리 있는 여자라며 다들 엄지 척 이모티콘을 쏴댔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당연히 센트럴 파크로 가야죠.”
대한의 질문에 하이스는 센트럴 파크로 가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별로 갈 생각이 없었다.
괜히 거기가면 모니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거긴 지루할 것 같으니까 타임스퀘어로 가죠.”
“좋아요.”
대한의 결정에 하이스는 바로 좋다고 했다.
올리버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무시하고 얼른 하이스만 데리고 출구로 나갔다.
어깨가 축 늘어진 올리버의 뒷모습!
그것을 또 카메라가 열심히 찍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들 킥킥대거나 불쌍하다고 격려를 해줬다.
어느새 올리버는 대한TV의 감초처럼…….
빠져서는 안 되는 고정구성원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한과 올리버가 티격태격하는 걸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둘이 케미가 죽인다는 망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올리버는 대한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에바! 광고 올려!’
―네, 마스터!
에바가 광고를 내보내자 대한은 올리버를 불렀다.
“올리버! 이리 와봐!”
“왜?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해?”
“헛소리 말고 그냥 좀 와봐!”
“응.”
올리버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다가왔다.
“타임스퀘어에 워낙 사람이 많아서 위험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 잘못하면 인파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어!”
“어떻게 하지?”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은 위험해!”
“어디 타임스퀘어가 잘 보이는 곳 없나?”
대한과 올리버의 대화에 하이스가 끼어들었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방송국에 오픈스튜디오가 하나 있는데 위층에 직원용 커피숍이 있어요. 거기서 내려다보면 타임스퀘어가 잘 보일 거예요.”
“우리가 거길 들어갈 수 있을까?”
“한번 물어볼게요.”
하이스는 의외로 발이 넓었다.
뉴욕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장소섭외가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놀랍게도 그녀는 단 한 통의 전화로 모든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버렸다.
“됐어요. 직원 전용 통로로 올라가게 해주겠데요.”
“좋았어.”
대한은 하이스와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올리버도 한 손을 들었다.
하지만 하이스의 눈총만 받고 그만 슬그머니 내리고 말았다.
“올리버! 넌 이럴 때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내가 뉴욕에 살았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저렇게 자폭을 해버리니 그는 더 따지기도 힘들었다.
우울해하는 올리버를 내버려 두고 대한과 하이스는 얼른 승강기를 탔다.
“기다려!”
올리버가 달려와 간신히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대한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나와 준비된 밴을 탔다.
한꺼번에 같이 움직이는 데는 밴 만한 차량이 없었다.
경호원들도 두 대의 밴에 나눠타고 이동했다.
부와아앙! 부와아앙!
두 대의 밴은 도로를 타고 신나게 북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로 가득한 타임스퀘어가 보였다.
그들은 요리조리 길을 돌아 바이아컴 방송국에 도착했다.
골목 주차장 앞에 세우자 대한과 하이스가 내렸다.
뒤이어 올리버가 내리더니 빠르게 쫓아왔다.
셋은 기다리고 있던 바이아컴 방송국 직원을 만났다.
“존입니다.”
“하이스에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존이라는 방송국 직원은 대한과 올리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하이스만 보고 얘기를 했다.
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존을 따라 방송국 건물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리셉션 데스크에 서서 존이 뭐라고 손짓을 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여러 개의 방문자 목걸이를 내주었다.
목에 방문자 목걸이를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계단을 타고 한층 더 올라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휴게소인지 커피숍인지 모를 곳은 창문 전체가 커다란 통짜 유리로 되어있었다.
그곳에서 밖을 내다보자 타임스퀘어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위치 죽이네요.”
“얼른 방송준비 합시다.”
“네, 보스.”
동혁은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설치했다.
머리에 액션캠까지 쓰고 나자 대한이 카메라를 쳐다봤다.
“여러분!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시죠? 바로 타임스퀘어입니다.”
대한이 옆으로 살짝 이동하며 손으로 유리창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방향을 돌려 타임스퀘어를 찍었다.
사실 타임스퀘어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물결처럼 흐르는 인파를 멍하니 바라보면 시간이 참 잘 갔다.
하지만 거기에 아름다운 슈퍼모델의 설명이 덧붙여지면 여느 여행 방송 못지않았다.
“하이스에요. 제가 타임스퀘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게요. 이곳은 뉴욕시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타임스퀘어라는 곳입니다. 스퀘어라는 의미가 사각형이죠. 그래서…….”
하이스는 마치 여행사 직원처럼 카메라를 보며 신나게 얘기했다.
덕분에 대한은 편해졌고 올리버는 질투에 휩싸였다.
자신도 얼마든지 하이스처럼 잘할 수 있다고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안될 말이었다.
누가 봐도 차돌처럼 단단한 올리버보단 하이스가 낫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딜 갈 거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갈 거야.”
“거긴 잘 모르는데.”
“그냥 하이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음, 할 수 없군.”
대한과 올리버는 오랜만에 의견일치를 봤다.
둘은 그렇게 하이스를 앞장세워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정복했다.
그들은 맨해튼 곳곳의 관광 명소를 즐겁게 웃고 떠들며 돌아다녔다.
물론 방송은 기본적으로 돌아갔다.
석양이 지자 대한과 올리버는 비행기를 타러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대한에게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은 하이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는 하이스를 품에 안고 말했다.
“시합에 올 수 있어?”
“꼭 올 수 있도록 해볼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어쨌든, 그때 보자.”
재회를 기약하는 대한의 말에 하이스도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대한과 올리버, 조동혁과 경호팀은 이날 밤늦게 베벌리힐스로 돌아왔다.
당연히 이번에도 올리버 덕분에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게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딱하니 말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