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칠레전>
로비로 내려가자 다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이 나타나자 김수정 감독이 얼른 그를 데리고 호텔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대한아! 징벌위원회에 부쳐진 거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어떻게요?”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그러더라.”
“그럼 아예 기록도 남지 않겠네요.”
“당연히 그렇겠지.”
“저 이제 경기 출전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 거예요?”
“응. 그런 셈이지.”
대한과 김수정 감독의 얼굴은 밝았다. 그동안 두 사람에게 부담을 주던 일들이 신기하게도 하나씩 다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기 위해 에바가 한 노력은 정말 지대했다. 전문가 수십 명을 동원해도 아마 이렇게 일을 잘 풀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이 사건이 전화위복이 됐다. 스캔들이 마치 노이즈 마케팅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명성도 올라갔다.
그를 모르던 사람들도 U-17 브라질 월드컵의 대활약과 겹쳐지며 자연스럽게 대한에 대해 알게 됐다. 그것은 그대로 대한 TV의 구독자와 팔로우 숫자로 변해 갔다.
“버스 왔다. 모두 차에 타라!”
김대양 코치의 말에 다들 가방을 들고 전세버스에 승차했다. 대한과 김수정 감독도 대화를 멈추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카리아시카로 출발하자 그 뒤를 동혁이 택시를 타고 쫓아왔다.
부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타지우 클레베르 안드라지 경기장에 도착했다.
다시 찾은 경기장은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서둘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시간은 아직 넉넉히 있었다. 하지만 다들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김수정 감독은 김대양 코치와 공우공 코치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어렵겠어요.”
“다들 피로가 쌓여있다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그럼 작전을 좀 바꿔보죠. 대한을 선발로 내세우는 겁니다.”
김대양 코치의 말에 김수정 감독과 공우공 코치가 눈을 빛냈다.
“이미 선발 명단을 넘겼습니다만.”
“그거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선수를 빼면 그만이죠.”
김수정의 말에 김대양 코치는 한 선수를 가리켰다. 오늘따라 움직임이 이상하게 굼뜬 공격수 노유상이었다. 뭔가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빼고 대한을 넣으면 될 겁니다.”
“대한이 전후반 80분 경기를 전부 소화해낼 수 있을까요?”
“저걸 보십시오.”
공우공 코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려 대한을 쳐다봤다. 대한이 미친 듯이 축구장을 달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지금 대한은 힘이 뻗쳐서 못 견디겠다는 모습이었다.
“한번 맡겨보시죠.”
“어차피 후반전에 내보내나 전반전에 미리 내보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좋습니다. 나중에 정 안되면 다른 선수와 교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한은 선발 아닌 선발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나가 경기장에 21,000명의 관중이 꽉 들어찼다. 이미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활약을 알고 있는 관중들이다. 거기에다 올리베이라 가문의 입김이 더해지자 당연히 경쟁국인 칠레보다는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을 선호했다.
삐익!
“와아아아!”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경기장이 함성으로 진동했다.
드디어 대한민국과 칠레의 U-17 축구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대한은 경기를 지켜보며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미리 들은 언질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전반전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선수 교체가 있었다.
공격수 노유상이 나가고 대한이 들어갔다.
와아아아!
경기장은 하이스 치어리더팀의 인도에 따라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짝짝짝! 짝짝!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생소한 응원문화였지만 흥이 있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라 금세 적응했다.
한편 노유상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수정은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선수가 자신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도 선수의 일이자 의무이자 능력이었다. 몸 상태가 개판인 채로 경기에 뛰려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민폐였다.
칠레팀의 벤치는 대한의 등장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아이티와 프랑스를 차례로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선수가 나온 것이다.
그동안 한 번도 전반전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한민국의 히든카드가 전반전에 바로 나왔다.
그들은 상대 팀의 작전이 뭔지 알아내려고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칠레팀의 감독과 코치진은 절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승! 가즈아!”
“가즈아!”
대한이 미친 척 소리를 지르자 대한민국 선수들이 같이 소리를 질렀다.
주심은 이게 뭔가 하고 쳐다봤다. 그러다 별다른 문제가 없자 이내 경기에 집중했다.
