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나 좋아해>
‘리나를 만나면 보컬 트레이너에 대해 일단 한번 물어보자.’
―네, 그게 좋겠어요.
대한은 집에 도착하자 옷을 갈아입었다. 차고 있는 시계와 팔찌, 목걸이 등 액세서리도 전부 뺐다. 대신 깔끔한 흰색 티셔츠와 연한 남색의 면바지를 입었다.
굳이 꾸치가 준 옷이나 액세서리를 해서 공짜로 간접 광고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꾸치도 아직은 대한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협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수백만 구독자들에게 간접 광고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거저먹으려는 심보였다. 다행히 대한에겐 패션 업계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한 리나가 있었다. 그녀의 조언을 받는 그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다.
일단 모르는 것은 무조건 리나에게 물어봤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르면서도 물어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대한은 리나의 조언을 철저히 지키며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어차피 현재 상황에서 그녀의 조언대로 한다고 손해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에바! 나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지?’
―숭신고 축구장에서 대통령배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 8강전이 있습니다.
‘부산 동래고였던가?’
―네, 맞습니다.
요즘 축구를 핑계로 거의 매일 오전 수업만 했다.)하지만 축구부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하는 건 아니었다. 최정규 감독과 주전 선수들도 굳이 대한이 훈련에 참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대한은 그들에게 있어 축구계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돌연변이, 혹은 ‘교란종’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양측은 서로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방관했다.
시간이 좀 남자, 대한은 둥굴레차를 끓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문을 보며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창문 밖으로 주변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에바를 만났고, 환골탈태한 것처럼 살도 빠지고 키도 커졌다. 아메리카 TV를 시작으로 유티비와 트워치에서 개인 방송도 했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워 외국어가 능숙해졌다. 페이스노트와 원스타그램에서 SNS 스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방송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1주에 불과했다.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는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다.
‘에바!’
―네, 마스터.
‘구독자와 팔로워 숫자 좀 브리핑해 봐!’
―네, 마스터.
대한은 갑자기 대한 TV의 구독자 수와 팔로워 수가 알고 싶어졌다.
에바는 허공에 도표와 그래프를 활짝 펼쳤다.
―아메리카 TV의 평균 시청자 수는 7만 명입니다. 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맥시멈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니… 굳이 놀랄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구독자 수는 꾸준히 늘어 34만 명이 됐습니다. 마스터의 풍력은 5만, 모니카의 버프를 받으면 8만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리나와 합방을 하면서 이게 꼭 모니카 버프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모니카 버프가 아니라 합방한 여캠 버프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
비슷한 말이었지만 안에 담긴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대한은 에바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핏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굳이 모니카가 아니라도 다른 여캠과 합방을 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군.’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여캠과의 합동 방송을 방송 콘텐츠 중 하나로 고정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거 우리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 보자.’
―네, 마스터!
에바는 이어 다른 플랫폼의 구독자 수와 팔로워 수를 말했다.
―유티비 구독자 수는 현재 707만 명입니다. 트워치도 272만 명까지 올라갔습니다.
‘엄청나게 늘어났네. 내가 게임 방송을 자주 해서 그런가?’
―그런 점도 없지 않습니다. 이제는 구독자 수가 구독자를 불러들이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섰습니다.
‘올! 이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야.’
대한은 에바의 말에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조만간 유티비에서 주는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십만 명과 백만 명의 구독자 수를 돌파할 때 ‘실버 버튼’과 ‘골드 버튼’을 받았었다. 물론 특별한 기능과 효용이 전혀 없어서 방구석에 처박아 놨지만 말이다.
그는 이제 천만 구독자를 돌파하면 받게 될 ‘다이아몬드 버튼’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페이스노트 팔로워 수는 560만, 원스타그램은 400만을 돌파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구독자 수와 팔로워 수가 느는 이유가 뭐지?’
―일단 대한 TV는 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사용하는 83가지의 언어로 번역되어 자막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저 에바의 독특한 마케팅 기법으로 세계적인 스타들의 SNS에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링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독자와 팔로워가 꾸준히 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게 에바의 공로였구나.’
―헤헤! 맞습니다.
대한의 말에 에바는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잘 보이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승리의 V 자를 그렸다.
만일 에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개인 방송을 했어도 이렇게 빛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에바의 볼을 살짝 터치했다.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에바의 모습이 참 귀여웠다.
‘막간을 이용해서 수업하도록 하자.’
―네, 마스터.
‘오늘은 어떤 것을 배울 차례지?’
―최종 공격수의 ‘오프 더 무브먼트’에 대해 설명할 차례입니다.
‘시작해 봐!’
대한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거실 허공에 에바가 세로로 길게 축구장을 세웠다. 축구장 안에는 작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꼬물대며 뛰어다녔다.
―마스터께서 언제까지 프리킥만 믿고 축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축구는 공격수의 멋진 돌파와 패스에 이은 슛이 중요합니다.
‘에바도 잘 알고 있겠지만……. 숭신고 축구부 선수들은 프리킥과 페널티킥 상황을 제외하곤 나한테 볼을 패스해 주지 않아.’
―그건 마스터의 잘못도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이라고?’
