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모니카>
어머니가 아시면 아마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대한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식 참석 안 했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 담임에게 조금 잔소리를 듣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에바 말대로 지금 바로 어학원으로 가서 이탈리아어 수강 신청을 해야겠어.’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재능을 얻는 데 있어서 하루는 무척 길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대한은 즉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밥 안 먹고 가니?”
어머니가 아침밥을 챙겨주시려고 했다.
“오늘은 그냥 사 먹을 거예요.”
그는 괜히 어색한 분위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밖에서 사 먹기로 했다.
은평 터널 앞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7715번 버스를 탔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정류장에서 하차해 100m쯤 걸었다. 470번 버스를 갈아타고 종로2가 삼일교 정류장에서 내렸다.
50m쯤 걸으니 어학원으로 유명한 파도 어학원 타워가 보였다. 2층의 리셉션 데스크로 올라가자 앳된 여자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대한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뻘쭘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그럼 이쪽 인터뷰 룸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탈리아어 담당 선생님을 보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확실히 유명한 어학원이라서 그런지 무척 친절하고 대응도 깔끔했다. 인터뷰 룸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자 이국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늘씬한 여자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안뇽하쎄요?”
대한은 순간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이탈리아어 선생님이 예뻐도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고 긴 머리카락!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갈색의 깊은 눈동자!
조막만 한 얼굴에 오뚝한 코와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입술!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자체 발광을 하는 듯했다.
마치 이탈리아가 나은 세기의 미녀, 모니카 벨루치의 리즈 시절을 보는 듯했다.
―마스터, 긴장을 푸시고 먼저 인사부터 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대한입니다.”
에바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전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I’m sorry. I can’t speak Korean well.”
안타깝게도 그녀는 아직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영어로 말했다.
“Oh! It’s OK. You can talk to me in English.”
“Wow! You speak in English very well.”
다행히 대한은 영어를 듣자 바로 반응했다. 재능 ‘영어(B)’의 능력은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아 참!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전 모니카 로렌(Monica Loren)이에요.”
“반갑습니다.”
모니카는 활짝 웃으며 대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말이 많이 서툴러요.”
“전 괜찮아요. 어차피 이탈리아어를 배우러 온 거니까 영어로 가르쳐주셔도 상관없어요.”
“어머! 너무 잘됐어요. 실은 수업 신청을 하는 사람이 적어서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요.”
“네에?”
모니카는 생각보다 훨씬 솔직했다.
그리고 이 정도 미인이 강의하는데 수업 신청을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으로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가 한국어를 못해서 수강 신청을 했다가 취소하는 사람이 많아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모니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참 청순하고 순수한 미녀였다. 그녀의 이런 점이 대한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눈부신 모니카의 아름다움에 점차 대한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재능 흡수할 준비나 잘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바가 중간에 끼어들어 자꾸 말을 걸었다.
“전 수강 신청을 하면 취소하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아무래도 초급반 강의를 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대한은 무척 아쉬웠다.
이렇게 예쁜 선생님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면 금방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본인 스스로가 고사를 해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제가 이탈리아어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일대일 강의뿐이에요.”
“네에? 전 일대일 강의도 좋아요.”
놀란 그는 기회가 오자 잽싸게 붙잡았다.
“그거 꽤 비싼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가격도 모르면서 대한은 일단 지르고 봤다.
―마스터! 일대일 강의 수업료는 한 달에 50만 원입니다.
‘더럽게 비싸네.’
에바가 알려줘서 일대일 강의 수업료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비싸긴 비쌌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50만 원을 투자해 500만 원, 아니 5천만 원으로 불리면 된다.
“일대일 강의시간은 언제가 좋아요?”
“너무 늦은 시간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그럼 일단 오후 4시에 하도록 해요. 서로 스케줄을 봐서 나중에 더 좋은 시간을 찾아봐요.”
“그렇게 하죠.”
대한이 의욕적으로 나오자 모니카와의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녀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작은 내일부터예요. 괜찮죠?”
“물론이죠.”
“대한!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모니카!”
“호호호! 그럼 우리 서로 잘 해봐요.”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청아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니카가 악수를 하자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한은 모니카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꼭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에바!’
―피코셀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에바와 죽이 착착 맞았다.
대한이 모니카의 손을 잡는 순간, 벌써 피코셀이 주입되어 그녀의 DNA 분석에 들어갔다.
“모니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일대일 강의를 신청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죠? 그리고 교재는 어떤 것을 사야 해요?”
“아!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물론이죠.”
재능 흡수를 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한번 물어봤다. 그런데 모니카는 친절하게도 대한과 같이 움직여 주었다.
일대일 강의 수강 신청을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교재까지 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줬다. 덕분에 그녀의 최대 재능이 ‘이탈리아어(SS)’가 아닌 ‘언어학(SSS)’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트리플 S등급은 처음 본다.’
