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무회전 킥>
“와아아아!”
부평고 축구장을 가득 채운 학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부평고 공격수가 후반 시작 5분 만에 동점골을 넣은 것이다.
반대로 숭신고 축구부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전반에 어렵게 뽑은 골을 잘 지켜 1대0으로 리드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이렇게 통렬한 일격을 맞았으니 힘이 빠질 만도 했다.
삐익!
다시 경기가 속개됐다. 다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지켜봤다.
16강에서 맞붙은 강호 부평고!
과연 명성대로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과는 달리 전혀 긴장하지 않는 선수도 있었다. 그는 오히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희희낙락거리는 중이었다.
“대한! 동점이 됐어.”
“괜찮아. 그래도 우리가 이길 거야.”
대한은 리나를 쳐다보며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경기를 직관했다. 하지만 리나의 매니저 웨이양과 통역사는 무척 바빴다.
두 사람은 양쪽으로 삼각대 두 개를 세워놓은 채 경기를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대한과 리나의 시청자들은 난데없이 대통령배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 8강전을 구경해야만 했다.
“대한은 언제 경기에 나가?”
“난 아마 후반전 끝나기 10분이나 15분 전에 나가게 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알 수 있어.”
호기심 많은 리나를 상대하느라 대한은 오늘 무척 말을 많이 했다.
현재 몸 컨디션은 상당히 좋았다. 이제 키도 170cm나 됐고 살도 계속 빠져서 몸무게가 86kg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힘이 넘쳤다. 지금 같아서는 20분을 풀로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정규 감독은 대한을 당장 투입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엄연히 조커였다. 하다 하다 안 되면 극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쓰는 비장의 한 수란 말이다.
물론 대한이 없었다면 숭신고는 아마 예선도 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은 딱히 불만이 없었다. 다만 간간이 느껴지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좀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다.
“대한! 주스 마셔!”
“리나, 고마워.”
중국 진출 건으로 리나와 정식 계약을 하느라 대한은 하루 만에 다시 스튜디오에서 그녀를 만나야 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도 시간이 좀 남았던 리나는 대한이 뛰는 축구 경기를 보러 따라나섰다.
둘은 이제 친구가 되기로 해서 서로 말도 편하게 했다.
영어는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없다고들 알고 있다. 하지만 엄연히 상대를 존중하는 말과 친구에게 쓰는 말은 다르다.
경기장에서 리나는 자신이 코치라도 되는 듯 대한을 알뜰히 챙겼다. 시도 때도 없이 주스를 마시게 하고 바나나도 까서 입에 넣어줬다. 마치 전반전을 뛰고 나온 선수에게 수분 보충과 영양 보충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대한은 경기를 뛰지 않았기에 슬슬 배가 불러 왔다.
“바나나 더 안 먹을 거야?”
“조금 있다가 경기에 나가려면 그만 먹어야지!”
“아! 이제 슬슬 몸을 풀겠구나.”
“응, 아마 곧 감독님이 눈치를 줄 거야.”
그의 생각대로 경기가 지루하게 흘러가자 최정규 감독은 대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나도 덩달아 일어나 그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파이팅!”
“아야! 경기에 나가는 게 아니야. 미리 몸 좀 풀어놓으라는 신호야.”
“아! 그렇구나. 헤헤!”
리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대한에게 몸을 기대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어린 청춘들이 심쿵해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버렸다.
여러 가지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우리 리나였다.
‘에바, 이거 그린 라이트 맞지?’
―75% 확률로 ‘예스’입니다.
‘흐음. 얘가 나를 진짜 좋아하는 건가?’
―호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문제는 이 호감이 남자로서 호감인지, 아니면 친구로서의 호감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리나로 인해 주변의 시선이 자꾸 대한에게 쏠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후반전이 시작된 지 1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대한은 한쪽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런 후 리나에게 벗어나 운동장을 가볍게 뛰었다.
몸에서 슬슬 열이 나고 땀이 솟으려고 할 때 최정규 감독이 급히 대한을 찾았다.
“대한아! 빨리 나가서 프리킥을 차라!”
“네, 감독님.”
대한이 나가자 다들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했다. 그중에서 리나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축구장 안팎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민소매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리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한을 향해 연신 파이팅을 외쳐댔다.
‘에바!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지?’
―마스터! 리나는 그냥 잊어버리세요. 포기하면 맘 편합니다.
‘그건 에바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리고 부평고의 아크서클 근처로 걸어갔다. 직접 와서 보니 골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이 정도면 족히 25m는 될 것 같았다.
‘꽤 멀다.’
―부평고 골키퍼의 실력이 상당합니다. 어지간하게 차서는 성공하기 어려울 거예요.
에바의 말까지 겹치자 갑자기 자신감이 확 떨어졌다. 주변을 보자 숭신고 선수들은 여유 만만했다. 당연히 대한이 프리킥에 성공할 거라며 웃고 있었다. 숭신고 벤치에서도 딱히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거 내가 너무 기대치를 올려놨나?’
대한은 살짝 불안했다. 하지만 이내 공을 내려놓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스터! 중앙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오른쪽 골대를 노리는 것이 확률이 조금 더 높습니다.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
―51%입니다.
‘물어보나 마나 한 확률이네. 알았어.’
에바는 나름 허공에 점선을 뿌려주며 대한의 프리킥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이번 프리킥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대한은 공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도도도도도!
그는 축구공의 한가운데에서 약간 아래쪽을 발등으로 강하게 찼다.
뻥!
볼은 회전 없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부평고 골키퍼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볼이 옆으로 확 꺾이더니 골대의 오른쪽 상단으로 꽂혀 들어갔다.
