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새로운 길>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자 금세 브라질 선수들의 움직임이 방만해졌다. 이때부터 브라질 선수들은 의욕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선수들은 공세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골!”
그러다 최민석이 기어코 한 골을 터트렸다. 이어 미드필더 서지민도 중거리포로 한 골을 추가했다. 나중에는 수비수 이태선까지 코너킥 상황에서 헤더로 골 맛을 봤다.
삐이익!
주심의 긴 휘슬로 경기가 종료됐다.
“와아아아!”
경기장은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이 내로라하는 세계의 강호들을 모두 물리치고 끝내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브라질 선수들은 헉헉대며 잔디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한민국이 브라질을 7:0으로 대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브라질 사람들은 자국의 선수들을 그리 타박하지 않았다. 브라질이 못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너무 잘했다는 분위기였다.
브라질만 대패했더라면 아주 욕을 바가지로 퍼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 말고도 대한민국에 대패한 팀은 더 있었다. 이 사실이 오히려 묘하게 그들에게 핑곗거리가 되어버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이 세계적인 유망주들로 채워진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U-17 브라질 월드컵에서 자랑스러운 대한의 전사들이 우승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다 같이 우리 어린 대한전사들을 축하해주십시오.”
“예! 대한의 승리입니다.”
이들은 묘하게 대한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시청자들은 대충 두 사람의 의도를 짐작하고 웃음을 지었다.
“대한아! 잘했다.”
“감독님도 수고하셨어요.”
“그래. 우리 모두 협력해서 우승한 거야.”
대한과 김수정 감독이 서로 포옹을 했다. 코치들과 최민석이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나머지 모든 선수도 와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렇게 감동적인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며 우승을 자축했다.
대회 운영자는 곧바로 시상식을 거행했다.
우승은 대한민국!
준우승은 브라질이었다.
3위는 아르헨티나가 차지했다.
“와아아아!”
시상식에서 대한이 월드컵을 잡고 힘차게 들어 올리는 순간!
파파팟! 파파파팟! 파파파파파팟!
경기장이 환해질 정도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같은 시간, 대한민국에선 거대한 환호성이 전국을 메아리쳤다.
경기장에서도 우레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은 이것 말고도 기뻐할 일이 남아있었다.
대한이 득점왕과 도움왕, 대회 MVP와 결승전 MVP를 싹쓸이한 것이다.
특히 득점왕의 골 수는 무려 24골이었다.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가사의한 대기록이었다.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은 U-17 브라질 월드컵 우승으로 환하게 빛났다. 대한은 U-17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을 견인한 최고의 선수로 더욱 밝게 빛났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에 대한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켜버린 것이 최고의 수확이었다.
오늘은 그에게 생애 최고의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이 햇살처럼 그를 비추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첨벙! 첨벙! 첨벙!
허공으로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며 풀장 안의 물이 연속적으로 치솟았다.
“꺄악!”
“호호호!”
남미의 무지막지한 굴곡을 보여주는 비키니 미녀들!
하이스와 그녀의 친구들은 물장난을 치며 깔깔댔다.
대한은 비치 의자에 몸을 기대며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로 올렸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의 눈에 풀장의 찰랑거리는 물 너머 파도가 넘실거렸다.
“아! 좋다.”
바닷가에 세워진 그림 같은 별장이다.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는 비치 파라솔이 아름답다.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시원한 바람의 향기!
테이블 위에 놓인 온갖 산해진미와 음료수가 저마다 입맛을 유혹했다.
풀 안에 가득한 글래머 미녀들의 웃음소리가 즐겁다.
파라다이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마스터! 여기서 얼마나 더 머물 예정이시니까?
‘찰스의 별장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이틀째야. 결승전의 피로도 다 풀리지 않았다고.’
―그럼 당분간 이곳 비토리아에 계속 계시겠네요?
‘왜 자꾸 그걸 물어보는 거지? 혹시 무슨 일 있어?’
대한은 에바가 그의 일정을 캐묻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마스터! 보고드릴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보고?’
―현재 국내에서 마스터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음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음모라니? 설마 누가 우리 부모님을 노리기라도 하는 거야?’
그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건 아닙니다. 마스터의 코를 꿰려는 간악한 사기꾼들이 모종의 간계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이걸 보십시오.
에바는 허공에 동영상과 사진 등 각종 자료를 띄어서 보여줬다.
‘로티 그룹?’
―네, 로티 그룹의 부회장 노동규가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노재정과 함께 사악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음.’
대한은 그녀의 설명에 침음성을 흘렸다.
에바는 그에게 차분히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황당한 사태에 대해서도 잘 설명했다.
저간의 사정을 다 들은 대한은 타오르는 분노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노동규와 노재정, 이 새끼들이 숭신고를 K리그의 유소년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내게 사기를 쳐서 계약을 맺게 한 다음, 비싼 이적료를 받고 팔아넘기려 한다는 말이지.’
―예, 정확합니다.
그는 기가 막혔다.
대한축구협회 노재정 부회장이 사임해서 그냥 봐줬더니 뒤에서 몰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대한은 일이 이렇게 흐를 줄은 미처 몰랐다.
거기에다 로티 그룹의 노동규 부회장!
이자는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딴 쓰레기 같은 일에 동참한단 말인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고민 좀 해봐야겠다.’
―마스터! 이건 명백한 적대 행위입니다. 초반에 강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에바는 대한에게 강경한 응징을 권유했다.
이미 한번 경험이 있는 그녀라서 얼마든지 잘할 자신이 있었다.
