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델 삐에로>
“델 삐에로다!”
“알렉산더 델 삐에로가 나왔다!”
대한은 고개를 들어 입국장을 쳐다봤다. 슬라이드 도어가 열리고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보였다.
‘에바! 델 삐에로 맞지?’
―네, 맞아요.
대한은 즉시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건장한 경호원들이 쌓은 인의 장막에 가로막혔다.
그사이, 델 삐에로는 축구 협회 관계자와 함께 공항을 빠져 나갔다. 그로 인해 대한은 델 삐에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뭐야, 이거!”
대한은 경호원들의 행포에 대놓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이들도 돈 받고 하는 일이라서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에바! 작전 실패다. 괜히 공항까지 왔어.’
―플랜 B로 가시죠.
‘우리에게 플랜 B가 있었어?’
대한의 의문에 에바는 귀엽게 변명했다.
―이럴 때는 그냥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 알았다.’
―알렉산드로 델 삐에로는 지금 특급 호텔 백제로 가고 있습니다. 피파(FIFA)가 주최하는 아시아 축구 발전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죠.
‘그럼 우리도 일단 백제 호텔로 가야겠군.’
―그렇습니다. 공항 철도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현재로썬 그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오케이!’
대한은 에바의 조언대로 공항 철도를 탔다. 서울역에서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고 동대입구역에서 내렸다. 500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백제 호텔에 도착해 로비로 들어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타깃을 찾았다. 때마침 체크인을 하고 있는 델 삐에로!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찾았다.”
대한은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다가 도중에 멈칫했다. 왠지 지금 가면 매너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델 삐에로가 체크인을 마치길 기다렸다. 마침내 델 삐에로가 호텔 프런트 데스크를 떠나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다. 대한은 급히 다가가 능숙한 이탈리아어로 델 삐에로에게 말을 건넸다.
“Buona sera!”
“Buona sera!”
델 삐에로는 모국어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는 당신의 열렬한 팬입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기 위해 전 그동안 이탈리아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오우! 그러고 보니 정말 이탈리아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시네요.”
“이 모두가 당신의 덕분입니다. 미스터 알렉산드로!”
대한의 정중한 말에 델 삐에로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확실히 팬 서비스를 해드려야겠네요.”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정말 제가 바라던 바니까요.”
그는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델 삐에로와 악수를 했다. 델 삐에로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는 팬이 싫지 않았다. 덕분에 대한은 델 삐에로와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신체 접촉을 통해 진짜 원하는 바도 성취할 수 있었다.
‘에바!’
―피코셀을 주입했습니다. 알렉산드로 델 삐에로의 DNA를 분석 중입니다.
‘최대 재능은 역시 축구겠지?’
―맞습니다. 예상대로 프리킥(SS)이 최대 재능입니다.
‘와우! 역시 생각대로 델 삐에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대한은 델 피에로의 최대 재능인 프리킥의 등급이 ‘SS’급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재능 흡수 대상자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였다.
―마스터도 곧 프리킥을 잘 찰 수 있겠군요.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대한은 일단 한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에 만족했다.
그는 델 삐에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식사할 시간은 없지만 같이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잠깐 방에 올라갔다고 내려오면 안 될까요?”
“저는 이곳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일 보시고 나오세요.”
대한은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숭신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이대한이라고 합니다.”
“고등학생이셨습니까?”
“네, 제가 좀 늙어 보이나요?”
“아닙니다. 그렇진 않습니다. 이탈리아어를 너무 고급스럽게 사용하셔서 그보다는 조금 더 높게 봤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기꺼이.”
델 삐에로는 대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승강기를 탔다. 대한은 근처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15분쯤 지나자 승강기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델 삐에로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한쪽 손에는 축구공이 들려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15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하하하! 정말 유쾌한 분이시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더욱 즐거워지네요.”
“대한!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델 삐에로가 내민 것은 직접 사인을 한 축구공이었다.
“와우! 이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군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대신 호텔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사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고등학생에게 얻어먹는다면 내가 짠돌이라고 분명히 내일 타블로이드 1면을 장식하게 될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제가 확실히 팬 서비스를 하겠습니다.”
“어쨌든 같이 가시죠.”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더럽게 비싼 커피 한 잔과 생수를 주문했다. 델 삐에로는 참 맛없게 생긴 커피를 잘도 마셨다. 대한은 생수를 조금 마시다가 내려놨다.
“이탈리아어는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어학원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아름다운 미녀에게 배웠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우리나라 말이 유창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델 삐에로는 잠시 뜸을 들이다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혹시 장래에 축구 선수가 될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은 뭐라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축구 선수도 제 인생에 놓인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치고는 참 조숙한 말과 생각이네요.”
대한의 신중한 말에 델 삐에로는 적이 감탄했다.
“최근에 제가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렇게 변했습니다.”
“방학 동안 무슨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니고……. 제가 개인 방송을 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물론 전 유티버이기도 합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뭔가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채널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꼭 보고 싶습니다.”
델 삐에로는 참 친절했다. 그는 중년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호기심도 아주 왕성했다.