골키퍼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최대한 회전력을 줄여 공의 움직임이 불안정하게 만든, 골키퍼가 공의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어 막기 어렵다는 바로 그 무회전 슛이었다.
“와아아아!”
숭신고 벤치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골이다! 대한이 최고!”
리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얏!”
대한도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번 골은 정말 자신이 봐도 멋지게 들어갔다. 성공 확률이 겨우 51%에 불과한 중거리 슛이었다. 그런데 이 어려운 것을 자신이 또 해낸 것이다.
“대한아!”
그는 함성을 뚫고 들려오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리나는 자신의 손에 키스를 한 뒤 대한에게 마구 날리는 포즈를 취했다.
순간 그는 심쿵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황소처럼 달려드는 숭신고 선수들에게 곧 욱여싸였다.
“역시 대한이다.”
“대한아! 정말 죽였어.”
“멋진 골이었어.”
“X발! 이제 무회전까지 성공시켜!”
“프리킥의 마법사! 만세!”
“아오! 그래, 대한이 만세다.”
대한은 축하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걸 빙자한 폭행인지 모를 숭신고 선수들의 축하 인사로 뒤통수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선수들 사이로 난 틈으로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최정규 감독을 향해 달려갔다. 최정규 감독도 대한을 보더니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제지간의 멋진 포옹을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아니, 포옹이 이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꺅! 대한!”
“헉! 리나!”
그런데 대한을 끌어안은 것은 최정규 감독이 아니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리나가 튀어나오더니 냉큼 대한을 끌어안아 버렸다.
최정규 감독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 무안했나 보다. 대한은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기 딴에는 미안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리나는 대한이 자신의 행동에 감동한 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그의 뺨에다 키스까지 퍼부었다.
그 모습을 본 어린 청춘들의 동심이 개박살 났다. 그리고 이내 낙심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책없이 리나의 매니저와 통역을 맡은 여자가 카메라를 대한과 리나가 있는 쪽으로 확 돌렸다. 수십만 명이 생방송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리나가 이런 행동을 할 줄 몰랐다. 아무튼 중국의 차세대 사대 여신 중 하나인 리나의 스캔들이 이제 대륙을 활활 불태울지도 모른다.
“대한! 최고야! 정말 멋진 골이었어.”
“고마워!”
리나는 흥분된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대한을 끌어안으며 마구 뛰어댔다. 덕분에 굳이 알아야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정보까지 입력되고 있었다.
삐익!
흥분과 격정의 시간이 지나가고 경기가 다시 속개됐다. 부평고는 수비수 한 명을 대한에게 붙이고 전원 공격에 뛰어들었다.
대한은 늘 하던 대로 느긋하게 부평고의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반대로 숭신고는 대한을 제외하고 전원 수비로 돌아섰다. 어떻게든 골을 막으면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동영상으로 봤을 때는 뚱뚱하고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왠지 갈수록 잘생겨지는 것 같았다. 전날보다 확실히 오늘 그의 얼굴이 잘생기게 느껴졌다.
‘나 혹시 또 금사빠 기질이 도진 거 아냐? 이상하게 대한이 점점 더 잘생겨 보이네.’
리나는 사랑에 빠져서 상대가 잘생겨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오해를 했다. 사실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재능 ‘미모(A)’를 장착한 대한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예민한 리나만이 그걸 느끼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오해로 인해 리나는 조금 더 대한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친구처럼 지내자고 먼저 말은 했지만 사실 남녀 간에 스리슬쩍 선을 넘어가는 일은 다반사가 아닌가!
“대한! 파이팅!”
그녀는 다른 선수들은 일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대한을 향해, 대한을 위한, 대한에게만 응원을 보냈다.
신기한 것은 리나의 팬들이었다. 다른 왕홍 같으면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안티가 많고 입이 걸기로 유명한 중국의 팬들이다. 하지만 그녀의 팬과 시청자들은 방금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리나의 병(금사빠)이 또 도졌다고만 생각했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어서 이미 면역이 된 것이다.
삐이익!
치열한 경기는 스코어의 변동 없이 끝났다.
“와아아아!”
“이겼다.”
숭신고 벤치는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리나도 이에 지지 않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쳤다. 그녀의 패기에 놀란 주변의 고등학생들이 몸을 움칫할 정도였다.
대한은 느긋하게 걸어서 축구장을 나왔다.
리나가 그에게 달려가 냉큼 안겼다.
“대한! 축하해!”
“고마워, 리나.”
다른 선수들은 온몸이 땀에 젖어 쉰내가 났다. 하지만 대한은 뛸 일이 없어서 별로 땀을 흘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오늘도 한 골 추가해서 부동의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나 그만 씻으러 가봐야겠다.”
대한의 말에 리나는 팔짱을 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랑 같이 패션쇼 보러 가자.”
“패션쇼?”
“응. 실은 나 ‘아시아 모델 피에스타’에 초청받았거든.”
“그런데 왜 날 데려가려고 그래? 난 초대받지도 않은 일반인인데.”
“대한도 수백만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유티버잖아. 충분히 자격이 돼! 내가 미리 전화해서 VIP 게스트 입장권 받아놓을게.”
“패션쇼라…….”
리나가 자꾸 같이 가자고 하자 대한은 패션쇼에 호기심이 생겼다.
패션쇼라면 TV나 뉴스에서만 봤지 한 번도 직관해 본 적은 없었다.
“거기 가면 유명한 연예인들 많이 오지?”
“응, 아마 국내외 유명한 스타들이 많이 참석할 거야. 이번에 열리는 패션쇼는 아시아 각국의 모델들이 참가해 최고의 모델을 뽑는 대회거든.”
“아! 아시아 패션모델 선발 대회 같은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