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좋은 씨앗>
“올리버! 쟤들 왜 저러냐?”
“좋은 씨앗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올리버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하지만 대한은 대경실색했다.
“설마 씨앗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 씨앗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헐! 저들이 모두 처녀는 아닌가 보네.”
“넷은 미혼이고, 하나는 이미 결혼을 했군.”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알아.”
“그런데 왜 결혼한 여자까지 우리한테 추파를 던지는 거야?”
대한의 질문에 올리버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얘기했잖아. 좋은 씨앗을 얻으려고 그런다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의미도 있다고.”
“수혈?”
“저들이 너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야. 호세와 네 조수한테도 곧 접근할 거야.”
“조동혁 매니저한테도! 그러다가 저 여자 남편이나 아버지들한테 맞아 죽는 거 아냐?”
“뭐? 푸하하하! 얘들이 얼마나 개방적인데 그딴 짓을 해!”
올리버는 대한의 말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여자들도 같이 따라 웃으며 대한에게 윙크하기 시작했다.
‘에바!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자지 말고 밤을 새워야겠다.’
―성경에도 씌어있지 않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저도 마스터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닥쳐!’
―눼에에에!
에바는 고개를 팍 숙이며 벽에 대고 뭐라고 손가락으로 쓰기 시작했다.
대한은 그 꼴통 같은 모습에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시나브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4X4 트럭이 돌아오고 멧돼지의 사체가 한쪽에 와르르 쏟아졌다.
청년들은 손에 하나씩 칼을 들고 수돗가로 몰려갔다.
그리곤 정육점 아저씨처럼 멧돼지의 껍질을 벗기고 살과 뼈를 바르기 시작했다.
총에 맞은 곳은 과감하게 떼어내서 버렸다.
그런데도 고기양이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해라!”
“네, 주인님.”
올리버의 말에 다들 반색했다.
청년 한 명이 좋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못 보던 트럭들이 꾸역꾸역 나타났다.
그들은 끊임없이 멧돼지의 사체가 가져와 내려놓기 시작했다.
오늘 올리버 일행이 헬리콥터에서 사냥한 멧돼지들을 전부 가져오는 모양이었다.
점점 멧돼지의 사체가 한쪽에 산처럼 쌓여갔다.
수십 마리의 멧돼지가 껍질이 벗겨지고 살과 뼈가 발라지자 피비린내가 훅 풍겼다.
그러나 살을 바르는 청년들은 모두 신이 난 표정으로 아주 열심히 칼질했다.
“저들한테는 오늘이 축제야. 어디 가서 이렇게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겠어.”
“그래서 다들 너한테 감사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은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네놈 생각이야 내가 뻔히 읽고 있지.”
그때 자신을 찾아왔던 물라토 여인이 조동혁과 팔짱을 낀 채 나타났다.
“네 조수는 이미 넘어간 모양이군.”
“크흠.”
대한은 무안해서 헛기침했다.
살짝 배신감도 들었다.
조동혁은 이미 헬렐레 상태가 되어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는 그만두기로 했다.
애들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저러는데…….
굳이 방해하는 것도 꼴불견 같았다.
베란다 한쪽에선 멧돼지 고기를 손질했다.
베란다 바깥쪽에서는 멧돼지들을 통째로 불에 굽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멧돼지 통구이를 하는 것이다.
치익! 치익! 치이익!
멧돼지 기름이 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풍기며 식욕을 자극했다.
꿀꺽!
대한은 절로 목구멍에 침이 넘어갔다.
올리버는 시원한 세르베자 생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청년들은 올리버 일행이 잡은 멧돼지의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냈다.
처녀들은 페이조아다와 슈아스쿠 등 각종 요리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테이블에는 먹거리가 쌓여갔다.
그는 구아바 주스를 홀짝거리며 멧돼지 통구이가 다 익기만을 기다렸다.
조동혁은 물라토 여인과 손짓·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의사소통하고 있었다.
