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루키>
‘에바! 들린다, 들려!’
―영어가 들리시는 모양이군요.
‘응,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우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영국의 재능을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설마 한영국 선생님이 앞으로 영어를 못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재능 흡수는 카피(복사)에 가깝습니다. 만약 빼앗는 것이라면 재능 약탈이라는 단어를 썼을 겁니다.
대한은 신이 났다. 조금씩 영어가 들리고 뜻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공부라는 말처럼 쥐뿔도 몰랐을 때는 아예 영어 교과서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런데 아주 조금이라도 귀에 들리고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관심과 흥미와 재미가 폭발했다.
‘나도 이제 영알못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의 눈에서 의지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영국은 열심히 수업하다가 힐끗 대한을 쳐다봤다. 썩은 동태눈깔을 하고 있던 녀석은 사라지고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의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살짝 감동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점차 한영국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한의 영어에 대한 이해도도 빠르게 올라갔다.
딩, 동, 댕, 동!
수업 시간이 다 됐다는 차임벨이 울렸다.
한영국은 곧바로 수업을 끝내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한은 영어 교과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영어 읽는 소리가 그럴듯하게 변해 갔다.
“야! 돼지야!”
쉬는 시간에 일진 한 명이 다가왔다.
이름이 장문기라고 했던가?
대한은 그냥 무시하고 계속 영어 교과서를 봤다.
“선생님, 저는 영어를 너무나 잘하고 싶어용. 제가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영어를 X나게 잘할 수가 있을까용?”
장문기는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니, 대한의 목소리를 과하게 비틀어서 조롱했다. 그러자 또 다른 일진 하나가 장문기의 행동에 동조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말이 제게 엄청 용기를 심어주셨어요. 한번 X 빠지게 영어 공부를 해 볼랍니다.”
“푸하하하!”
“무하하하!”
일진들 사이에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이번 것은 좀 웃겼는지, 반 아이들 몇 명도 같이 따라 웃었다.
‘고동수, 주경원, 장문기! 너희 일진 세 놈 두고 보자! 내가 잘 기억해 놓겠다. 아니, 네놈들은 이미 내 살생부에 올라가 버렸어.’
대한은 그들이 뭐라고 해도 전혀 안 들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일종의 무시라면 무시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복수의 그 날을 손꼽았다.
일진 세 명은 그가 반응하든 안 하든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자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마스터! 우리 당장 어쌔신을 찾아봐요. 이런 괘씸한 놈들은 절대로 가만히 두면 안 돼요.
‘가만히 안 두면 뭘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재능 ‘살인 기예’를 배워서 놈들의 멱을 따버려야죠.
에바는 상당히 과격하게 나왔다. 놀린다고 전부 멱을 따버리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이처럼 화를 내자 대한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예전에는 세상에 자기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을 유일하게 편드는 존재가 나타났다.
고맙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다.
‘싸우는 재능도 있겠지?’
―물론이죠. 재능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싸움과 전투에 관한 재능이에요.
대한은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가져야 할 재능들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재능은 언제 흡수할 수 있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등급과 재능의 종류에 따라 전부 다릅니다.
‘내 등급이 뭐지?’
―현재 마스터의 상태를 온라인 게임에서 사용하는 상태 창 형식으로 표시해 드릴게요.
벌써 에바가 인터넷에 접속해 온라인 게임을 살펴본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 좌측 상단에 투명한 상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이름: 이대한
등급: 루키
칭호: 없음
나이: 만 17세
직업: 학생(숭신고등학교 2학년)
재능: 없음
스탯: 근력 45, 민첩 22, 체력 27, 지력 33, 마력 0
신장 159.5cm, 몸무게 101kg
상태 창을 보자 대한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키와 몸무게는 그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쳤다.
‘내 스탯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말을 좀 순화할까요?
‘솔직하게… 아니다. 순화해서 말해 줘!’
대한은 굳이 에바한테까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현재까지 습득한 정보를 기초로, 마스터의 스탯은 D급입니다.
‘D급이 뭔데?’
―스탯 평균 60 이하는 무조건 D급으로 설정합니다.
‘그러니까 D급이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쉽게 말해서 마스터의 육체적 능력은 일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인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 그러니까 스탯이 60은 돼야 일반인이란 말이구나.’
근력이 45, 민첩이 22, 체력이 27, 지력이 33 그리고 마력은 0!
그냥 스탯을 한번 보기만 해도 자신이 절대 일반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것 아닐까? 난 고2 학생이니 일반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재빨리 핑곗거리를 찾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에바의 다음 말을 듣고는 결국 긴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의 평균 스탯이 50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남자의 평균 스탯은 55를 넘어 거의 60에 육박합니다. 지금 자신이 학생이라고 자위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뼈를 때리는 에바의 말에 대한의 멘탈이 산산이 조각났다.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대한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에바! 알았으니까 인제 그만 찔러라! 많이 먹었다.’
―제가 언제 찔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뭘 드신 거예요?
전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언어로도 얼마든지 폭행을 할 수가 있어. 이제 그만하고 대책을 얘기해 봐!’
―저는 사실을 말했는데 언어 폭행으로 받아들이셨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대책은 마스터가 세우셔야 합니다. 저는 그저 도우미일 뿐입니다.
에바는 살짝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내가 알아서 대책은 세울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네 생각을, 아니 조언을 좀 해보라고.’
