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4초>
“슬슬 나갈 준비 합시다.”
그때 페드루 코치의 말이 두 사람의 귀에 울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벌써 경기가 끝나있었다.
“뭐야! 진짜 올리버 말대로네.”
“무하하하! 거봐 내가 뭐랬어? 금방 끝날 거라고 했잖아.”
그냥 우연히 얻어서 걸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올리버가 먼저 말한 게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올리버의 설레발을 뒤로하고 대한은 글러브를 끼고 선수대기실을 나섰다.
화려한 가운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또 브라질 사람들의 취향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와아아아!”
대한이 르네상스 호텔 크리스털 볼륨의 입구를 통과하자 큰 함성이 일어났다.
그를 본 관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때부터 대한의 심장이 서서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재되어 있던 그의 야성이 점차 지면을 뚫고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은 링 위로 올라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옥타곤에 들어갔다.
팔각형의 링 위에는 오늘의 대전상대가 벌써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대한은 ‘오말 악메도브’를 쳐다보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예열했다.
오말은 신기하게도 신장과 몸무게가 대한과 똑같았다. 하드웨어는 누가 더 좋다고 할 게 없는 상태란 말이다.
준비도 잘해왔는지 오말은 어디 하나 나무랄 때가 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고 경기를 치를 선수 두 명을 차례로 소개했다.
“블루 코너!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 축구 선수! 이번 U-17 브라질 월드컵을 우승시킨 득점왕 출신! 오늘 UFC 브라질 대회에서 데뷔전을 가지게 될 선수는 바로 이대한!”
“와아아아!”
경기장의 수천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러시아 출신의 UFC 선수 오말보다는, 확실히 축구유망주로 어리고 잘생긴 대한의 인기가 월등하게 좋았다.
“레드 코너! 23전 19승 4패! 러시아 폭격기 오말 악메도브!”
짝짝짝짝!
경기장에 박수 소리가 메아리쳤다.
오말은 생각보다 환호성이 작고 손뼉 치는 소리만 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데뷔전을 치를 햇병아리와 백전노장의 실력파인 자신을 비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관중들까지 대놓고 차별하니 이번 경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말은 초반에 상대를 박살을 내주리라 마음먹으며 눈에 힘을 줬다.
심판이 두 사람을 옥타곤의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심판의 주의사항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과 오말이 각자의 코너로 돌아갔다.
심판은 좌우를 한번 살펴보고는 곧바로 경기 시작을 선언했다.
땡!
대한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정면으로 달려갔다.
오말도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순간 대한은 오말이 테이크다운을 노린다는 것을 간파했다.
오말이 몸을 숙이며 들어오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띄우며 무릎을 위로 치켜들었다.
빡! 쿵!
대한의 니킥을 맞은 오말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심판은 즉시 경기를 중지시키고 의료진을 불러들였다.
더 이상 경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와아아아!
경기장이 뜨거운 함성으로 진동했다.
전광판에 4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경기 시작 4초 만에 KO 승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자 다시 한번 관중들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냐?’
―잘하셨습니다.
‘잘하긴 뭘 잘해? 그냥 4초 만에 끝이 났는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걸 느낄 틈이 전혀 없었잖아.’
대한은 괜히 에바에게 짜증을 냈다.
사실 오늘 태권도 발차기로 나름 멋진 KO승을 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 한번 못써봤다.
반사적으로 내민 니킥에 상대는 무너지고 그대로 경기는 끝나버렸다.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정확한 능력을 확인하러 나온 대한!
이런 그에게는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사흘 뒤에 벨라코어 FC가 종합 격투기 대회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개최합니다. 그거라도 한번 자리를 알아봐 드릴까요?
‘이제 겨우 사흘 남았는데 어떻게 참가를 해?’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라이트헤비급 메인 경기에 참여할 선수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습니다. 지금 그쪽에서 급히 대타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
그제야 대한은 에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사이 옥타곤 위에는 심판과 아나운서가 올라왔다.