회생 불가의 인간쓰레기 같은 놈들에게는 역시 염산 맛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대한은 그녀의 살벌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노재정과 노동규를 응징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않아.’
―근본적인 문제라면 마스터께서 숭신고 축구부 소속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노재정과 노동규가 아니더라도 머리가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꼼수야.’
―유소년 계약이나 준프로계약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에바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놈들도 그걸 모르고 이번 일을 추진하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히 도저히 계약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을 만들겠지.’
―그럼 어쩌려는 겁니까?
‘연못에 계속 그물을 던져댄다면 아예 바다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소속을 아예 바꿔버린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대한은 이를 악물었다.
일단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숭신고 축구부를 탈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마 숭신고 축구부에서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대한을 누가 데려가든 해당 구단에서 소정의 지원금이나 이적료를 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최소한 억 단위라는 것은 이미 지난 과거의 사례에 의해서 증명됐다. 숭신고 관계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꿀 빠는 일을 절대 놓칠 리 없다.
대한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예 숭신고를 나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숭신고를 나와야겠어.’
―다른 학교로 전학 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냥 자퇴하는 게 좋겠어.’
―오! 그것참 묘수로군요.
학교를 때려치운다는데 에바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한은 그 모습에 부모님의 실망하는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이번 일은 그냥 자기 내키는 대로 처리하긴 좀 곤란했다. 역시 부모님과 의논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국제전화 좀 하고 오자.’
―네, 마스터.
대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장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큰 키에 균형 잡힌 신체!
고도로 압축된 근육으로 이뤄진 멋진 몸매!
이 모든 것들이 미녀들의 눈빛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단을 타고 자신이 묵고 있는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창가의 소파에 앉은 대한은 즉시 집으로 화상통화를 걸었다.
마침 아버지 이태산과 어머니 김혜영이 집에 계셨다.
―대한아!
“어머니!”
―잘 지냈니?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김혜영은 스마트폰을 통해 대한의 얼굴을 보자 벌써 목소리가 울먹였다. 그런데 옆에서 이태산이 자꾸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보! 나도 얘기 좀 하자.
―아니, 왜 자꾸 이렇게 들이대요. 내가 먼저 통화를 시작했으니까 얘기 좀 하게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린 부부니까 뭐든지 같이 해야지.
대한은 이태산과 김혜영이 티격태격하자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셋이서 같이 얘기해요.”
―거봐! 아들도 같이 얘기하자고 하잖아.
이태산의 목청을 높이자 김혜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은 대한에게 집중하게 됐다.
“별일 없으시죠?”
―너 빼고 별일 있을 게 뭐가 있어.
“그럼 저 때문에 별일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너 왜 귀국 빨리 안 하냐고 맨날 여기저기에서 묻고 전화가 온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네가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브라질 삼바 축구를 배우고 있다고 했지.
“하하하! 잘하셨어요.”
이태산은 대한이 준 미션(?)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그가 집 사정을 물어보고 나자 이번에는 부모님이 대한의 사정을 물어봤다.
―넌 별일 없니?
“네, 전 잘 지내요.”
―지금 어디에 있는데?
“비토리아라고 항구도시에요. 여기서 사귄 친구 삼촌네 별장에서 쉬고 있어요.”
―설마 혼자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항상 조동혁 매니저가 동행하고 있어요.”
대한은 다 컸다고 생각하는데 부모의 마음은 물가의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인가 보다.
―그런데 집에는 언제 돌아올 거니? 지난번에 말한 대로 일주일 뒤에는 한국에 들어올 거야?
훅 치고 들어오시는 김혜영의 말에 대한은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절대로 숨겨서는 안 되는 일이라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아니에요. 조금 더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니? 여자 문제야?
“예에? 아니에요. 그런 거. 다만 좀 상의드려야 할 일이 하나 생겼어요.”
이태산과 김혜영은 대한의 말에 살짝 긴장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이 앞선 것이다.
대한은 이태산과 김혜영에게 있는 그대로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적당히 각색해서 두리뭉실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결국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말이네.
“맞습니다. 지금 저에게 학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에요.”
―학교 그만두면 브라질로 유학이라도 가려는 거야?
“당장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소식? 무슨 소식?
“그건 아직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잠시 몇 초의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혹시 학교를 그만두면 유럽리그에 진출하기 쉬워지는 거니?
“그건 또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요새 잘난 아들을 둔 덕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
대한은 조금 놀랐다. 이태산이 의외로 이적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찬성이다. 숭신고가 네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치워버려!
―나도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굳이 반대는 하지 않겠다.
김혜영은 물론이고 이태산도 대한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게 좀 아쉽긴 했다. 하지만 개인 방송으로 이미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대한이다.
U-17 브라질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끈 자랑스러운 아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아들만큼은 굳이 남들처럼 똑같이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대한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모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어지간한 부모라면 절대로 아들이 학교를 때려치우는 것을 찬성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대한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서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들이 스스로 개척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 길이다. 두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아들인 대한의 의사가 중요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학업은 계속했으면 좋겠구나.
“네, 학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꼭 다시 시작할게요.”
―난 네 아버지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학벌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자유롭게 살아라.
이태산의 걱정에 가슴 뭉클했다.
김혜영의 말에는 절절한 사랑이 느껴졌다.
대한은 두 사람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겨놓기로 했다.
“이게 더 안전한 지름길이에요.”
―어디로 가는 길인데?
“유럽리그로 가야죠.”
―난 EPL이 좋더라.
―난 라리가도 괜찮은데.
그는 두 분의 말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