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클래스>
삐이익!
주심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숭신고 선수들은 혼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벤치로 들어왔다. 그들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축 처져 있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을 뿐인데 말이다.
숭신고 축구 감독 최정규의 상태도 사실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에탄고구나.’
솔직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털려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3대0. 스코어만 따지면 현대고 때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최정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K리그 수원 프로 축구팀과 유스 계약을 맺은 에탄고는 프로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서 그런지 숭신고와는 클래스가 달랐다.
오늘 경기에서 숭신고는 시종일관 끌려다니며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오늘 골키퍼인 고영재가 미친 선방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벌써 선수들의 멘탈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에탄고는 이미 완벽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패스면 패스, 정말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들 잘했다. 조금만 힘을 내자. 후반전은 해볼 만하다. 우리에겐 비밀 병기가 있으니까 에탄고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거야.”
최정규는 일부러 선수들을 칭찬했다. 사실 이 정도 실력으로 4강까지 왔으면 누가 봐도 정말 잘한 것이다. 그는 비밀 병기와 한 방 먹여주자는 말을 강조했다.
확실히 최정규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선수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도 비록 이기지는 못해도 그냥 허무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정규 감독과 선수들의 눈이 일제히 벤치 끝을 향해 돌아갔다.
“에이! X발!”
“저 새끼 뭐야?”
“졸라 부럽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최정규는 당혹스러웠다. 선수들이 투덜거리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됐다. 자신도 지금 속에서 저열한 질투심이 무섭게 끌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류연! 이제 그만해도 돼요.”
“아니에요. 조금만 더 하게 해줘요. 대한은 곧 경기에 나가야 하잖아요.”
“알았어요. 그럼 진짜 조금만 더 해줘요.”
“네.”
류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한의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대한은 슬그머니 눈을 감고 그녀의 마사지를 즐겼다.
무용했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손으로 꾹꾹 눌러줄 때마다 어깨에서 시원한 사이다가 팍팍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휴! 좋다.”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아재처럼 소리를 냈다. 그만큼 류연의 마사지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 마시지 따로 배웠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너무 시원하고 좋아서 마치 천국에 오르는 기분이거든요.”
“실은 우연한 기회에 배운 아주 특별한 마사지에요. 요혈을 자극하는 추궁과혈의 수법이 접목되어있어 혈액 순환과 피로 회복에 아주 그만이에요.”
“역시 그랬구나.”
대한은 류연의 마사지를 받으며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번 배워보기로 했다. 이런 마사지라면 부모님에게 매일 해드려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대한은 언제쯤 나가요?”
“후반전이 시작되고 한 20분쯤 지나면 기회가 생길 거예요.”
“아! 그렇구나.”
류연은 대한의 어깨를 시작으로 팔과 다리, 목과 머리를 마사지해 줬다.
덕분에 잠깐 불끈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은 이게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몸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류연처럼 훌륭한 미모를 겸비한 재녀라면 말이다.
―마스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송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달풍선과 비트 그리고 후원도 많이 쏟아지고 있어?’
―네, 마스터. 특히 류연의 마사지로 인해 반응이 참 생기발랄(?)합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어그로로만 따지면 류연이 단연 최고였다. 지금도 축구장 안팎의 온갖 시선이 대한과 류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닭살 돋는 친근함을 전혀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해요.”
“네.”
류연은 대한의 말에 마사지를 멈추고 그의 옆에 가 앉았다. 그는 그녀에게 시원한 생수와 수건을 건넸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류연은 생수를 따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물의 일부가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우야!’
대한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얼른 시선을 뗐다.
물론 시청자 중 일부는 끝까지 숨을 죽이고 지키고 지켜보고 있었다.
전혀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은 사나이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정말 이건 타고났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어맛!”
뒤늦게 자신이 물을 흘린 것을 깨달은 류연은 수건을 꺼내 입가에 물을 닦았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내가 류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한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건 못 말리겠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도 재능이고 능력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에바의 말에 대한은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러고 보니 류연은 마치 리나 대신 온 것 같았다.
리나가 일정이 바빠서 못 온다고 울상을 지었는데 류연이 때마침 경기를 보러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물론 류연과 리나가 정말 친해서 대신 와준 것은 아니다. 류연은 그저 대한이 하는 축구가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다. 물론 대한이 경기에 초대한 일도 있었고.
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러 돌아가면서 축구장에 미녀들을 데리고 나온다고 투덜댔다. 물론 질투와 부러움에서 촉발된 치기 어린 불평불만일 뿐이었다.
―마스터! 슬슬 몸을 푸셔야 합니다.
‘몸을 푸는 게 아니라 예열만 시키면 되겠다. 더 몸을 풀었다가는 해파리가 될 것 같아.’
―하긴 류연의 마사지가 특별하긴 했습니다.
‘정말 재능이라면 그것도 나중에 배울 수 있겠지.’
당장 류연의 마사지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둘의 관계가 좋게 유지되는 한 대한은 언제든지 그녀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게임을 통해서 소원권 3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류연! 이제 슬슬 몸을 풀어야겠어요.”
“아자! 제가 응원할게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제겐 큰 응원이 돼요.”