―마스터의 등급은 현재 가장 낮은 ‘루키’입니다. 오늘 ‘영어(A)’라는 재능을 흡수하셨기 때문에 앞으로 쿨타임이 최대 한 달까지 갈 겁니다.
쿨타임이 무려 한 달이라는 말에 그는 조바심이 생겼다.
‘혹시 쿨타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당연히 있습니다. 흡수한 재능을 최대한 빨리 소화하면 됩니다.
‘언어를 어떻게 소화해?’
―해당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시키면 쿨타임이 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대한은 그제야 에바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남은 피코셀은 8,900억 개입니다.
‘헐! 왜 자꾸 피코셀이 줄어드는 거지? 아까는 9,000억 개라고 했잖아?’
―피코셀은 소모품입니다. 계속해서 보충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코셀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데?’
―마스터의 몸 안에 피코셀을 복제하고 생산하는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자신의 몸 안에 공장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내 몸 안에 공장을 만든다는 말이야?’
―예, 하지만 마스터가 걱정하실 정도로 크진 않습니다.
‘사이즈가 얼마나 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진주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 정도면 사실 존재 자체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대한은 손으로 자신의 광활한 배를 슬쩍 만져봤다. 진주 정도의 크기라면 한 알이 아니라 100개, 아니 1,000개가 들어가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스터께서 꼭 알아두셔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습니다.
‘뭐야,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잖아!’
에바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수명은 앞으로 정확히 7년 남았습니다.
‘뭐? 내 몸에 기생하는데도 에바가 죽는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대한은 마치 사랑했던 여자한테 배신을 당한 표정을 지었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7년 안에 우주 탐사선 ‘히릭스(Hilix)’를 찾아서 재생 수리를 해야 합니다.
‘재생 수리?’
―우주 탐사선이 보유한 부품과 소재를 사용하면 재생 수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하지만 에바의 말은 아직 전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적절한 피코셀의 숫자를 유지하려면 자원이 필요합니다.
‘어떤 자원을 말하는 거야?’
―귀금속, 보석, 희귀 광물 등 아주 다양합니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의 재정 상태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것이라 에바의 말은 단호했다.
‘그럼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버셔야 합니다.
‘난 이제 겨우 고2라고. 내가 무슨 재주로 돈을 벌어?’
―그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 연구해보죠.
‘영어(A)’ 하나 배웠다고 100억 개의 피코셀이 소모됐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최대 89개의 재능을 더 얻을 수 있다.
뭐 이 정도 숫자라면 재능충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재능의 등급과 종류에 따라 소모되는 피코셀이 다르다는 것이다.
잘하면 최대 89개의 재능을 얻지만 잘못하면 재능 10개만 얻은 채 피코셀이 바닥을 보일 수도 있었다.
‘최소 10개라고 해도 쿨타임이 한 달이면 열 달이나 시간이 있구나.’
대한은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열 달밖에 없는 것보다는 열 달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딩, 동, 댕, 동!
4교시가 끝났다는 차임벨이 울렸다.
꼬르륵!
대한의 배꼽시계가 점심시간을 알려왔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으로 향했다. 다른 때는 몰라도 매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옆에서 보면 동그란 공이 하나 굴러가는 것 같은 모습!
물론 대한도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식욕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필사적으로 달린 결과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대한이 왔니?”
“안녕하세요?”
“뭐 줄까?”
“햄버거 5개랑 고구마 피자빵 5개 주세요.”
“그래, 여기 있다.”
매점 주인은 이미 대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친절했다. 그가 매점의 최우수 고객이기 때문이다.
대한은 돈을 내고 빵 봉지를 받았다. 그리곤 급식실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도핑이라도 한 것처럼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빨랐다.
시끌벅적!
항상 배고픈 청소년들이라 그런지 급식실 앞에는 벌써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한은 식판을 받고 창가 구석 자리로 갔다.
그의 눈이 마치 불타는 스캐너처럼 식판 위를 훑었다. 발아현미밥, 콩나물국, 대패 오리불고기, 통새우볼과 칠리, 블루베리 양상추 샐러드, 배추김치, 큰 구슬아이스크림!
대한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들로 꽉 채워졌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들었다.
냠냠, 쩝쩝, 냠냠, 쩝쩝!
나름 천천히 식사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굴착기가 지나간 것처럼 식판은 빠르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식사의 메인은 큰 입이다.
포크를 든 손은 그저 도울 뿐!
대한은 1분도 되지 않아 식판을 거덜 내고 빵 봉지를 뜯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햄버거와 고구마 피자빵을 쳐다봤다. 마치 명량해전을 나가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처럼…….
‘나에게는 아직 햄버거 5개와 고구마 피자빵 5개가 남아있습니다.’
왜(倭)의 조선 침탈 야욕을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로 개박살 내버린 어벤저스급 히어로 이순신같이 대한은 햄버거 5개와 고구마 피자빵 5개를 그렇게 자근자근 씹어 먹었다.
“히야! 저 새끼 먹는 거 하나는 진짜 전교 1등이다.”
“돼지처럼 잘도 처먹고 있네.”
“X발! 차라리 아예 먹방을 찍어라!”
“저게 사람이냐? 정말 먹방하면 대박치겠다.”
주변에서 그의 먹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욕과 함께 감탄사를 발했다.
‘에바! 먹방이 뭔지 알아?’
―물론이죠. 먹는 모습을 찍어서 방송하는 거 아니에요?
에바는 신기하게도 먹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