―예, 마스터의 오프 더 무브먼트가 좋지 않아서 패스를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프 더 무브먼트’는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공격수가 골을 넣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하는 모든 동작을 말한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하십시오.
에바는 작은 캐릭터를 움직여서 하얗게 빛나는 공을 움직였다. 가만히 보니 똑같은 상황에서 두 개의 캐릭터가 각기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위는 현재의 마스터입니다. 아래는 앞으로 마스터께서 따라 하셔야 할 미래의 마스터 움직임입니다.
‘어! 내 캐릭터가 수비 사이나 빈 공간으로 움직이네.’
―어때요? 쉽죠?
에바의 말에 대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기에는 참 쉽다. 그런데 내가 항상 저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볼이 오든 안 오든, 항상 결정적인 기회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세요.
‘저렇게 계속 움직이다가는 금방 지쳐 쓰러지겠다.’
―어차피 마스터는 후반 15분밖에 뛰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을 아끼지 마시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움직여서 남은 체력을 전부 고갈시키세요. 지금부터 미리 그렇게 버릇을 들여놓지 않으면 동료들은 결코 마스터를 믿고 패스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자신이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한은 그걸 깨닫고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몰라서, 노력이 부족해서 동료 선수가 볼을 패스하지 않은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무리 승리를 위한 조커에 불과하다고 해도 엄연히 그도 경기에 나가는 숭신고 축구부 선수였다.
이후 대한은 패스를 못 받아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마스터께서 오프 더 무브먼트를 잘하신다고 해서 쉽게 기회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상대 수비를 교란하고 신경이 쓰이게 만드는 이로운 행위입니다.
‘오케이! 이제 알았어. 그럼 이제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게 뭔지 알려줘!’
대한은 순수하게 의욕을 불태웠다.
―마스터의 실력과 현재 체력을 고려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의 오프 더 무브먼트를 골라봤습니다. 수비 진용을 깨고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이것만 잘해도 아마 숭신고 공격수가 훨씬 쉽게 볼을 넣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한번 해보자.’
에바는 대한에게 다섯 가지의 오프 더 무브먼트를 보여줬다. 그것도 머릿속에 박힐 때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대한은 금세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이미지 메이킹을 해봤다.
확실히 에바의 말이 옳았다. 내일은 설렁설렁 뛰지 말고 에바의 말대로 한번 쓰러지도록 체력을 고갈시켜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딩동!
어느새 시간이 다 됐는지 리나와 그녀의 매니저 웨이양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통역을 해주지 않는 통역, 서주연도 같이 왔다. 대한에겐 전혀 쓸모없는 잉여 자원이었다.
“어서 와, 리나!”
“안녕, 대한!”
“웨이양과 주연 씨도 반가워요!”
“하이!”
“안녕하세요.”
대한은 인사를 마치자 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을 잡고 긴 부츠를 하나씩 벗었다.
더운 날씨에 웬 부츠인지 모르겠다. 아마 올가을과 겨울을 위한 부츠 모델이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고마워!”
“천만에.”
“확실히 대한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멋있다.”
“하하하! 뭔 소리야, 그게!”
리나의 뼈 있는 말에 대한은 별 뜻 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신기하다. 확실히 어제보다 오늘이 더 잘생겨졌어. 역시 난 대한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거야.’
리나의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오해는 점차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녀는 이제 자기 생각을 거의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리나는 아직도 대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심장에서 전해 주는 이 느낌에 맞는 뭔가 결정적인 증거를 찾고 싶은 것이다.
“대한! 나 오늘 할 말이 있어.”
“그래? 해봐!”
“아니, 여기서 말고. 좀 조용한 곳에서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
“스튜디오는 좀 그렇고……. 그럼 내 방으로 갈까?”
“응, 대한만 좋다면.”
“나야 당연히 괜찮지.”
대한은 리나의 말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였다. 리나는 그의 방에 들어오자 방문을 슬쩍 잠갔지만 대한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쪽으로 앉아.”
“고마워!”
그는 그녀를 창가로 이끌었다. 대한은 침대 옆 창가에 놓인 작은 소파에 리나를 앉히고 자신은 창가에 기대어 섰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마구 흔들더니 고운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같이 앉자.”
“너무 좁잖아.”
“괜찮아. 바짝 붙어서 앉으면 돼!”
“불편할 텐데…….”
“대한이 그렇게 서 있으면 나 목 아파!”
리나의 목이 아프다는 말에 대한은 할 수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얇은 손가락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대한은 못 이기는 척 리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두 사람이 딱 붙어 앉아 있지 않으면 떨어질 만큼 작은 소파였다.
대한은 할 수 없이 팔을 뒤로 돌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안 그러면 둘 중 하나는 밀려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리나도 그의 품에 폭 안기듯 다가왔다. 덕분에 둘은 간신히 같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응, 그냥 잠시 대한과 같이 이렇게 있고 싶었어.”
“그냥?”
대한은 그녀의 말에 왠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요상했다. 대한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리나를 쳐다봤다.
호수처럼 푸른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더욱 바짝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곤 대한의 허벅지에 슬쩍 한 손을 올려놓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리나는 그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한은 훨씬 순수했던 것이다.
아마 다른 놈 같았으면 벌써 개처럼 헥헥대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면 리나는 얼마든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