“그렇게 말하니까 점점 더 의욕이 샘솟네요.”
대한의 말은 진심이었다. 괜히 일어나 뛰기라도 하면 이곳은 지진이 날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아마 다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대한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대한은 살짝 작전을 바꿔봤다.
“앉아서 내가 골 넣는 것을 잘 지켜봐 줘요.”
“네.”
이번에는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말이 좀 먹힌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대한은 이렇게 미봉책을 쓰고 축구장 주변을 돌았다.
대한은 스트레칭을 한 후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예열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축구장을 향해 있었다.
경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니 숭신고의 패색이 짙어 보였다. 벌써 다섯 골을 내준 상태라 대한의 프리킥이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역전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에탄고 선수들의 실력이 숭신고에 비해 월등했다. 거기에다 조직력과 팀워크까지 좋으니 이건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제는 승리가 아니지.’
사실 숭신고가 4강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대한의 프리킥이 없었다면 절대 에탄고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승은 날아갔고, 이제 남은 것은 득점왕과 MVP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은 득점왕이 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벌써 11골이나 넣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득점력으로 인해 애초에 경쟁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아! 들어가!”
시간이 되자 최정규 감독은 어김없이 대한을 투입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아크에서 반칙을 얻어냈기에 프리킥을 할 위치는 아주 좋았다. 이 정도면 대한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삐익!
도도도도! 뻥!
주심이 휘슬을 불자 대한은 바로 달려가 강하게 볼을 찼다. 동시에 인간 벽을 쌓은 에탄고의 선수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축구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한이 영리하게 볼을 아래쪽으로 깔아 찬 것이다. 에탄고 선수들은 정말 똑같이 허공으로 떠올라줬다. 덕분에 대한이 찬 볼은 에탄고 골키퍼가 반응할 수 없는 코스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처음으로 숭신고 벤치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숭신고 선수들도 한 방 먹여줬다는 기쁨에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에탄고 선수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스코어는 1대5였다. 하지만 에탄고 선수들의 멘탈은 의외의 요인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한! 나이스!”
류연은 골이 들어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대한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카메라를 통해 그녀의 리드미컬한 응원이 전 세계로 방송됐다. 수원 에탄고 축구장에 있는 관중들의 시선도 모두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에탄고 벤치는 동공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
삐익!
경기가 속개됐다.
한 골을 먹은 에탄고는 숭신고를 더욱 몰아붙였다. 하지만 숭신고도 이젠 만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까지 볼을 배달했다. 그리곤 과감히 돌파해 골문을 노렸다.
에탄고 선수들은 반칙을 하지 않고도 숭신고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대한은 그 모습을 보며 적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구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대한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를 향해 강하게 패스가 날아왔다.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거칠고 부정확한 패스였다. 하지만 대한에겐 에바가 있었다.
―바로 때리세요.
‘오케이.’
대한은 에바가 보여주는 점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 뒤 떨어지는 축구공을 힘차게 발로 찼다. 일명 가위 차기라는 시저스 발리킥이었다.
뻥!
축구공은 정말 맞고 뒈지라고 세차게 날아갔다. 운이 좋았는지 대한이 찬 볼은 골키퍼의 머리 위를 통과했다. 워낙 속도가 빨라서 골키퍼가 손을 들어봤지만 이미 볼은 그물망과 키스를 하는 중이었다.
“와아아아!”
숭신고 벤치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대한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발리킥이 들어가자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하지만 이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미쳐 날뛰는 이가 있었다.
“꺄악! 대한 최고! I love you!”
류연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또다시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댔다.
카메라와 시선들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달풍선이 저절로 터졌고 비트가 제어 없이 쏟아져 나왔다. 후원금이 멈출 줄을 모르고 쌓여갔다.
대한은 최정규 감독을 힘차게 끌어안는 것으로 골 세레모니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축구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언제 내려왔는지 류연이 다가와 힘차게 그를 안았다.
“대한! 멋진 골이었어요.”
“고마워요.”
대한의 입이 해죽 벌어졌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부드럽고 폭신하고 좋아서 마냥 이렇게 류연을 안고 싶었다.
하지만 주심이 다가와 잔소리를 했다. 그제야 대한은 류연과 떨어져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만행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덕분에 채팅 창은 곧바로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폭발했다.
[화가난다: 감히 류연 님을 안다니. 화가 난다.]
[비도깨: 이 새끼 일부러 류연을 안 놔줬지!]
[낼름: 난 대한이고 싶다.]
[말벌봉준: 개부럽다.]
[다섯공무원: 장래희망 대한이다.]
[손톱이빨개: 이건 아니지. 왜 내가 아니고 대한이야?]
[여친찾았다: 류연과 오늘 1일이냐?]
[작업멘트0: 진정한 승자!]
[부부젤라: 전생에 나라를 구한 놈.]
[개좋앙: 좋겠다.]
[홍콩여자: 벌써 홍콩 다녀왔구나.]
[늑골뽑기: 가슴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줘!]
[베링해: 한류 존버! 키스 갈겨!]
[만수르SUH: 류연 우결 가즈아!]
욕을 하는 시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는 대한이 부럽다는 말이었다.
삐익!
경기가 재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