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첫 골>
‘뭐,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 누구나 플랜은 있기 마련이야.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지.’
대한은 누군가의 명언을 떠올리며 여유 있게 축구장을 돌아다녔다.
리프팅을 하지 않는 그는 사실 별 볼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뚱보에게 별로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 덕분에 대한은 자유롭게 축구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것도 축구공을 드리블해 가면서 말이다.
삐익!
시합 시간이 됐는지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축구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 대한도 얼른 숭신고 축구부 벤치로 돌아갔다.
어느새 최정규 감독을 비롯한 숭신고 축구부 팀원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최정규 감독의 작전을 들었다. 대한도 일단 축구부 팀원이라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서해고의 전력은 우리보다 한 수 아래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계획대로 처음부터 강하게 압박을 한다. 알았지?”
“예!”
“자!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와!”
뭔가 구호를 하는데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대한은 주전이 아니라서 벤치에 앉아 시작했다.
양측에서 주전 선수들이 각각 열한 명씩 나왔다.
허공에 동전을 던지고 손으로 받더니 숭신고가 왼쪽으로 갔고 서해고는 반대편인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곧바로 경기가 진행됐다. 미적거리지 않고 빠르게 진행하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대한은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스마트폰과 삼각대를 꺼냈다.
“야! 너 뭐하냐?”
옆에 앉아 있던 오규환이 불퉁하게 대한에게 말을 걸었다.
“동영상 찍는다.”
대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마스터, 방송을 시작할까요?
‘아니. 굳이 이걸 찍어서 방송으로 내보낼 필요는 없어. 그냥 유티비 각이나 좀 뽑아보자.’
―후반전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나도 그걸 기대하고 있어.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대한은 솔직히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영상 촬영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다들 처음에는 대한이 뭘 하나 구경을 했다. 그러다 곧 시선을 돌려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교체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선수들은 잔뜩 긴장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한은 마치 놀러 나온 사람처럼 편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와아아아!”
갑자기 숭신고 벤치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숭신고의 에이스이자 최고의 스트라이커 한정우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이거 오늘 쉽게 가겠는데.”
“역시 정우 형이야.”
“정말 순식간에 골을 넣네.”
“나도 정우 형처럼 골을 잘 넣었으면 좋겠다.”
다들 기뻐하며 한마디씩 했다.
대한도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잘하면 오늘은 벤치 신세로 끝나겠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왜?’
―서해고 축구 선수들의 체력이 생각보다 좋고 조직력도 뛰어납니다. 당장은 원더골이 터져서 다 이긴 경기처럼 보이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전세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는 에바의 조언을 토대로 축구 경기에 대한 안목을 넓혀가고 있었다.
‘한정우는 좋은 스트라이커야. 이강희도 공격 본능이 우수해. 다만 둘 다 ‘골 결정력’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잘 보셨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고질병이 바로 ‘골 결정력’이 약하다는 겁니다. 물론 이 경기는 고등 축구라서 골이 좀 많이 터질 겁니다.
“골!”
“와아아아!”
이번에는 서해고 벤치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일어났다.
세트 피스 상황에서 기가 막힌 킬 패스로 동점 골을 넣은 것이다.
―제 말이 맞죠?
‘응, 정말 이번 골은 알고도 못 막는 골이었어.’
―그래도 느긋하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마스터가 들어가는 시간은 후반전, 경기 끝나기 전 10분에서 15분 사이니까 말이에요.
‘알겠어.’
4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전반전이 끝나자 휴식을 하러 주전 선수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편하게 앉아 물을 마시면서 쉬었다.
예전 같으면 대한이 그들에게 물병을 나눠주거나 수건을 건네줬을 테지만 이번에는 동영상 촬영을 핑계로 그러지 않았다.
“다들 잘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의 조직력이 아직 제대로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거야. 2선에서 최종공격수까지 볼이 배급되지 않으면 골을 넣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미드필더들이 좀 더 분발해 줘!”
“네, 감독님.”
“길도와 양모는 전진 패스를 해주고 지면이와 찬영이는 끝까지 들어가서 중앙으로 센터링을 해라! 성태와 재한이는 기회 봐서 오버래핑으로 활로를 찾아봐!”
“예, 감독님.”
대한은 옆에서 최정규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들었다.
‘우리는 공격수도 좋고 수비수도 좋은데 허리가 부실하네.’
―맞습니다. 미드필더진이 영 시원치 않아서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어요.
대한과 에바는 열심히 숭신고의 장단점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무한한 정보를 접하는 에바의 평가와 판단이 그보단 훨씬 더 정확하고 예리했다.
삐익!
10분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후반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후반전 시작한 지 겨우 5분 만에또다시 골이 터졌다.
“골!”
이강희가 찬 볼이 수비수를 맞고 얼렁뚱땅 들어가 버렸다.
서해고의 입장에서 보면 운도 지지리 없는 어이없는 실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3분도 지나지 않아 서해고의 동점 골이 터졌다.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쏜 멋진 중거리 슛이었다.
“으아아아!”
“젠장!”
“골 먹었다.”
“다시 동점이야.”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왔어.”
숭신고 축구부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물론 가장 기운이 빠지는 이는 주전 선수들이었다.
“골 넣을 시간은 충분하다. 다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최정규 감독은 박수를 치며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워 줬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이어 서해고의 역전 골이 터져버렸다.
“골이다!”
“이럴 수가!”
“순식간에 당해 버렸다.”
