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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재능(Feat. 대한 TV)-44화 (44/331)

44화 <코디>

솔직히 대한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패션에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바의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이자 이게 얼마나 대단한 대회이자 축제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나 오늘 저녁 방송은 어떻게 해?”

“그걸 왜 고민하고 있어. 그냥 패션쇼 찍어서 내보내면 되잖아.”

“패션쇼를 내 맘대로 찍어서 내보내라고?”

“안 될 게 뭐가 있어? 수백만의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는데 과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가?”

대한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리나를 믿고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안 그래도 계속 패시브 재능만 얻었고 액티브 재능을 흡수할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은 재능을 흡수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았다.

“시청자들도 좋아할 거야. TV를 통해 패션쇼를 시청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직관을 하는 BJ와 함께 VIP석에서 가까이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거든.”

“리나 팬들도 좋아해?”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래서 ‘아시아 모델 피에스타’에서 날 특별히 초청한 거야.”

“좋아. 그럼 한번 가보자.”

“야호! 잘됐다. 이제부터는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대한은 이때부터 진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리나는 먼저 스마트폰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나는 VIP 게스트 입장권을 구하고 VIP 좌석도 확보했다. 디자이너 몇 명에게 전화해서 옷을 좀 구해달라고 하는 등,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했다.

“일단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자.”

“나 몸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우리가 지금 어디를 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패션쇼에 가지.”

“대한이 갈아입을 옷은 넘치도록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씻는 것은 호텔에 가서 해도 돼! 그냥 편하게 모든 것을 나한테 맡겨. 오케이?”

“알았어, 리나! 그럼 잘 부탁할게!”

“호호호! 그래 내가 알아서 다 잘해 줄게.”

뭘 어떻게 알아서 잘해 준다는 건지 참 궁금했다.

“감독님, 저 먼저 가볼게요.”

“그, 그래. 잘 가라!”

최정규는 대한의 인사에 리나를 슬쩍 쳐다봤다. 아까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영 걸쩍지근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 3학년 형들이 리나와 같이 있는 대한을 보더니 얄궂은 웃음소리를 냈다.

“야! 너만 재미 보고 형들은 안 데리고 가냐?”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한은 빠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즉시 몸을 돌려버렸다. 영양가 없는 인간들이라 바로 손절해 버린 것이다. 절대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고 복수하는 건 아니었다.

뒤에서 뭐라고 그에게 욕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한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한이 리나와 같이 온 순간부터 이미 이런 결말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리나의 손에 이끌려 부평고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가 빌린 스타크래프트 밴, 일명 연예인 밴을 탔다.

확실히 밴은 무척 넓고, 편하고, 좋았다. 리나는 대한의 옆에 찰싹 붙은 채 연신 생글거렸다.

“덥지? 이거 마셔!”

“고마워, 리나.”

리나는 밴 안에 구비된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 대한에게 건넸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그는 음료수를 원샷해 버렸다. 그러자 리나는 슬그머니 다른 음료수를 건넸다.

역시 미녀가 주는 음료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원샷을 했다. 다행히 리나는 다시 음료수를 주지는 않았다.

웨이양과 통역은 그들의 앞좌석에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웨이양이 운전사에게 송파구에 있는 시그니처 호텔로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밴은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도로를 질주하게 시작했다.

리나가 이번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땀도 거의 흘리지 않은 대한의 이마와 목을 정성스럽게 닦아줬다. 누가 보면 그녀가 대한의 로드매니저나 코치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대한도 굳이 그녀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잠시 그녀의 인형이 되어주는 것으로 타협하고 말았다.

‘에바!’

―네, 마스터.

‘패션쇼에 가면 어떤 재능을 얻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엔터테인먼트에 관련된 연예인들이 많이 올 것이니 그들의 재능 중 하나를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한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16강전에 승리했으니 8강전을 대비해서 축구 관련 재능을 얻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재능을 흡수하고 획득하는 데는 최대 한 달에서 최소 이 주가 걸립니다. 이 주 뒤에 아무리 좋은 재능을 얻는다고 해도 이미 이번 대회는 다 끝나있을 것입니다.

‘아차! 그렇구나. 그럼 이번 기회에 엔터테인먼트와 관련된 다른 좋은 재능을 얻어야겠다.’

―맞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제일 필요한 재능이 뭐가 있지?’

―노래, 춤, 매력, 감각, 정력, 작사, 작곡…….

‘뭐가 이렇게 많아?’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런데 당장 뭘 골라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재능은 정말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재능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리나가 옆에서 대한이 뭔가를 생각하게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웨이양! 대한의 머리도 손을 좀 봐야겠어?”

그녀는 대한의 머리카락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리나의 매니저 웨이양이 맞장구를 쳤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바꿔야 합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럼 헤어 디자이너도 수배하고 신발도 좀 알아봐!”

“알겠습니다.”

“아 참! 속옷도 필요하겠네.”

“양말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액세서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오오! 웨이양! 잘 말했어. 남자 액세서리도 좀 알아보자!”

“예스, 보스!”

웨이양은 대한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들더니 어디론가 신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한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어째 자신이 리나와 웨이양의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대한은 여자아이들이 인형에 옷을 입히고 꾸미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지금 딱 그 상황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왕 리나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한번 끝까지 믿어보기로 했다.