오말 선수는 진즉에 들것에 실려 나갔다.
“이대한 선수와 오말 선수의 5분 3라운드 경기는 4초 만에 니킥으로 오말 선수를 KO 시킨 이대한 선수의 승리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심판이 대한의 손을 잡아 올리며 승리를 선언했다.
와아아아!
경기장은 대한을 환호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VIP 좌석을 쳐다보자 조동혁이 두 손을 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조동혁 옆에는 그에 못지않게 하이스가 방방 뛰어대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제야 대한은 자신이 데뷔전을 KO로 멋지게 장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운서가 잽싸가 다가와 마이크를 들이댔다.
“이대한 선수! 오늘 경기 잘 봤습니다.”
“너무 짧아서 돈 내고 보신 분들께 미안하네요.”
아나운서와 모든 관중이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재치가 넘치시는군요. 오늘 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준비해온 게 참 많은데 보여드린 게 너무 없어서 송구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오래 경기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관중들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UFC 데뷔전을 KO로 승리한 것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한은 짧게 인터뷰를 마치고 경기장을 내려왔다.
하이스가 벼락같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키스하려는 것을 간신히 잡아 입술 대신 뺨을 내줬다.
그녀는 그의 뺨에 몇 번이나 키스하더니 다시 한번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페드루 코치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간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관중과 파파라치들에게 엄청 사진을 찍혔다.
나중에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 무슨 말을 지어낼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날은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긴 연습에 4초라는 짧은 경기로 데뷔전을 마감했다.
* * *
버튼을 누르자 펜트하우스의 커다란 통짜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사이에 온기를 가진 가냘픈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기분 좋게 쓸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절로 졸음이 솔솔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마스터!
‘왜?’
대한은 에바가 갑자기 말을 시키자 날카롭게 반응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에바의 말에 길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마스터의 UFC 데뷔전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뭐 이미 예상하였던 것 아니야?’
―그 정도였다면 마스터의 기분을 상하게까지 하면서 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직접 한번 보시죠.
에바는 대한을 위해 대한민국의 유명 포털사이트의 기사들을 차례로 보여줬다.
머리기사만 읽어도 상당히 자극적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대한 선수, 오늘 UFC 데뷔전 승리!]
[U-17 브라질 월드컵 우승의 주역, 축구를 포기하다!]
[축구 천재 브라질로 귀화?]
[귀국하지 않은 축구 유망주, 그 이유는?]
[축구 유망주에서 종합 격투기 선수가 되다!]
[국위 선양한 축구 천재 미래를 버렸다!]
[이대한, UFC 브라질 대회 데뷔전 KO승!]
[이대한 선수의 충격적인 종목 전향!]
[나라의 보물을 빼앗긴 대한축구협회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대한 선수는 축구 선수인가, 종합 격투기 선수인가?]
[대한민국의 인재 정책 이대로 좋은가?]
[어린 천재는 기회를 잡은 것인가, 아니면 배신자인가?]
[누가 어린 축구 천재를 밖으로 내몰았는가!]
확인 전화 한번 없이 기사가 아닌 소설을 쓴 기자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이놈들 전부 확인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예, 마스터! 정반석 변호사에게 연락해두겠습니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통해 일단 해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기자회견을 해? 누구 좋아하라고? 차라리 대한 TV에서 방송하는 게 빠르지.’
―그건 마스터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것보다 접촉하고 있는 구단과 협상은 잘되고 있어.’
―전화로 계속 협상 중입니다. 하지만 마스터가 내건 조건을 받아주는 구단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안 되면 말아. 내가 굳이 계약에 목을 맬 이유는 없으니까.’
대한은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이스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과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랑스런 손길에 애정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음이 편해진 대한은 에바에게 어제 경기가 끝난 후 받은 정산금에 관해 물었다.