서해고의 윙백이 오버래핑을 한 후 얼리크로스를 올린 것을 최종 공격수가 퍼스트 터치로 공을 잡자마자 그대로 찬 것이 골이 됐다.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쉽게 골을 내줬다. 하지만 넣은 사람 입장에서는 피나는 연습과 훈련의 결과였다.
―마스터, 슬슬 몸을 푸십시오.
‘너무 이른 거 아냐? 25분이나 남았는데…….’
―그럼 10분간만 몸을 푸십시오.
‘크흠.’
듣고 보니 빨리 몸을 푸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거 만지지 말고 그대로 놔둬!”
“…….”
아무도 대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를 조절해 서해고의 골대 쪽을 잡았다.
어차피 자신이 수비하러 들어갈 일은 없다. 그러니 아예 한쪽 경기장을 찍는 건 포기해 버린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에바에게 맡기고 대한은 천천히 축구장 외곽을 어슬렁거렸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축구장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경기 하나 때문에 참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네.’
축구는 축구 선수만 하는 게 아니다. 심판도 있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다. 지켜보는 관중도, 먹을 것과 음료수를 파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다 선수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차량도 필요했다.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니 생수병을 옮겨줄 사람도 필요했다. 도대체 이 한 경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지 대한은 감히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어쩌면 오늘 그는 난생처음으로 축구 경기에 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대한아!”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최정규 감독이었다.
“들어가서 프리킥 차!”
“예.”
드디어 기다리던 출격이다.
대한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듯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다.
“잘 부탁한다.”
이강희가 밖으로 나오면서 그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대한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서해고의 아크서클로 다가갔다.
한정우가 돌파하는 것을 서해고의 수비수가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주심은 가차 없이 휘슬을 불어 프리킥을 줬다. 어렵게 얻은 귀중한 기회가 대한의 눈앞에 놓여있었다.
힐끗 시계를 보니 경기 종료 딱 10분 전이었다.
―마스터, 골키퍼의 성향을 분석해 본 결과, 우측 하단의 성공률이 제일 높습니다.
‘에바, 내가 10분은 풀로 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한번 잘 해보자.’
―네, 마스터! 파이팅!
대한은 에바의 응원을 한쪽 귀로 흘리며 축구공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곤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그는 골대를 한번 쳐다봤다. 골키퍼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 축구장의 안과 밖 모든 사람들이 대한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쓸 가치도 없다. 눈앞에 벽을 쌓은 상대 팀 선수들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프리킥은 기본적으로 내가 차는 것이다.
상대가 쌓은 벽을 차는 것도 아니고 그 위쪽으로나 옆으로 차야 한다.
도도도도! 뻥!
대한은 힘차게 달려가 오른발로 볼을 감아 찼다.
축구공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러다 크게 왼쪽으로 휘면서 골대 오른쪽 아래로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골키퍼가 몸을 날려보았지만 이미 축구공은 골대를 지나고 그물망과 만나 춤을 추고 있었다.
“와아아아!”
숭신고 벤치에서 천둥 같은 함성이 일어났다.
대한은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생애 최초의 축구 경기에서 첫 골을 터트린 것이다. 가슴이 뿌듯해지고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세상이 내 발아래 있는 듯한 묘한 고양감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숭신고 주전 선수들이 일제히 그에게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은 대한을 얼싸안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대한아, 잘했다!”
“기가 막힌 프리킥이었어.”
“네 덕분에 동점이 됐어.”
“정말 잘 찼다.”
평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던 이들이 태반이다. 그런데 이렇게 골 하나 넣었다고 겁나게 친한 척을 한다. 하지만 대한도 이런 그들의 태도를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축구는 어차피 혼자서 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러니 이들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빨리 하프라인을 넘어가라!”
너무 시간을 끈다고 생각했는지 주심이 와서 선수들을 독촉했다.
삐익!
다시 원점에서 축구 경기가 재개됐다.
스코어는 3대3 동점.
숭신고와 서해고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치열하게 격돌했다. 허접한 미드필더들도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든 제 몫을 해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서해고는 쉽게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대한도 나름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한 번도 공을 잡지 못했다. 상대 팀은 물론이고 같은 편인 숭신고 선수들까지 패스를 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부지런히 하프라인과 페널티 에어리어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종료 3분을 남겨놓고 있었다.
삐익!
그때 주심이 갑자기 휘슬을 불었다. 한정우가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에서 과감하게 침투하다 넘어진 것이다. 반칙을 유발하는 영리한 그의 움직임이 결국 빛을 발한 것이다.
“와아아아!”
“프리킥이다.”
“이제 이겼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대한에게 집중됐다.
대한도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쓸모는 오직 프리킥을 할 때뿐이다. 프리킥이 없을 때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상대 팀도 금세 그걸 깨닫고는 경기 중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프리킥을 찰 기회가 생기면 그는 3단 변신 로봇처럼 가공할 존재로 탈바꿈한다.
안타깝게도, 상대 팀은 아직도 대한의 진가에 대해 의구심이 가득했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대한은 축구공을 들고 프리킥을 찰 준비를 했다. 마치 자신이 전문 키커라도 되는 것 같이 당당한 행동이었다.
숭신고 축구부원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제발 대한이 프리킥으로 점수를 내주길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대한은 축구공을 향해 지체 없이 달려갔다.
그는 왼발로 강하게 볼을 찼다. 축구공은 쏜살같이 날아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꺾여 들어갔다.
퉁!
골대의 왼쪽 상단 포스트에 맞은 볼!
공은 빠르게 튕기며 그대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