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축구부 훈련>
대한은 부모님께 따지려 했다. 하지만 에바의 만류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스터! 부모님의 자존심도 생각해 주셔야죠.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이 벌어온 돈을 흥청망청 쓰고 싶겠어요?
‘정말 그럴까?’
―당연하죠. 그리고 두 분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어요. 마스터 혼자 살면 좀 작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셋이 같이 사는 집을 빌리려면 월세가 더 많이 나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부모님은 결코 아들의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대한이 시무룩하게 있자 김혜영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들아! 장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너에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구나.”
“재주는 무슨…….”
“아니야. 네가 요새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서 이 엄마는 참 기쁘다. 앞으로도 저렇게 예쁜 여자들과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데이트도 즐겨라! 엄마는 너 대학교 안 가도 괜찮아.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
“크흠!”
김혜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이태산은 괜한 헛기침을 했다.
대한은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꼭 호강시켜 드릴게요.”
“아휴! 네 말만으로도 엄마는 배가 불러.”
김혜영은 손으로 아들의 넓적한… 아니, 이제 조금은 작아진 얼굴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에바! 아무래도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집을 사야겠다.’
―마스터!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권력이자 힘입니다.
대한은 일단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을 살 수 있는 돈만 생긴다면 그때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다음 날, 대한은 부모님의 강력한 응원에 힘입어 6호선 새절역 근처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인 ‘로열패밀리하우스’를 계약했다.
그 집은 전용 면적 18평에 방 3개짜리 집이었다. 전셋값은 2억 6천만 원이었는데 가족 중 누구도 그만한 돈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결국 보증금 3천에 월세 100만 원으로 집을 빌리게 됐다.
교통도 편리하고, 아버지의 직장인 신사선린공원과도 아주 가까웠다.
“한 달에 월세로 100만 원이나 받아먹다니… 도둑놈들!”
이태산은 아까부터 혼자 자꾸 구시렁거렸다. 그렇다고 이미 계약한 집의 월세가 더 싸지는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하루빨리 방송을 할 수 있게 인테리어를 하는 게 중요했다. 다행히 이태산이 직접 나서 진두지휘한 덕분에 300만 원을 들여서 사흘 만에 멋진 스튜디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떠냐? 네 생각대로 잘 나왔냐?”
“우와! 정말 멋있어요. 이 정도면 전문 스튜디오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대한의 말에 이태산의 어깨가 으쓱했다. 다행히 큰방을 스튜디오로 인테리어 한 것이 아들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대한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가로로 쇠기둥이 박혀있고 그 위에 다섯 개의 조명이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뒤쪽엔 배경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롤러가 보였다. 커다란 벽지나 천을 롤러에 달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 되는 편리한 방식이었다. 뒤쪽 천정 양쪽에는 예쁜 스피커도 하나씩 부착되어 있었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길고 튼튼한 테이블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밑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고 테이블 위쪽 중앙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양쪽 벽에는 두 개의 큼지막한 모니터가 벽걸이처럼 나란히 붙어있었고 좌우로 은은한 조명도 한 개씩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세로 기둥에는 반사판이 각각 매달려있었다.
―마스터, 중고 카메라 두 대만 더 사서 천장 양쪽 끝에 하나씩 설치해 주세요.
‘알았어. 쓸 만한 카메라 알아보고 즉시 사들여!’
―예, 마스터.
대한은 에바의 요구를 바로 허락했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미리 봐두었던 두 대의 중고 카메라를 즉시 구매했다.
당연히 돈은 그의 코코아뱅크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에바는 앞으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더욱 생생하고 다이내믹한 영상을 올리게 될 것이다.
‘에바, 상태 창 좀 열어줘!’
―네, 마스터.
대한은 이탈리아어를 얻고 2주 만에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이대한
등급: 루키
칭호: 없음
나이: 만 17세
직업: 학생(숭신고등학교 2학년)
재능: 이탈리아어(A), 폭풍 성장(S), 축구 기본기(C), 영어(A)
스탯: 근력 58, 민첩 35, 체력 40, 지력 53, 마력 0
신장 165cm, 몸무게 91kg
역시 아끼고 아껴서 상태 창을 연 보람이 있었다.