그래도 언제든지 찍을 수 있게 카메라 세팅까지는 모두 끝내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카메라는 에바가 통제하기 때문에 걱정할 일도 없었다.
올리버의 경호원 호세만 단단히 무장을 한 채!
마테차를 마시며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있었다.
“올리버! 경호원은 언제부터 고용한 거야?”
“어렸을 때 납치를 당한 뒤부터야.”
올리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납치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그렇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납치?”
“응, 어머니의 돈을 노리고 납치범들이 나를 노렸지.”
“그럼 납치가 된 게 아니었어?”
“납치가 된 건 맞아. 하지만 운이 좋게도 하루 만에 구출됐어.”
“다행이다.”
그의 놀란 목소리에 올리버가 예의 그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너 걱정했구나?”
“무슨 개소리야? 그냥 어린 네가 납치에서 구출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데.”
“이젠 괜찮아. 어렸을 때는 트라우마가 생겨서 악몽도 꾸곤 했지만, 이제는 다 극복했어.”
올리버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살짝 처연해졌다.
“혹시 너 그래서 일부러 종합 격투기 선수가 된 거야?”
“종합 격투기만이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울 수 있는 온갖 무술과 격투기는 다 섭력했어. 다시는 납치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거든.”
“아!”
버터같이 느끼한 놈에게도 나름 아픈 과거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납치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자 무술과 격투기에 심취한 것 같았다.
다시는 납치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자신을 단련해온 어린 올리버가 상상됐다.
그러고 보니 올리버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너를 경호하기에는 호세 경호원의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붙여준 경호팀이 24시간 나를 보호했어.”
“그럼 호세 경호원은 최근에 고용한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야. 호세는 사실 우리 가문의 집사인 호르헤의 아들이야.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서 친구처럼 지냈지. 하지만 납치 사건이 있고 난 뒤에는 어머니의 특명으로 경호원이 되기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어.”
“아!”
“호세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온갖 무기를 다룰 줄 알고 각종 무술에도 정통해. 특히 미국의 유명한 민간군사기업의 전문경호원 육성과정을 수료해서 경호업무에도 뛰어나지.”
듣고 보니 다들 나름 구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은 호세를 쳐다봤다.
올리버의 얘기를 듣고 난 후라서 그런지 뭔가 든든해 보였다.
시선을 돌려 조동혁을 바라봤다.
이제는 물라토 여자와 꽤 친해졌는지 웃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고 뭔가 심히 가벼워 보였다.
“대한! 경호원이 필요한 거야?”
“나도 슬슬 경호해줄 사람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지. 너 정도 인기인에다 유명인이면 당장이라도 경호원을 고용하는 게 좋아. 내가 구해줄까?”
“네가 어떻게 구해?”
“호세한테 물어보면 되지. 직접 경호팀을 운영하고 있으니 그쪽 세계에도 정통하고 경호업체에도 발이 넓어서 쓸만한 경호원을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일단은 한번 알아봐 줘!”
대한은 올리버가 부럽진 않았다.
하지만 호세를 개인 경호원으로 둔 올리버는 부러웠다.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꼭 자신만의 경호원을 가지고 싶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는 괜찮아. 호세도 있고 그가 이끄는 경호팀이 지켜주니까. 하지만 혼자 돌아다닐 때는 아무래도 경호원을 한 명 붙이는 게 좋을 거야. 요새 상파울루에서 돈을 노리고 납치하는 놈들이 있어서 좀 위험할 수 있거든.”
“그래?”
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대한! 농담이 아니야. 이곳 농장만 하더라도 벌써 몇 명이나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어.”
“알았어. 주의할게.”
겉으로는 주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바가 있는 대한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때마침 농장의 처녀들이 접시를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올리버를 불렀다.
“주인님! 고기가 다 구워졌어요.”
대한과 올리버는 즉시 대화를 중지하고 테이블로 이동해 앉았다.