‘어제 UFC 브라질 대회 데뷔전에서 얼마나 벌었지?’
―기본 수당이 10만 달러에 승리 수당 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다 ‘오늘의 KO’ 보너스로 10만 달러, ‘최고의 퍼포먼스’ 보너스로 10만 달러, 대회 후원자 보너스로 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럼 다 합쳐서 50만 달러를 벌었군.’
―그렇습니다. 한화로 환산하면 6억 원입니다.
‘경기를 겨우 4초 뛰고 번 것치고는 벌이가 나쁘지 않군.’
대한의 말에 에바는 부수입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 UFC에서 페이퍼뷰(PPV) 판매량과 수익분배율에 따른 마스터의 몫을 보내왔습니다.
‘얼마나 되는데?’
―마스터의 경기를 보기 위해 판매된 페이퍼뷰는 총 35만 뷰입니다. 그중 25달러짜리 온라인 스트리밍 동영상이 25만 개, 50달러짜리 케이블TV가 10만 개입니다.
‘이게 많은 거야, 적은 거야?’
―데뷔전치고는 꽤 많은 편입니다. 물론 최고의 흥행을 보이는 UFC 스타의 경우에 비하면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첫 경기치고는 굉장히 많이 팔린 경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익이 얼마라는 거야?’
대한은 페이퍼뷰가 얼마나 팔린 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중요한 것은 수익이 얼마냐는 것이다.
―1,125만 달러, 한화로 135억 원의 총수익에서 5분의 1의 분배율을 적용하면 27억 원을 버셨습니다.
‘와우! 생각보다 꽤 많네.’
―UFC에서는 마스터의 잠재력에 대해 평가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앞으로 분배율을 최대한 높이도록 해야겠군. 맥 아저씨처럼 분배율이 3분의 1이었다면 오늘 난 45억 원을 벌었을 거야.’
―맞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에바가 제공해주는 정보를 기반으로 협상을 해서 그나마 5분의 1의 분배율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에바는 대한의 말에 더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한이 원하는 분배율에 명백하게 미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경기 한번 치르고 51억 원을 벌었군.’
―페드루 코치를 비롯한 코치진의 고용 비용은 찰스가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보너스는 주셔야 합니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당연히 보너스를 지급해야지. 앞으로도 부탁할 게 많거든. 에바가 알아서 적당히 보너스를 주도록 해!’
―네, 마스터.
대한의 말에 에바는 그가 코치진에게 부탁할 일이 뭔지 유추해 보았다.
―벨라코어 FC가 주최하는 벨라코어 브라질 대회에 참석하실 겁니까?
‘응.’
―새로운 재능도 흡수해야 합니다.
‘그건 이따가 올리베이라 주짓수 체육관에 가서 무에타이를 배울 거야.’
―오늘 온다는 무에타이 코치에게 재능을 흡수하실 생각이시군요.
‘맞아. 올리버가 4연승을 올리면 무에타이를 가르칠 코치를 초빙한다고 했어. 그걸 하루 만에 해낸 찰스가 참 대단해!’
올리버는 대한의 KO승에 자극을 받았는지 다음 경기에 바로 화끈한 KO승을 거뒀다.
그로 인해 브라질에서 올리버의 인기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누렸다.
“하이스! 그만 가봐야 하지 않나요?”
“맞아요. 오늘 사진 촬영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그럼 우리 같이 나가요. 나도 올리베이라 주짓수 체육관에 갈 거예요.”
“좋아요.”
하이스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뜻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대한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이스는 그를 체육관까지 데려다주고 떠나갔다.
체육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올리버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여어! 대한! 어서 와!”
“올리버! 오늘 쉰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나 무에타이 배워야 해!”
“그럼 잘됐다. 나도 옆에서 구경 좀 하자.”
“그렇게 해.”
올리버는 대한의 말에 전직 무에타이 챔피언이었던 막퉁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