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스파링>
문제는 양주동이 둘의 대화를 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양주동은 훈련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 사범님!”
“어! 왜?”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스스럼없이 말했다.
“얘가 그렇게 발차기를 잘해요?”
“응, 잘해.”
양주동의 물음에 오광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연 양주동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럼 한 수 배우게 스파링 좀 하게 해주세요.”
“대한은 태권도와 격술을 배웠는데 둘이 어떻게 스파링을 하겠다는 거야?”
“그래플링은 빼고 입식 타격으로만 승부를 보면 되잖아요.”
말은 스파링이라고 해놓고 승부를 보잖다. 대한과 오광래는 양주동의 뒤틀린 심사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됐다. 넌 계속 훈련이나 해라.”
오광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대한을 끌고 한쪽으로 가서 격술의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일반 사람은 잘 모르는 비기에 해당하는 기술이었다. 대한은 신이 나서 열심히 배웠다. 돈을 주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주동이 자꾸 와서 시비를 걸었다.
“거기서 그렇게 움직이면 훅 한 방에 무너져요.”
“에이, 그건 아니죠. 종합 격투기에서는 주짓수 기술이 있어서 어렵죠.”
“그런 기술을 쓰려고 했다간 니킥에 당해요.”
처음에는 그냥 모른 척했다. 대꾸를 해주지 않으면 지쳐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깐족대는 양주동의 방해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오광래의 눈에서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양주동, 너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
“얘가 능력이 되면 제가 한 수 배우는 거로 생각하고 감수할게요.”
오광래의 경고에도 양주동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한은 양주동의 싹수없는 짓에 슬슬 열이 받았다.
‘에바! 어떻게 생각해?’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냐는 유치한 질문은 안 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닥치고 누가 이길지 말해 봐!’
대한이 짜증을 내자 에바는 금세 태세 전환을 했다.
―당연히 마스터가 이길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기냐고?’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겁니다.
‘저놈이 입식 타격으로 승부를 보자고 하잖아.’
―상대는 복싱을 배운 선수입니다. 거리를 주면 마스터가 십중팔구는 당합니다.
‘만약 거리를 주지 않는다면?’
―반대로 십중팔구는 마스터의 승리가 될 겁니다.
대한은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몰랐다. 어쨌든 에바의 말대로 거리만 주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말이 된다.
‘저놈 정말 발차기에 문제가 있는 거야?’
―전형적인 복싱 선수입니다. 종합 격투기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차기에 약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발차기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종합 격투기 전적 4승 3패, 그중에서 2패가 하이킥과 프론트킥에 당한 겁니다.
‘그런데도 이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나를 자극해대네.’
―원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습성이 있습니다.
에바는 나름 심오한 말을 했다.
“양주동, 스파링하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제가 치료비 물어줄게요.”
“얘 말고 너 말이야!”
“네에? 저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디 원투데이 스파링합니까? 살살 하겠습니다.”
양주동의 자신 있는 말에 오광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대한아! 어떻게 할래?”
“전 좋아요. 단 카메라를 켜고 동영상 촬영을 할게요.”
“촬영은 왜?”
“개인 방송 때문이에요.”
“개인 방송?”
“네.”
오광래와 양주동 모두 개인 방송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할 수 없이 대한은 15분 동안이나 시간을 할애해서 개인 방송에 관해 설명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하는 방송이구나.”
“별거 아니네. 알아서 해.”
양주동이 괜찮다고 하자 오광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스파링 한번 해보자. 박 코치님 괜찮겠죠?”
“네, 괜찮습니다. 본인이 우겨서 하는 건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박 코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오광래를 쳐다봤다. 원래 코치라면 이런 스파링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박 코치는 양주동의 오만을 먼저 꺾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양주동은 자신이 저번 경기에서 어떻게 당했는지 잊고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었다.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양주동의 상태가 딱 그런 경우였다.
“그래도 보호 장구는 해야 한다.”
“물론이죠.”
대한은 철저히 보호 장구를 착용했다. 헤드기어를 쓰고 발목 보호대를 끼고 낭심 보호대를 찼다. 마지막으로 글러브까지 끼고 난 후 링 위로 올라갔다.
‘에바!’
―네, 마스터.
‘잘 찍어놔!’
―물론이지요.
양주동과 대한이 링 위에 오르자 박상무 코치가 심판을 봤다.
“그래플링 없이 입식 타격으로만 한다.”
박상무 코치는 대한과 양주동에서 규칙에 대해 말하고 주의점을 설명해 줬다. 둘 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박상무 코치가 뒤로 슬쩍 물러섰다.
“1라운드 5분이다. 최대 3라운드까지만 하고 끝낸다. 시작!”
가벼운 스파링이라 생각하고 곧바로 시작을 알렸다.
대한은 TV에서 세계적인 종합 격투기 대회를 자주 봤다. 그래서 페어플레이를 하자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양주동은 시작부터 더럽게 나왔다. 글러브 터치를 하지 않고 곧바로 공격해 온 것이다.
―마스터!
‘알고 있어.’
대한은 재빨리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오른쪽으로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양주동이 거칠게 다가오며 양쪽 훅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 같았다.
휙, 퍽!
대한은 가볍게 앞차기를 날렸다. 양주동은 대한이 날린 발차기를 배에 정통으로 맞고 움직임이 덜컥 멈추는 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달려들었다.
역시 발차기에 당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 복싱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대한도 잽을 날릴 줄 알았다. 그는 계속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왼손으로 날카롭게 잽을 뻗었다.
퍼퍼퍽!
반사 신경이 뛰어난 양주동은 글러브를 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호했다. 그때 대한의 번개 같은 오른쪽 미들킥이 작렬했다.
뻑!