―마스터, 칭호 효과는 안 쓰실 겁니까?
‘아니, 당연히 써야지 하지만 어떤 것을 써야 할지 잠시 판단 좀 해보고.’
―네, 저도 분석해 보겠습니다.
대한은 시작부터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마치 눈 오는 날 마당에 나온 강아지처럼 동분서주했다.
이렇게 공격수가 최전선에서 압박을 해주자 칠레 선수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튀어나오고 볼을 빼앗기게 됐다.
“민석아!”
대한은 수비수 다니엘에게 빼앗은 볼을 즉시 최민석에게 보냈다. 그런 후 곧바로 수비수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최민석은 차분히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리턴 패스를 해줬다.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 오른쪽 모퉁이에서 볼을 받은 대한! 그는 한 박자 빠르게 중거리 슛을 때려버렸다.
뻥!
워낙 강하게 차는 바람에 수비수들의 몸이 절로 위축되었다. 덕분에 축구공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칠레의 훌리오 골키퍼는 갑자기 날아든 볼을 보고는 힘차게 몸을 날렸다.
퉁!
간신히 손에 걸린 축구공은 골대를 맞고는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 앞에 최민석이 대기 중이었다.
최민석은 가볍게 발을 내밀어 볼을 튕겼다.
“골!”
와아아아!
일순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큰 함성이 터졌다.
대한은 그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달려갔다.
최민석은 골 세레모니도 하지 않고 대한에게 달려왔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쁨을 함께 나눴다.
“골이다!”
“우와! 전반 10분 만에 골이 나왔다.”
“대한이 죽이네.”
“민석이가 잘했어. 기회를 노리고 잘 들어갔어,”
“역시 대한이다.”
“둘의 콤비가 아주 그냥 죽이는구먼.”
대한민국 벤치도 분위기가 환해졌다. 경기가 시작되고 이른 시점에 골이 나왔다. 이렇게 한 골을 먼저 넣어주면 경기 운영 하기가 참 편해진다.
다들 크게 기뻐했지만 노유상 만큼은 암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봤자 누구 하나 그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한! 나이스!”
“대한 최고!”
하이스와 그녀의 친구들도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그들은 최민석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냥 무조건 대한의 이름만 외치며 좋아했다.
“하하하! 이건 이대한 선수가 그냥 떠먹여 준 거나 다름없어요.”
“그래도 최민석 선수가 침착하게 마무리를 잘했습니다.”
U-17 브라질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는 정광용 축구캐스터와 박승재 아나운서도 골에 대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시청자와 기쁨을 함께 나눴다.
“전반전에 이대한 선수를 투입할 줄은 몰랐네요.”
“김수정 감독이 노유상 선수의 폼이 떨어진 것을 보고 바로 교체를 해준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제 전반 10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몇 골이 더 나올지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칠레는 축구 강국입니다. 절대 약한 팀이 아니에요. 자만하면 안 됩니다.”
걱정과 우려도 빼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한과 최민석이 공격에 힘을 싣자 뒤에서 수비하는 선수들이 훨씬 편해졌다.
미드필더진도 잘 짜인 조직력을 발휘하며 두 사람을 든든하게 받쳐줬다. 이러니 볼이 중앙선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피곤이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리고 피곤한 것은 칠레 팀도 마찬가지였다.
‘결정했어.’
―뭘요?
‘민첩 스탯을 증폭하고 골 결정력을 부스팅 하기로 말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한은 즉시 칭호 두 개의 효과를 발현했다.
당장 그의 동작이 전보다 훨씬 민첩해졌다. 그리고 칠레의 악몽이 시작됐다.
“이쪽이야!”
최민석이 미드필더진에게 볼을 받은 후 곧바로 대한에게 뿌려줬다.
칠레의 수비수가 무려 3명이나 몰려있었지만 어떻게든 기어코 볼을 지켰다. 아니,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한은 순간 돌파로 두 수비수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속도와 움직이는 시간 차로 다시 한 명을 제쳐냈다.
중남미 선수들처럼 드리블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아주 정교했다.
그로 인해 칠레의 수비수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의 돌파를 허용해야만 했다.
