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달콤살벌 Day>
대한은 에바의 말을 듣자 ‘보디가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째 숨이 막힐 듯 답답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그건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닐까?’
―마스터의 안전을 위해서는 경호원을 채용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니야. 대한민국은 세상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나라 중 하나야. 그리고 나는 학교에 다니는 거 외에는 밖으로 잘 나돌아다니지도 않아.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강해지는 것이 빠르겠어.’
―무술이라도 배우시겠단 말씀입니까?
‘응, 지금 급하게 다른 재능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겠어.’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당장 주변에 뛰어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도장과 체육관을 알아보겠습니다.
에바는 대한의 결정에 대환영이었다. 이번에 일어난 사고를 겪으며 마스터의 안전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장 경호원을 채용하려고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지킬 힘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총기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나라다. 만일 대한이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면 아마 에바는 벌써 각종 무기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주변에 배치해 뒀을 것이다.
똑똑똑!
누군가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대한이 얼른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가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모니카였다.
“모니카!”
“대한!”
모니카는 대한을 보자 반색했다. 그러다 그의 몸에 둘린 붕대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대한, 괜찮아요? 난 이렇게 많이 다쳤는지 몰랐어요.”
둘은 놀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으로 다가와 그의 상태를 보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흐윽! 대한 다쳐서 어떻게 해요?”
“어? 왜 울어요? 나 괜찮아요. 그냥 가벼운 타박상만 입은 거예요.”
“타박상을 입었는데 입원을 한 거예요?”
“의사가 만약을 대비해서 하루만 입원했다가 가라고 했어요.”
“그럼 중상은 아닌 거죠?”
“중상이라뇨? 이 정도는 경상도 못돼요.”
대한도 남자라 모니카 앞에서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제야 그녀는 눈물을 닦고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대한은 모니카의 행동에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정말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프다고 병문안까지 와준 그녀가 고마웠다.
아니, 왜 자신이 모니카에게 화가 났었는지조차도 홀라당 까먹어버렸다. 참 쉽고도 대범한 남자였다.
“이리 와 봐요!”
대한은 침대 한쪽에 있는 손수건을 집었다.
“왜요?”
“이걸로 눈물 닦아요.”
그는 모니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그녀는 대한의 다정한 행동에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나이도 어린,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남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제야 모니카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감정의 실체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요즘 왜 연락 안 했어요?”
“좀 바빴어요.”
대한의 대답에 모니카가 뾰로통한 반응을 보였다.
“예쁜 여자들과 합방할 시간은 있었나 봐요.”
“그거야 모니카가 먼저 시작했잖아요.”
그녀는 본전도 찾지 못했다. 모니카는 대한의 불퉁한 얼굴을 보자 그가 왜 요즘 연락이 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 그녀는 이런 대한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화를 내고 질투를 하는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모니카는 금세 얼굴을 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린 동생을 달래듯이 말했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아메리카 TV의 BJ 소개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합방한 거예요.”
“그 뒤로도 몇 명 더 합방했잖아요.”
“맞아요. 한번 합방하니까 다른 BJ나 스트리머들을 차별적으로 대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합방을 하시겠다는 말이군요.”
대한이 콧방귀를 끼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모니카는 그 모습에 슬쩍 엉덩이를 침대 한쪽에 걸쳤다. 그녀는 그의 따뜻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난 대한과 합방할 때가 제일 재밌고 편해요. 그래서 더는 다른 스트리머와 합방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시든가 말든가.”
“그렇다고 대한이 다른 스트리머와 합방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 난 그렇게 할 거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예요.”
모니카의 말에 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한 말의 뉘앙스가 묘했기 때문이다. 뭔가 반성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뭔가 고백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과적으로 자신만 유리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세 기분이 풀어졌다.
모니카는 대한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자 그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대한도 그걸 깨달은 순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같이 만지작거렸다.
역시 남녀 사이에 스킨십만큼 좋은 대화는 없었다.
“…….”
“…….”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손을 쓰다듬고 만지작거렸다. 그것만으로 그동안 섭섭했던 감정이 사그라졌다.
분위기가 점점 달달하게 변해 갔다. 이 상황에서 카메라를 켰으면 아마 방송은 대박을 쳤을 것이다. 그만큼 둘의 분위기는 달착지근하게 무르익어갔다.
그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 얼굴의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피가 뜨거운 청춘 남녀는 역시 분위기에 약했다. 대한은 모니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빛이 몽롱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니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꿀꺽!
대한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훼방꾼이 나타났다.
똑똑똑!
대한과 모니카는 노크 소리에 놀라 후다닥 떨어졌다. 그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모니카는 부끄러웠는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사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허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덜컹!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면회 시간이 끝나서 방문객들을 내보내고 있어요.”
간호사는 슬쩍 방 안을 살펴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대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함을 가장했다. 간호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을 닫으면서 그녀의 눈이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대한은 놓치지 않았다.
‘젠장!’
―마스터, 잊어버리세요.
‘그럼 잊어버려야지. 내가 별수 있겠냐!’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은 잊지 마세요.
‘에바! 너 지금 나 약 올리는 거지.’
―제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다만 안타까워서 그렇죠.
‘나야말로 안타까워 돌아가시겠다.’
―그럼 차라리 둘이서 데이트를 하세요.
‘데이트?’
―언제까지 썸만 타고 있을 거예요. 결과를 만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대한은 에바가 꺼낸 데이트라는 단어에 꽂혀 버렸다.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
―정 자신이 없으시면 방송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한번 경험해 보세요.
‘데이트 방송이라……. 야방과 같이하면 나쁘지 않겠네.’
대한은 에바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화장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모니카가 나왔다. 그녀는 어느새 처음 병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예요?”
“간호사예요. 면회 시간 끝났다고 방문객은 돌아가라고 하네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봐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병문안 온 건데.”
“그러고 보니 병문안 오면서 아무것도 안 사 왔네요.”
모니카는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대신 나중에 밥이나 사요.”
“밥이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사드려야죠.”
“내가 뭘 먹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봐야 얼마나 하겠어요?”
대한은 그녀가 밥 사는 것에 신경을 쓰는 사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 치고 들어갔다.
“우리 야방할래요?”
“야방이요?”
“야외 방송이요. 모니카와 내가 데이트 콘셉트로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놀러 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 카메라 켜고요?”
데이트란 말에 눈이 동그랗게 변했던 모니카는 방송이란 말에 살짝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원한다면 꺼도 되고요.”
“네? 아! 뭐 그거야…….”
대한의 말에 모니카가 당황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슬쩍 잡아당겼다. 모니카의 몸이 힘없이 대한에게 딸려갔다.
서로의 몸이 바짝 붙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물들어갔다. 미국 여자치고는 지나치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여자였다.
“자세한 얘기는 우리 문자로 해요.”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네, 조심히 가요.”
“참 우리 합방 언제 해요?”
“이번 주는 축구 경기가 있어서 곤란하고 다음 주에 해요.”
“오케이. 대한! 앞으로 다치지 말아요.”
“그야 당연하죠.”
모니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꼭 한번 안아주고는 후다닥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건 뭐지?’
―기습 허그잖아요.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
-마스터도 한번 기습을 당해 보라고 한 짓이 아닐까요?
‘꺼져!’
―눼에에에!
대한은 에바를 혼내주고 코를 킁킁 거렸다.
모니카의 달콤한 체향이 어느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대한은 그걸 물어본다는 것을 깜빡해 버렸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왠지 오늘 밤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아주 달콤살벌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