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만재능(Feat. 대한 TV)-66화 (65/331)

66화 <처음?>

대한은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돌아갔다. 창밖을 보니 한강 인근의 야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에바,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래. 역시 돈을 좀 모아야겠어. 그래서 나도 이런 최고급 아파트 펜트하우스에서 살 거야. 강남에 빌딩도 사서 건물주가 되고 말 거야.’

―곧 그렇게 되실 겁니다.

에바는 대한의 말에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용기를 얻은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누군가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모니카였다.

“대한!”

“모니카!”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달착지근하게 불렀다. 잠시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다가 모니카가 대한의 몸을 돌아 앞으로 이동했다.

둘의 키가 비슷해서 그런지 그녀의 오뚝한 코가 그의 코를 닿을락 말락 간지럽혔다.

“라면 먹고 갈래요?”

“라, 라면?”

대한은 모니카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전설로만 알았던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이 이렇게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될 줄은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모니카의 스마트폰이 가열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에 노을처럼 붉어지던 그녀의 얼굴이 빠르게 찌푸려졌다.

“미안해요. 꼭 받아야 하는 전화에요.”

“난 괜찮아요. 어서 전화 받으세요.”

대한은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모니카는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었다.

“Hello!”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안색이 변하더니 곧 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앞에서 받기는 많이 곤란한 통화였던 모양이다.

대한은 모니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운 눈빛을 흘렸다.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여전히 창밖의 야경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바로 전에까지 좋았던 분위기는 금세 식어버렸다.

“휴우우우!”

대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몇 분이 지나도 모니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뻘쭘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

화장실로 걸어가 손을 씻었다. 거울에는 기대와 흥분으로 상기됐던 얼굴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실로 나오자 커다란 박스티로 갈아있은 모니카가 보였다.

그녀는 냉큼 다가와 대한의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몸과 따뜻한 온기가 마치 자신을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대한! 미안해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진짜 괜찮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깨진 분위기에 억지로 다시 불을 지필 수도 없었다. 대한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리곤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고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네에?”

집에 돌아간다고 하자 모니카는 크게 당황했다.

그런 그녀의 뺨에 대한은 미국식으로 가볍게 뺨을 대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쿨하게 모니카의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집에 돌아온 대한은 옷도 벗지 않고 침대로 직행했다. 어떻게 무슨 정신으로 지금 침대에 누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자 침대 속으로 빠르게 몸이 파묻혀버렸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어둠이 바람처럼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곤 끝이 없는 암흑의 무저갱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한은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가늘고 하얀 손길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잡아 끌어올리자 대한은 어느새 낯익은 거실에 서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부드러운 곡선의 하얀 나신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뒤태에 이어진 가냘픈 팔이 자신을 이끌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엉덩이가 야릇하게 흔들거렸다.

대한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불빛에 그림자 둘은 마구 춤을 췄다.

대한은 긴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굳게 닫힌 미지의 문이 보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문을 열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훌쩍 뛰어 들어갔다.

쿵!

방문이 굳게 닫혔다. 세상이 일순 정적에 빠져드는 듯했다. 하지만 방 안은 이제 막 뜨거운 태동을 시작했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향해 부딪쳐갔다. 바다를 항해하는 나룻배처럼 둘은 힘을 합쳐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파도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파도는 해일이 되고 비바람은 폭풍으로 변해 갔다. 광풍이 불어도 질풍노도처럼 끊임없이 짓쳐들어갔다. 세상이 흔들리고 소우주에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번개가 치고 우렛소리가 천지가 뒤흔들렸다.

쾅!

마침내 온 세상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룻배와 바다는 화려하게 폭발했고 온 세상에 폭발의 파편이 뿌려졌다.

숨 가쁜 대지는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열락의 환희와 카타르시스가 대기의 온도를 확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동안 강렬한 격동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햇살이 대지를 밝게 비췄다.

빛은 기둥처럼 땅 위에 포근히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영롱히 빛났다. 이 밤의 끝에 그렇게 첫 번째 환희의 하늘이 열렸다.

* * *

딩, 동, 댕, 동!

차임벨이 울렸다. 수업이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대한은 즉시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다른 학생들은 점심시간이라 급식을 먹으러 가거나 매점으로 향했지만 그는 최정규 감독의 호출로 축구부 사무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라!”

대한이 인사를 하자 최정규 감독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이리 앉아라.”

“네.”

“밥은 먹었니?”

“아뇨, 이제 먹으러 가려고요.”

최정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한을 쳐다봤다. 그는 대통령배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에서 4강에 올라간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 이상은 지금 숭신고 축구부의 실력으론 무리였다. 그마저 대한이라는 비밀 병기가 없었다면 아마 16강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숭신고의 비밀 병기가 누군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다 드러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너 혹시 여권 있냐?”

“아니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밖에 없는데요.”

대한은 의도적으로 운전면허증을 언급했다. 최근에 운전면허증을 따서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애들한테나 통용되는 자랑거리였다.

다 큰 어른들이 누가 운전면허증 땄다고 놀라거나 감탄할 일은 없었다.

“그럼 빨리 여권 좀 만들어라.”

“왜요? 혹시 우리 해외로 전지훈련이라도 가나요?”

“뭐라고! 전지훈련? 하하하!”

최정규는 재미있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