밴은 1시간 50분 만에 시그니처 호텔에 도착했다. 총 123층, 높이 555m로 세계 5위의 초고층 빌딩에 위치한 특급 호텔!

대한은 고개를 치켜들어도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건축물에 감탄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리나와 웨이양에게 팔을 잡혀서 호텔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들은 승강기를 타고 100층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커튼을 활짝 열자 서울 시내의 환상적인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올!”

“대한! 뭐 하고 있어? 어서 욕실로 들어가서 씻고 나와!”

“어, 알았어.”

대한은 창문에 서서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리나의 등쌀에 못 이겨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부터 해야 했다. 그래도 깨끗하고 럭셔리한 스위트룸 욕실에서 샤워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쏴아아아!

온수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전신을 때렸다. 대한은 기분 좋은 비음을 내며 샤워기의 물을 맞았다. 샴푸와 린스를 하고 바디워시로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샤워를 마친 대한은 새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나와 벽에 걸린 목욕 가운을 걸쳤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웨이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의 한점에서 마주쳤다. 웨이양은 대한을 향해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안에서 입고 나오세요.”

“아! 네.”

대한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들어가야 했다. 쇼핑백을 열자 안에서 별의별 것들이 다 나왔다. 팬티와 티셔츠, 반바지, 양말, 전기면도기, 손톱깎이 등.

그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웨이양이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손톱깎이로 손톱과 발톱을 잘 다듬었다. 그 뒤 새 팬티를 입고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양말까지 신고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 이거 신어 봐!”

“오케이!”

대한은 리나가 내민 패셔너블한 구두를 신었다.

“잘 어울리네. 그거 벗고 이거 신어 봐!”

“응.”

리나의 눈빛을 보자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냥 신으라는 대로 구두를 벗고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었다. 리나와 웨이양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벗고 이 샌들 신고 따라와!”

“응.”

대한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샌들을 신고 나자 리나가 냉큼 그에게 팔짱을 끼더니 스위트룸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벗어놓은 자신의 옷과 신발을 찾았다. 그러자 통역이 손가락 두 개로 비닐봉지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의 옷은 이미 그녀가 잘 챙겨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승강기를 타고 해외 명품관 4층으로 내려왔다. 미리 얘기해 놨는지 리나는 점령군처럼 당당히 ‘꾸치’ 매장으로 들어갔다.

“리나! 어서 와요!”

장신의 금발 중년 여자가 반갑게 리나와 포옹을 했다.

“어머! 이 신사분인가 보네?”

“맞아요.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좀 해줘요.”

“걱정하지 마요. 이미 안에 다 준비해 놨어요.”

“오케이. 그럼 바로 시작하죠.”

금발의 중년 여자가 시선을 돌리더니 대한에게 다가왔다.

“난 마를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대한입니다.”

대한은 마를린과 악수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대한은 마를린의 거대한 가슴 사이에 얼굴이 파묻히고 말았다. 강한 압박에 숨이 막히긴 했지만 한편으로 폭신한 감촉이 꽤 좋았다.

마를린은 대한의 머리를 꼭 안으며 몸을 몇 번 흔들었다. 그는 순간 영혼이 날아간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됐다.

“마를린! 장난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요.”

“호호호! 리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네요. 요새 취향이 아주 독특해졌어요.”

마를린은 리나의 말에 대한을 풀어줬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팔을 리나가 잡아끌었다.

‘아니, 지금 나 공격당한 것 맞지?’

―육탄 공격, 아니 육봉 공격을 당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원래 인사를 이렇게 요란하게 하나?’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한은 꾸치 매장의 안쪽 홀로 끌려 들어갔다. 작지 않은 홀은 한쪽 벽이 전부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마치 고급 헤어 살롱의 분위기를 흉내 낸 듯했다.

“여긴 마린장이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헤어 디자이너지.”

“만나서 반가워요. 고리나예요.”

“반갑습니다. 마린장입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네.”

리나는 대기하고 있는 헤어 디자이너와 인사를 하고는 대한을 소개했다.

대한은 얼떨결에 헤어 디자이너 마린장과 인사를 나눴다.

“이대한입니다.”

“마린장이에요. 반갑습니다.”

리나는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마치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다.

“대한과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로 해주세요. 콘셉트는 두 가지로 골라봤어요. 여기 사진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첫 번째 콘셉트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일단 한번 보도록 하죠. 마음에 안 들면 두 번째 콘셉트로 가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마린장은 리나와 합의를 끝내자 곧바로 대한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지금 대한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인형이었다. 자신의 의사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됐다.

대한은 이런 게 패션모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캉, 찰캉!

사각, 사각!

대한의 머리 위에서 가위가 춤을 췄다.

10분도 되지 않아 그의 머리가 대변혁을 겪었다. 순식간에 그의 인상이 댄디하게 바뀌어버렸다.

“어떻습니까?”

“좋네요. 준비한 옷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런데 헤어 컬러가 너무 블랙이라서 눈에 좀 거슬려요.”

“아무래도 살짝 염색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시나요?”

“한 시간 안에 가능하면 하도록 하죠.”

“50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염색해 주세요.”

“네.”

마린장 헤어 디자이너는 즉시 조수를 불러 염색을 시작했다. 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리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엄지를 척 내밀었다.

―마스터, 그냥 포기하면 편합니다.

‘알아. 안다고.’

대한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에바를 노려보다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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