신장이 163cm에서 2cm가 더 자라 165cm가 되어 있었다.
몸무게도 꾸준히 빠져서 93kg에서 91kg이 됐다.
스탯도 근력, 민첩, 체력, 지력이 모두 2개씩 상승했다.
특이한 것은 재능 ‘영어(B)’가 ‘영어(A)’로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것이다.
‘에바! 영어 등급이 왜 한 단계 올라갔지?’
―그거야 그동안 모니카와 영어로 얘기를 많이 해서 그렇죠.
‘아! 이거 모니카 덕분이구나.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대한은 자신이 노력했음에도 어쩐지 얻어걸린 느낌이 들었다. 에바는 그의 생각을 고쳐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도 저녁 식사의 대부분은 마스터께서 돈을 내고 계십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모니카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꼭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에바! 넌 모니카 얘기만 나오면 뭔가 좀 삐딱하다?’
―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에바는 시치미를 딱 잡아뗐다.
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흠칫 놀란 에바는 괜히 딴짓을 하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확실히 키가 크고 체중이 줄어서 그런지 뭔가 잘생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의 머리 위에선 에바가 볼을 부풀린 채 허공을 향해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 * *
“슛!”
뻥!
“아! 또 막혔다.”
짝짝!
“다시 한번 가자!”
“네, 감독님.”
최정규 감독의 말에 모두 세트 피스 상황을 재현했다.
“정우와 강희는 대한이에게 공을 주고 나서 바로 침투해 들어가라!”
“네, 감독님.”
“대한이도 공을 받으면 바로 리턴 패스해 줘!”
“예.”
한정우와 이강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규가 한정우에게 공을 찼다. 그 뒤 한정우가 공을 받고는 곧바로 침투해 들어갔다.
수비수들이 일제히 라인을 내리고 압박해 들어갔다. 한정우는 옆으로 패스하는 척하다가 약속대로 대한에게 패스했다.
‘에바! 어디로?’
―이강희가 뒤로 돌아가요.
대한은 재빨리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발뒤꿈치로 슬쩍 공을 밀어줬다.
숭신고의 에이스이자 주 공격수인 한정우에게 다시 공이 갈 줄 알았던 수비수들은 급히 이강희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수비들이 이미 벗겨진 상황이라 이강희는 골키퍼를 피해 손쉽게 골대 구석으로 공을 밀어 찰 수 있었다.
짝짝짝!
“나이스!”
최정규는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칭찬했다. 한정우와 이강희는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묘한 눈빛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처음에 그들은 대한이 왜 축구부 훈련에 참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프리킥 실력을 보고 나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절로 입이 딱 벌어지는 환상적인 프리킥! 그제야 그들은 최정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숭신고등학교 축구부 어느 누구도 대한만큼 프리킥을 날카롭고, 정교하게 차지 못했다.
아니, 대한의 프리킥은 이미 고등부 수준을 훨씬 넘어 선 K리그 수준이었다.
“우리 한 번 더 해보자. 이번에는 오른쪽이다.”
“네, 감독님.”
공격수 한정우와 이강희가 자신의 포지션으로 뛰어갔다. 그 사이 최정규는 대한을 불렀다.
“대한아!”
“네?”
“혹시 좋은 기회가 생기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차버려!”
“저 보고 슛하라고요?”
“응. 어떻게 되나 한번 보려고. 그러니까 조금도 부담 갖지 말고 차라!”
“예, 알겠습니다.”
대한을 바라보는 최정규의 눈에서 마치 꿀이 떨어지는 듯했다.
다시 세트 피스 상황이 재현되고 방향만 바뀐 곳에서 공격과 수비가 맞붙었다.
이번에는 최정규 감독에게 공을 받은 이강희가 돌파를 시작했다. 대한은 페널티 에어리어 선상에서 멀뚱거리고 있다가 패스를 받았다.