―상당히 귀한 재능입니다.
‘그래도 내게 언어학(SSS)은 필요 없잖아.’
―그렇지요.
‘이탈리아어(SS) 재능을 흡수하자.’
―예, 마스터.
트리플 S등급 재능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좀 아쉬웠다. 하지만 폭풍 성장(SS) 이후 두 번째로 보는 더블 S등급의 재능을 흡수할 수 있게 됐다.
“이거 너무 고마워서 어쩌죠?”
“고맙다니요? 대한은 이제 내 고객인데요.”
“하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대한은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들의 옆을 스쳐 가는 수강생들이 그와 모니카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대한은 왠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난 이렇게 아름다운 모니카와 웃고 떠들 수 있다며 모든 사람들에게 대놓고 자랑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학교라면 학생이 되겠지만, 학원이니 당연히 고객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모니카 말이 맞네요.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대한은 뜬금없이 커피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모니카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대답했다.
“없어서 못 마시죠.”
“그럼 보답으로 제가 카푸치노(Cappuccino) 한잔 대접할게요.”
“정말요?”
“네, 진심이에요.”
“그럼 우리 요 옆에 새로 생긴 커피 전문점으로 가요.”
모니카는 생각보다 훨씬 쿨(Cool) 했다.
사람의 호의를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대한보다 모니카의 키가 훨씬 더 커서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저기예요.”
“참 예쁜 가게네요.”
대한의 말에 모니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한은 그 미소에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커피 전문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약속대로 카푸치노 두 잔을 샀다. 그러자 모니카는 옆에서 티라미수와 레몬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케이크 계산은 그녀가 했다. 둘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와 케이크를 바라보는 모니카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케이크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커피하고 같이 먹으면 아주 끝내주잖아요.”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매를 쳐다봤다. 전혀 살이 찐 몸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델처럼 팔다리가 길쭉길쭉했다. 그런데도 나올 데는 확실하게 나오고 들어갈 데는 확실히 들어간 글래머였다.
“혹시 지금 제 몸매 체크한 거예요?”
“아! 미안해요. 이렇게 단 케이크를 먹고도 그렇게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 그랬어요.”
“후후후!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해명까지 하고 그래요? 젊은 남자가 나처럼 예쁜 여자의 몸매를 좀 훔쳐볼 수도 있지요.”
“아.하.하!”
대한은 무척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또 모니카에게는 웃음 코드였나 보다. 이번에는 아예 목젖까지 보이면서 마구 웃어댔다.
‘세상에 목젖이 보이는데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아주 그냥 한눈에 뻑이 가셨네요.
대한의 말에 에바는 질투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를 냈다.
모니카와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커피는 향긋했고 케이크는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대한은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해 알게 됐다.
모니카의 나이는 스물하나.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한류를 좋아해서 한국에 와서 사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이제 소원을 이루게 됐으니 일도 해보고 한국어도 차차 배워볼 생각이라고 했다.
우웅!
그때 머릿속에서 익숙한 공명음이 일었다.
―재능 흡수 대상자 모니카 로렌의 DNA 분석이 끝났습니다. 재능 ‘이탈리아어(SS)’를 흡수합니다. 대상자의 재능과 관계된 경험과 기억을 전송합니다. 대상자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재능 흡수가 중단됩니다. 재능과 관계된 경험과 기억 전송도 이하동문입니다.
질투에 불타는 에바의 딱딱한 말투!
한편으로 좀 귀엽기도 했다.
대한은 에바의 설명을 들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탈리아어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은 모니카와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했다.
“대한은 뭐 해요?”
“전 개인 방송을 하는 BJ겸 유티버입니다.”
“와아! 대단하다. 진짜예요?”
“네, 정말이에요.”
대한은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의 채널을 열어서 보여줬다.
“유티버를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모니카는 페이스노트나 원스타그램 안 해요?”
“하긴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동안 제대로 관리를 못 했어요.”
“그렇구나.”
모니카는 그의 스마트폰을 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동자는 참 깊고도 맑았다.
자신처럼 초고도 비만인 아싸 남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눴다. 거기에다 커피도 마시고 케이크까지 사서 나눠 먹었다.
모니카에게 있어서 대한의 외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그녀가 얼마나 편견 없이 자신을 봐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영혼이 맑고 순수한, 더불어 성격까지 쿨한 미녀!
‘이런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스터, 모니카와 데이트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되지요. 다음 재능은 유혹이나 매혹 같은 것으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하아!’
대한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와 사귀는데 ‘유혹’이나 ‘매력’ 같은 재능을 꼭 써야만 하는 걸까?
그는 에바의 말에 오히려 상처를 받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주제 파악에 들어갔다. 이런 아름다운 여자와 또 언제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해보겠는가!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지금은 오롯이 모니카에게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