“이야아! 맛있겠다.”
“다 됐나 보다. 어서 먹자.”
커다랗고 하얀 접시에 놓인 두툼한 스테이크!
멧돼지 통구이에서 잘라온 미디엄 레어로 잘 익힌 살코기였다.
붉게 익은 속살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입맛을 유혹했다.
대한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포크를 잡고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서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입 안에서 멧돼지 살코기가 과일처럼 육즙이 터졌다.
혀 전체를 애무하듯 살살 녹이는 맛의 폭풍이 불었다.
‘맛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한은 이제 말을 하지 않았다.
접시 위에 놓인 고기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열심히 먹고 씹기만을 반복했다.
테이블 주변이 잠시 묵인된 침묵으로 장악당했다.
순식간에 접시가 깨끗이 비워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처녀들은 새 접시를 가지고 베란다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부위가 좀 달라졌다.
아까는 안심이었다면 이번에는 등심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접시가 비워질 때마다 멧돼지 통구이의 부위와 맛이 달라졌다.
‘나 너무 과식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환골탈태와 신체강화를 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으니 조금 더 드셔도 됩니다.
‘아니, 이런 반가운 소식이 있나!’
대한은 에바를 칭찬하며 열심히 멧돼지 바비큐를 먹어댔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올리버도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고기를 뜯었다.
조동혁도 이게 웬일이냐며 미친 듯이 고기로 배를 채웠다.
다들 너무 고기만 먹자 여자들은 안 되겠다며 접시에 샐러드와 과일을 담아줬다.
이어 큰 컵에 탄산음료를 넘고 얼음 몇 개도 동동 띄워서 가져왔다.
“고마워!”
“고맙습니다.”
대한과 올리버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농장 청년들과 처녀들은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마치 주인님의 식사가 끝나야만 먹을 수 있다는 태도였다.
특히 여자들은 테이블 주위에 서서 올리버와 대한의 시중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먹여달라고 말했다면 아마 기꺼이 먹여줬을 것이다.
“아이고, 배불러!”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조동혁이었다.
그는 이미 올챙이 배가 된 상태였다.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모습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었다.
올리버는 꽤 잘 버텼다.
하지만 그도 보통사람의 몇 인분을 먹고 나자 포크를 내려놓았다.
역시 제일 많이 먹은 것은 대한이었다.
그는 에바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빠르게 소화를 시켜버렸다.
그러면서 에너지원을 확보해 전신 곳곳에 비축했다.
덕분에 대한은 올리버가 먹은 두 배의 양을 먹고도 배부른 줄 몰랐다.
‘인제 그만 먹어야겠다.’
―조금 더 드셔도 됩니다.
‘더 먹고 싶어도 사람들 눈치 때문에 안 돼!’
―아! 그렇군요.
대한의 말에 에바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를 괴물 보듯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잘 먹었다.”
“그렇게 잘 먹어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난 손님의 도리를 다하려는 거야.”
“크크크! 그럼 난 주인의 도리를 다한 셈이네.”
올리버는 킥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옮겨간 것이다.
대한도 그를 따라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농장 청년들과 처녀들이 베란다 바깥으로 테이블을 들어 옮겼다.
그때부터 그들만의 엄청난 먹방이 시작됐다.
“와아! 진짜 잘 먹는다.”
“한창 먹을 때 아닙니까!”
“그건 그러네.”
다들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공짜로 멧돼지 고기를 포식할 수 있는데 마다할 일도 아니었다.
대한은 그들이 먹고 떠드는 것을 구경하며 마테차를 홀짝거렸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자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에바의 보고를 듣자 금세 속이 불편해졌다.
―마스터! 보고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보고해봐!’
―로티 그룹 부회장 노동규가 그의 비서인 고인분에게 마스터를 응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대한은 당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세상의 시선이 마스터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알고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나 시선이 좀 뜸해지면 뭔가 사고를 칠 거란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