페널티 에어리어로 들어간 대한은 골문을 슬쩍 한번 보고는 그대로 볼을 차버렸다. 골대 정면으로 날아간 축구공은 놀란 훌리오 골키퍼 얼굴 위로 빠져나갔다. 정말 맞고 죽으라고 찬 볼이라서 골키퍼가 손을 쓸 틈조차 없었다.
와아아아!
다시 한번 경기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이 골을 넣자 하이스와 친구들은 신이 났다. 그녀들은 축구 응원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렇다.
축구는 이겨야 맛이다.
아무리 잘 싸워도 지면 우울해진다.
대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따로 골 세레모니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중앙선으로 걸어갔다.
선수들이 일제히 다가와 그를 안고 축하를 해줬다.
“이제 겨우 두 골이야. 난 아직 배가 고프다고.”
“아오! 너 히딩크 감독 패러디하냐?”
“넌 안 고파?”
“당연히 골 고프지.”
“오늘 칠레를 아예 칠리로 만들어 버리자.”
“좋아!”
그들은 2:0으로 앞서자 없던 힘과 용기도 펑펑 터져 나왔다.
다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떠들어댔다. 그래도 수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김수정 감독이 매의 눈으로 수비수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의 공격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나름 위협적인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힘이 장사인 대한이 미친 듯이 다가서며 압박하자 그들은 놀라서 급히 볼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볼을 전부 잘 돌린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서둘러서 실수도 하게 마련이다.
“악!”
“잡아!”
결국, 볼을 빼앗긴 칠레 선수들이 대한의 유니폼을 잡고 늘어졌다.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달려갔다. 칠레 선수의 몸이 대한의 힘에 끌려갔다. 유니폼 일부가 찢어졌지만 주심은 어드밴테이지 룰을 적용해 경기를 그대로 진행했다.
도도도도도!
대한은 중앙선 우측에서 시작해 골대를 향해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반대편에서 최민석이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뒤쪽에는 미드필더들이 공격선을 끌어올리며 따라왔다.
‘치달이다.’
대한은 앞에 공간이 보이자 급히 치고 달렸다.
칠레 선수들이 그의 앞을 막고 바깥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대한은 바로 어깨를 안쪽으로 디밀고 몸싸움을 벌였다.
185cm에 83kg이라는 육중한 몸을 이길 17세 이하 선수는 드물었다. 그것도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게 아닌 정교한 개인기가 가미된 기술이었다.
칠레 선수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정당한 몸싸움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자 안심한 대한은 더욱 좌충우돌하며 적진을 돌파해 나갔다.
참다못한 풀백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최민석이 움직일 공간이 나왔다.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빈 곳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의 킬패스가 들어왔다.
‘X발! 이거 뭐야? 정말 미쳤다. 택배 패스가 따로 없네.’
최민석은 대한의 킬패스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볼을 받은 그는 곧바로 슈팅하려고 했다. 하지만 훌리오 골키퍼가 너무 가까운 곳까지 나와 있었다.
이미 충분히 각도를 좁힌 골키퍼와 싸우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보단 옆으로 달려오는 대한에게 넘겨 골을 넣게 하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최민석은 볼을 차는 시늉을 하다가 옆으로 툭 볼을 밀었다.
대한은 달려오면서 그대로, 축구공이 터져버리라고 강하게 찼다.
뻥!
텅 빈 골문 정중앙에 빨랫줄 같은 대한의 슛이 터졌다.
“골!”
“골입니다.”
“3대0이에요!”
“이대한 선수! 멀티 골입니다. 칠레 팀이 대한민국 U-17 축구 대표팀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최민석 선수와의 기가 막힌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완전히 칠레 팀의 허를 찔렀어요.”
“이대한 선수의 돌파에 이은 킬패스 그리고 다시 리턴 패스를 받아 꽝!”
“하하하! 정말 치명적인 공격입니다.”
“대한민국 축구 선수 중 저렇게 시원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공격수가 얼마나 될까요?”
“대한민국 축구의 장래가 참 밝습니다.”
정광용 축구캐스터와 박승재 아나운서는 신나게 중계 방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