양주동은 팔꿈치를 내려 간신히 막아냈다.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 새끼 뭐야? 진짜 오광래 사범 제자인가? 발이 겁나게 맵네.’
확실히 한 대 맞고 나자 움직임이 신중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대한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팍팍팍! 팍팍!
대한은 사정없이 발차기를 날렸다.
로우킥, 미들킥, 하이킥, 앞차기, 돌려차기, 내려찍기 등, 오광래 같은 고수에게는 잘 통하지 않던 기술들이다. 그런데 양주동에게는 시원하게 잘도 먹혀들어 갔다.
대한은 신이 나서 ‘격술(S)’ 재능 부스터를 켰다. 그러자 전보다 훨씬 더 발차기에 힘이 실리고 예리해졌다.
‘이러다간 발차기에 또 당하겠다.’
양주동은 그제야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두 손을 위로 올리고 몸을 숙이며 변칙적인 동작으로 대한에게 접근해 갔다.
대한은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감을 잡았다. 그래서 앞뒤와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양주동은 몇 대 맞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근접 거리까지 다가섰다. 양주동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훅을 차례로 날렸다.
순간 대한의 무릎이 소리 없이 올라갔다.
퍽!
양주동은 명치에 박힌 대한의 무릎에 저절로 몸이 구부러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턱에 강한 충격이 들어왔다.
뻑!
대한의 팔꿈치 공격이 콤보로 작렬한 것이다.
양주동은 대한의 공격을 아예 보지도 못했다. 그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에 그대로 링 위에 누웠다.
아무리 보호 장구를 착용해도 정통으로 들어간 니킥과 팔꿈치 공격에는 당할 재주가 없었다.
박상무 코치가 바로 중간에 끼어들어 스파링을 중단시켰다.
‘에바, 나 혹시 격투기에도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대한민국에서 선두도 아니고 두 번째로 알려진 ACE FC의 선수일 뿐입니다. 전적도 4승 3패로 별로고요.
‘그럼 격투기에는 재능이 없다는 말이야?’
―마스터는 확실히 격투기에 재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선수와 비교하려는 것은 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정도입니다.
‘크흠.’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잘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약하다는 뜻이었다.
“뭐 한다고 그렇게 오래 걸렸냐?”
“1라운드도 끝나기 전에 KO 시켰잖아요.”
“그래도 너무 늦어. 처음부터 다가가서 목을 치고 정수리를 찍었어야지.”
“그건 격술이거든요. 지금 저는 종합 격투기로 스파링을 한 거고요.”
“크흠, 어쨌든 수고했다.”
오광래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평소보다 배는 더 강해진 격술 훈련이었다.
‘제기랄!’
대한은 괜히 스파링했다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날의 손맛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브라질은 주짓수의 본고장이지.’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열심히 오광래의 손짓과 발짓을 따라 했다.
* * *
인천국제공항.
“잘 다녀오세요.”
“네.”
대한은 유아영 대리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옆에서 조동혁 대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조동혁 매니저! 사장님 잘 보좌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몸처럼 지키겠습니다.”
조동혁은 유아영의 말에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사무실 관리와 직원 채용은 유아영 대리에게 전권을 줄 테니 알아서 잘하세요.”
“네, 다녀오시면 깜짝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대한이 싱긋 미소를 짓자 이번에는 모니카가 뒤에서 나타나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대한! 시간이 다 됐어요. 빨리 들어가요.”
“네, 그래요.”
그는 모니카의 성화에 유아영 대리와 더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사장님, 들어가세요.”
“그래요. 유 대리도 그만 들어가세요.”
대한은 유아영을 보내고 출국 심사를 받으러 갔다. 이미 탑승권을 받고 짐까지 다 부친 상황이었다.
그는 좌 동혁, 우 모니카로 출국 심사를 받았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자 모니카와 조동혁이 잽싸게 그에게 다가왔다.
“우리 면세점 가요.”
“사장님, 배낭은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모니카 양과 천천히 구경하시다가 게이트로 오세요.”
“고맙습니다.”
대한은 눈치껏 빠져주는 조동혁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모니카는 면세점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자들은 쇼핑할 때 알 수 없는 힘이 나오는가 보다. 한 시간을 돌아다니는데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진짜 그걸로 괜찮아요?”
“이거면 충분해요.”
대한은 잠시 모니카와 승강이를 벌였다. 자꾸 뭔가 사주고 싶어 하는 그녀를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고 결국 명품 선글라스 하나만 받기로 합의를 봤다. 대신 대한도 모니카에게 명품 향수를 사서 선물했다.
둘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게이트로 왔다.
“대한아!”
“여기야.”
게이트에 도착하자 김수정 감독과 코치들이 대한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의 뒤에는 U-17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여자 친구도 함께 가는 거니?”
“여자 친구 아니에요. 그리고 모니카는 미국의 자기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 국적이 미국이었구나.”
김수정 감독의 말을 들은 모니카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쁜 여자가 웃으며 한 손을 흔들자 김수정 감독은 얼굴을 붉히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모니카가 제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줬어요. 그래서 따로 앉아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죠?”
“그래? 잘 됐다. 긴 비행시간 동안 편하게 갈 수 있으면 좋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는 무슨! 다 처지대로 사는 거지.”
대한은 김수정의 말에서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대한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도 공항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야! 부럽다.”
“모니카는 친구 없냐?”
“확실히 네가 난 놈은 난 놈이다.”
“앞으로 내 장래 희망은 대한이다.”
“누구는 여자친구 잘 둬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는구나.”
“우리 같은 서민은 이코노믹 좌석도 감지덕지해야지.”
코치들과 선수들까지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한을 놀려댔다. 그러나 이미 얼굴 가죽이 두꺼워진 대한은 손톱만큼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