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레드 카펫>
살짝 잠이 오려는 순간, 리나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대한! 어때?”
대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오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멋짐이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머리카락을 좀 자르고 염색을 했다고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다니…….
대한은 처음으로 마린장을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린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리나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대한의 팔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이제 피팅 룸으로 들어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줄래?”
“응.”
어쩐지 오늘 자신의 대답은 전부 단답형이었다.
대한은 리나가 내민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명품관이라서 그런지 피팅 룸도 엄청 크고 화려했다. 그는 빠르게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쇼핑백 안의 옷으로 싹 갈아입었다.
꾸치 로고가 새겨진 하얀 티셔츠, 연푸른색의 파스텔톤 바지와 재킷, 심플한 디자인의 검고 편한 구두!
대한은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이 이렇게 괜찮아 보이기는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에바! 나 좀 멋있지 않아?’
―전보다는 100배 더 멋있어지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1,000배 더 멋있어질 겁니다.
에바의 아부 같은 아부! 아니, 팩트 칭찬에 대한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피팅 룸을 벗어나자 당장 리나가 눈을 빛냈다.
“어머! 대한, 너무 잘 어울린다. 역시 내 눈은 죽지 않았어.”
리나의 말에 마를린이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다.
“보기완 달리 옷걸이가 좋네요. 키만 좀 컸으면 참 좋겠는데.”
“지금 신고 있는 것도 키높이 구두네요.”
“키높이 구두가 10cm 정도니까 원래 키가 한 170cm 정도 되는 모양이군요.”
무서운 여자였다. 그녀는 슬쩍 눈으로 한번 본 것만으로 대한의 키를 정확히 맞춰버렸다.
팩폭에 살짝 내상을 입은 대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액세서리를 맞춰야겠어요.”
“우리 매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제대로 어울리는 것으로 해줘요.”
“알겠어요. 내가 설마 리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겠어요?”
“그건 두고 봐야죠.”
마를린은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나는 웃으면서 아예 협박하듯 말해 버렸다.
그녀는 충분히 그 정도의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를린이다. 중국의 명품 시장에서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한에게 집중해야 했다.
다행히 마를린도 보통은 아니었다.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시계만으로 대한의 멋짐을 확실하게 증폭시켰다.
“잘 어울리네요.”
“호호호, 나 마를린이에요.”
“이거 내가 대한에게 선물할 거니까 계산해 줘요.”
“아이 참! 리나! 왜 그래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요?”
리나는 마를린에게 마치 손절할 사람처럼 굴었다.
대한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리나가 갑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냥 선물로 줄게요. 이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흥! 지난번에도 선물로 준다고 해놓고 나중에 협찬이라고 사진 찍어갔잖아요.”
“그거야 리나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거죠.”
“마를린! 대한이 누군지 아직 모르죠?”
“네?”
그제야 마를린은 리나에게 눈을 떼고 대한을 쳐다봤다.
“인터넷에 대한 TV라고 한번 쳐봐요. 그럼 대한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대한 TV?”
마를린은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비서가 다가와 새까만 스마트폰 하나를 넘겼다.
마를린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있는 사이, 리나는 대한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한! 이거 전부 협찬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돈 낼 생각하지 마!”
“이거 비싼 거 아냐?”
“다 합쳐봐야 몇만 달러 안 돼. 그리고 혹시 사진 찍어서 자사 홈페이지에 올려도 되냐고 물으면 초상권 계약서 가져오라고 말해!”
“알았어.”
“나 없으면 당장이라도 거저먹겠다고 달려들 여자니까 조심하고.”
“응.”
대한은 리나의 도움으로 수천만 원이나 하는 명품 꾸치의 시계와 팔찌 그리고 목걸이를 공짜로 얻게 됐다.
사실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신고 있는 신발도 전부 명품이었다. 리나의 요청에 그들은 두 말없이 기꺼이 협찬해 준 것이다.
“어머! 대한 씨! 미처 몰라봐서 죄송해요. 수백만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유티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
“진작 힌트를 주셨으면 내가 이렇게 실례를 안 하잖아요.”
“눼에.”
대한은 그녀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마를린은 혀로 자신의 새빨간 입술을 살짝 핥으며 그를 쳐다봤다. 흡사 뱀이 먹이를 노려보는 듯한 탐욕스런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급히 안면 관리에 들어가야만 했다. 리나가 대한이 차고 있는 꾸치의 액세서리를 하나씩 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나! 지금 뭐 해요?”
“이곳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옆 매장으로 가려고요.”
옆 매장은 꾸치와 라이벌 관계인 루이비탄이었다. 마를린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살갑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 왜 그래요? 화났어요?”
“그럼 화 안 나게 생겼어요? 내 앞에서 그런 눈으로 대한을 쳐다보다니…….”
“오랜만에 이런 멋진 사내를 만나게 돼서 나도 모르게 욕심이 좀 난 것뿐이에요. 그러니 화 풀어요. 내가 대한을 위해서 남성 명품을 세트로 맞춰서 선물할게요.”
“앞으로 대한 함부로 넘보지 마세요.”
“물론이죠. 나도 상도덕이 있는 여자라고요.”
대한은 둘이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마를린이 상도덕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리나는 몇 번 빼더니 결국 못 이기는 척 대한에게 다시 꾸치 액세서리를 채웠다. 그러자 마를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잘 생각했어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너희들 뭐 하고 있니? 우리 VIP를 위해 빨리 선물 가져와야지.”
“네!”
마를린의 비서가 눈치 빠르게 대표로 크게 대답했다. 꾸치의 여직원들이 빠르게 매장 안을 누비고 다녔다. 그녀들은 각종 남성 명품을 가져와 대한의 몸에 가져다 댔다.