수비들이 그를 강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수비가 다가오기 전에 빨리 패스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에바! 어디로 패스할까?’
―양쪽 공격수들에게 수비들이 붙었어요. 그냥 뒤돌아서 차세요.
대한은 수비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별생각도 하지 않고 에바의 말대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골대에는 골키퍼 한 명을 제외하곤 텅 비어있었다.
―마스터! 슛 성공 확률을 보시고 참고하세요.
에바가 골대를 향해 대한만 볼 수 있는 가상의 점선을 그려놓았다.
점선 위에는 슛을 했을 때 볼이 들어갈 확률이 실시간으로 나타나 있었다.
‘왼쪽 65%, 오른쪽 80%!’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확률이 높은 오른쪽 골대로 볼을 감아 찼다.
뻥!
볼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골대의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이다!”
일순 모두의 움직임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공격과 수비를 나눠서 하고 있는 숭신고 축구부 팀원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지금까지 누구도 대한을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니, 안중에도 없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의 슛을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짝짝짝!
“잘했다. 10분간 휴식이다.”
“예, 감독님.”
최정규는 축구부 팀원들에게 10분간 휴식을 준 후 대한에게 걸어왔다.
“대한아! 괜찮니?”
“네, 감독님.”
“그동안 체력이 많이 늘었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10분을 넘기기가 힘들어요.”
대한은 자아비판을 하는 심정으로 솔직히 고백했다. 자신 때문에 숭신고 축구부가 손해를 보는 게 싫었던 것이다.
“괜찮아. 이 정도 속도면 금세 15분을 풀로 뛸 수 있을 거야.”
“예, 더욱 노력할게요.”
“그런데 방금 그 슛은 뭐였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 프리킥 외 슛에는 약하지 않았니?”
“아, 그거요! 그냥 프리킥이라고 생각하고 볼을 찼더니 쉽게 들어가던데요?”
“뭐? 하하하! 그렇구나. 앞으로도 그런 좋은 기회가 있으면 들어가든 말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슛을 해버려!”
“예, 그렇게 할게요.”
달콤한 휴식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갔다. 물 한 잔 마시고 숨을 고르니까 벌써 10분이 지나있었다.
휴식 시간 동안 최정규는 대한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테스트해 보았다. 최정규의 입장에서 날카로운 칼이 손에 들어왔는데 휘두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칼의 손잡이가 좀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 점만 해결된다면 아마 명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안 되는 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되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노력하는 감독이었다. 그래서 당장 대한이 할 수 없는 것들은 전부 쳐냈다. 대신 프리킥과 패스 그리고 연계 플레이에만 집중했다.
숭신고는 전형적인 4―4―2 축구를 한다.
숭신고의 공격수 한정우와 이강희는 고등 축구 레벨에서는 꽤 강력한 공격수다. 그런데 최정규에게 남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비장의 무기가 생겼고 그 무기를 사용하려면 둘 중 한 명의 공격수를 빼야 했다. 그 무기가 바로 프리킥 외에는 축구 기본기만 있는 대한이다.
최정규는 대한에게 수비나 미드필더를 시킬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축구부와 같이 훈련을 시켜보니 생각보다 연계 플레이와 패스가 좋았다.
특히 순간적으로 찔러 넣어주는 창의적인 킬 패스는 아주 일품이었다. 정말 몸만 좀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면 아마 당장 공격수나 미드필더 포지션에 선발로 발탁했을 것이다.
“다시 세트 피스 상황에서 연습을 해보자!”
“예, 감독님.”
축구부 팀원들이 일제히 모였다가 흩어졌다. 대한도 그들과 함께 세트 피스 상황을 재현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방향과 거리를 바꿔서 여러 번 훈련했다.
처음에는 훈련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경험해 보니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패스와 연계 플레이는 자신이 있었다. 치트키인 에바가 옆에서 코치를 하고 있어서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사실 대한은 프리킥 외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패스와 연계 플레이가 뭔지 깨달아버렸다.
최소한 자신이 들어간 경기에서 막판 10분 정도는 얼마든지 버텨낼 자신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