대한은 대한 TV로 들어가 델 삐에로에게 모니카와 합방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러자 당장 델 삐에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 대단한 미녀군요.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이탈리아어 선생님입니다.”
“세상에! 이런 미녀가 대한민국에 꼭꼭 숨어있었군요. TV 탤런트나 영화배우인 줄 알았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가면 대성할 것 같은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지금 합동 방송을 하고 있잖습니까!”
“아! 그럼 이분도 유티버인 모양이군요.”
델 삐에로는 모니카에게 관심이 아주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락처를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아직은 아닙니다만 아마 곧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같이 동영상을 찍을 수 있을까요? 제 채널에 미스터 알렉산드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인사말 정도라면 허락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한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왕년의 축구 스타 델 삐에로를 만나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약속대로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우웅!
그때, 머릿속에서 익숙한 공명음이 들려왔다.
―대상자 알렉산드로 델 삐에로의 DNA 분석이 끝났습니다. 재능 프리킥(SS)을 흡수합니다.
‘예스! 드디어 재능 프리킥을 얻게 됐구나.’
대한은 델 삐에로와 작별 인사를 나누며 아주 기뻐했다. 그의 환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델 삐에로는 대한과 포옹까지 하고 자신의 객실로 올라갔다.
대한은 목적을 100% 달성했다. 호텔까지 굳이 델 삐에로를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
그는 호텔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모니카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도 내일이다. 대한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싶었다. 그래야 내일 본격적으로 새로운 재능을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 * *
힘차게 달려가 축구공을 찼다.
뻥!
허공을 힘차게 날아오르던 볼이 왼쪽 구석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일명 델 삐에로 존에 정확히 꽂힌 것이다.
“예스!”
대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스터! 알렉산드로 델 삐에로의 프리킥에 대해 감을 좀 잡으셨습니까?
‘응. 이제 좀 알 것 같아.’
처음에는 프리킥을 어떻게 차야할 지 전혀 몰랐다. 감아 차기, 바나나 프리킥, 무회전 프리킥, UFO 프리킥 등, 종류도 많았고 차는 방법도 전부 달랐다.
선수 시절의 델 삐에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프리킥을 찼다. 거기에다 강하고 부드럽게 강약까지 조절했다. 그러니 아무리 델 삐에로의 뛰어난 프리킥 재능을 흡수했다고 해도 대한이 당장 소화하기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재능을 흡수했으니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잘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하룻밤 열이 펄펄 나는 후유증을 겪긴 했지만 그는 결국 단 하루 만에 프리킥에 대해 감을 잡았다.
사실 이게 중요했다. 이 재능이라는 놈은 잘 가르친다고 해서 쉽게 배울 수가 있는 게 아니다. 이건 그냥 자신이 알아서 느껴야 한다.
재능을 빨리 개화하는 사람도 있고 늦게 개화하는 사람도 있다. 때론 아예 죽을 때까지도 개화되지 않아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케이스도 있다. 그런데 대한은 이 어려운 것을 에바의 도움을 받아 아주 쉽게 해냈다.
―마스터! 달풍선이 쏟아지고 있어요.
‘개이득!’
대한은 운동과 축구 기본기 훈련에 이어 프리킥 연습을 하는 모습도 방송에 내보냈다.
세상에 누구도 갑자기 잘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하는 모습을 미리 찍어두면 나중에 프리킥의 마스터가 됐을 때 아마 설득력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달풍선까지 터져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였다. 운동도 되고, 프리킥 실력도 늘고, 돈도 벌고 말이다.
뻥, 뻥, 뻥, 뻥, 뻥…….
대한은 감아 차기를 시작으로 바나나 프리킥, 무회전 프리킥, UFO 프리킥 등 다양한 프리킥을 연습했다. 정면에서만 차지 않고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서 거리를 조절해 가면서 신나게 프리킥을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그의 프리킥은 능숙해졌으며 노련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이런 식으로 이주만 보낸다면 아마 프리킥 하나만큼은 어딜 가도 빠지지 않을 비장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대한아!”
“아휴!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대한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돌리자 최정규 감독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한아! 방학인데 왜 학교에 왔어?”
“축구 기본기 훈련과 프리킥 연습을 하러 왔어요.”
“프리킥?”
최정규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벌써 15분 전부터 대한이 프리킥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대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바가 그의 주변을 항상 살펴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한번 프리킥을 차봐라!”
“예! 그런데 어느 쪽으로 찰까요?”
“뭐라고?”
최정규는 대한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쪽으로 차냐고요? 왼쪽? 오른쪽? 위? 아래?”
“그게 가능해?”
“아직 먼 곳은 잘 안 되지만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는 가능해요.”
“흐음, 일단 왼쪽 아래로 차봐.”
“네.”
대한은 대답을 하자마자 곧바로 축구공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감아 차기로 부드럽게 볼을 찼다.
뻥!
빠르게 허공을 날아간 볼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곤 골대의 왼쪽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최정규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줬다. 대충 거리를 재보니 골대에서 20m쯤 떨어진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