지갑, 벨트, 시계, 반지, 구두, 운동화, 모자, 향수, 선글라스, 클러치백, 크로스백, 백팩……. 리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제품을 하나씩 쳐다보며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지갑은 검은색, 벨트는 왼쪽, 시계는 둘 다, 반지는 됐고, 구두는…….”
대한은 지금 이들이 뭔 짓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쪽은 당연하다는 듯 고르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챙겨주려고 했다.
딱 보기에도 엄청 비쌀 것 같은 명품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마치 별거 아닌 것처럼 가볍게 다뤄졌다.
그는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전부 자신의 것, 아니 선물이 된다고 하니 그냥 가만히 서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사실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대한이 나서봐야 가격도 모르고 뭐가 자신에게 잘 어울릴지도 알 수 없었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이미 수년간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리나다. 그녀의 안목이 그보다는 100배 더 높은 게 당연했다.
“선물은 마음에 들어요?”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어요. 우리 올림픽홀에 가야 하니까 이것들은 전부 이 주소로 배달해 줘요.”
“올림픽홀이면 아시아 모델 피에스타에 가는 모양이네요?”
“특별 게스트로 초청받았어요.”
마를린의 눈에 반짝 이채가 흘렀다.
“혹시 지금 거기서 열리는 패션쇼에 가는 거예요?”
“네.”
“그럼 대한에게 우리 구두 신겨서 가는 것은 어때요?”
“마를린!”
“어머! 무섭게 왜 그래요? 한번 봐요. 지금 신은 구두가 어울리나……. 우리 구두가 훨씬 낫지.”
마를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비서가 대한의 발 앞에 구두를 내밀었다. 리나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쳐다보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번 신어보라는 의미였다. 대한이 리나의 눈짓에 신고 있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꾸치 구두를 신었다.
“으음.”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리나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마를린의 말이 맞았다.
밋밋한 구두보다는 꾸치 구두가 더욱 개성을 돋보이게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구두의 옆에 로고가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리나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자 마를린이 슬쩍 다가와서 금빛 봉투를 내밀었다.
“꾸치 특별 상품권이에요. 부모님 가져다 드리세요.”
“고마워요.”
리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를린에게 특별 상품권을 받아 곧바로 대한에게 넘겼다.
“어머니에게 선물해 드려! 아마 좋아하실 거야.”
“오잉?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지. 꾸치 구두를 신고 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대한이잖아.”
“알았어. 고마워, 감사히 잘 받을게.”
대한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다만 리나의 호의에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특별 상품권을 준 것은 마를린이다. 하지만 그는 마를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분명히 노리는 게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이제 대한도 충분히 짐작하는 바였다.
“이거 제 명함이에요. 나중에 꼭 한번 연락 주세요.”
“네, 고마워요.”
대한은 마를린에게 명함을 받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자! 이제 시간이 다 됐어.”
“오케이.”
리나는 그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머!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 같아!”
“후훗!”
뻔한 아부였지만 리나는 대한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둘이 밖으로 걸어나가자 꾸치의 모든 직원들이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들에게 대한과 리나는 명품 꾸치를 알리는 최고의 홍보 수단이었다. 일명 왕홍 마케팅! 또는 스타 마케팅이라고 불리는 기법이다.
매장을 떠나 멀어져 가는 리나와 대한!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마를린이 다시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후훗! 곧 다시 보게 될 거예요.”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 * *
올림픽홀.
올림픽 공원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이다.
연면적 11,826㎡, 3,584평. 무대는 폭이 23.2m, 깊이 18.5m, 높이 8.5m. 객석은 2,452석이고, 플로어는 500석에서 600석이다.
부우웅! 끼익!
대한이 탄 밴이 올림픽홀 정문에 멈춰 섰다. 곧이어 웨이양이 차에서 어른 내려 차 문을 활짝 열었다.
오프숄더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리나가 밴에서 우아하게 내렸다. 리나의 하이힐이 닿는 곳에 길게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포토 라인이 설치된 곳에서는 벌써부터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대한! 어서 나와!”
“으응.”
리나의 독촉에 대한은 급히 밴에서 내려 엉거주춤 섰다. 그녀는 대한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번 쭉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 완벽해!”
“정말?”
“당연하지. 누가 코디했는데.”
“그거야 당연히 리나가 해줬지.”
“그러니까 나를 믿고 따라와!”
“응, 알았어.”
대한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억지로 어깨를 활짝 폈다. 그러자 리나가 냉큼 그에게 팔짱을 꼈다.
‘에바! 나 좀 살려줘!’
―레드 카펫을 걷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젠장! 내가 왜 레드 카펫을 걸어야 하냐고?’
―진즉에 좀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패션쇼에 간다고 했지, 레드 카펫을 밟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뒤늦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그냥 포기하시고 피할 수 없으면 맘 편하게 즐기세요.
‘이궁!’
에바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한은 할 수 없이 리나의 리드를 따라 레드 카펫을 걸어갔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지으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와아!”
고리나와 대한이 같이 걸어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머리는 하나로 묶어서 쪽을 지어 위로 올렸고 얼굴은 도발적인 표정을 지어 무척 당당하게 보였다. 사슴처럼 긴 목은 투명한 액세서리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볼륨있는 미드와 얇은 망사 속에 비치는 두 다리는 상아처럼 매끄러웠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자신 있게 걷는 그녀의 워킹은 각선미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리나다!”
“이쪽 좀 봐주세요!”
“사진 좀 찍게 여기 좀 봐줘요!”
사람들이 리나를 보더니 아우성을 쳐댔다.
사방을 꽉 채운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맨들은 어떻게든 리나를 한번 잘 찍어볼 거라고 경쟁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대한은 사실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웃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경험 많은 리나가 그를 잘 리드해 포토 라인에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