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만재능(Feat. 대한 TV)-3화 (3/331)

3화 <에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차 조심해라.”

여느 집과 다르지 않은 아침 풍경이다.

대한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부엌을 정리하는 김혜영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태산은 아내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김혜영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우리 아들 괜찮겠죠?”

“응, 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어제와는 완전히 역전된 상황.

그렇지만 둘 중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른 채, 대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향했다.

“I'm so sick of this fake love, fake love, fake love……”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맑았다.

살도 좀 빠졌는지 몸도 참 가벼웠다. 거기에다 배까지 부르니 금상첨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라! 이게 뭐지?”

걸어가던 그의 몸이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대한은 오동통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에서 깜빡이는 붉은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미친 것… 같지는 않고. 설마 무슨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초능력자가 된 것은 아니겠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그런 행운이 꼭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행운이 코앞에 나타나면 반드시 꽉 거머쥐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너 뭐야? 흔한 천사나 악마 콘셉트냐?”

대한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점멸하는 붉은 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났다.

팍!

붉은 점이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에 홀로그램 같은 생생한 글자들이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저는 천사나 악마가 아닙니다.

“허걱!”

그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진짜 말을 하네. 아니, 글을 쓰는 건가?”

대한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매우 놀란 상태였다.

―저의 이름은 ‘에바’입니다.

허공에 글자가 써지고 머릿속으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굳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저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어떻게 대화를 해?”

―그냥 마음속으로 대화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의도적으로 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세요. 머릿속으로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 뇌파를 통해 저에게 의사가 전달됩니다.

“정말?”

―예, 저는 항상 진실만을 말한답니다.

역시 만화와 무협지를 좋아하고, 게임을 많이 해서 그런지 대한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이한 현상에 무척 적응이 빨랐다.

‘이렇게 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아주 완벽히 잘하셨어요. 이제 저와 이렇게 직접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와! 이게 진짜 되네.’

―안 될 이유가 없잖아요.

정체불명의 존재 에바!

대한은 그녀와 생각만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 참! 그건 그렇고… 너 정체가 뭐야? 왜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거지?’

―일단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사과?’

―제가 워낙 사정이 급해서 허락도 구하기 전에 이렇게 먼저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봐!’

―물론입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 에바는 포르낙스 은하계를 통치하는 볼트 행성의 스파이럴 대제국 로열나이트 아카데미의 에듀케이션 모듈입니다.

에바의 말에 대한은 그저 눈만 깜빡거려야 했다.

‘포르낙스 은하계? 볼트 행성? 스파이럴 대제국? 로열나이트 아카데미의 에듀케이션 모듈? 이게 다 뭐냐?’

―포르낙스 은하계는 지구로부터 약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계 너머에 있습니다.

‘으음, 역시 외계 생명체란 말이군.’

대한은 에바를 쉽게 외계 생명체로 정의했다. 그러나 에바는 그의 말을 바로 부정했다.

―제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체는 아닙니다.

‘외계 생명체는 아니고 그냥 프로그램이란 말이야?’

―아직 이 행성에서 통용되는 프로그램이란 말의 개념을 잘 모릅니다. 다만 저를 일종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초자아 슈퍼 인공지능과 시스템이 결합된 에듀케이션 모듈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초자아 슈퍼 인공지능이라……. 대충 뭔지 알 것 같기도 같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눈치라는 것이 있다.

그는 대충 그러려니 하고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내 몸에 무슨 접속 장치라도 부착한 거야? 아니면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 같은 건가?

―저는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이 아닙니다. 마스터의 몸속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피코셀입니다.

‘피코셀?’

―나노 단위보다 훨씬 작은 피코 단위로 만들어진 조직으로, 나노셀보다 훨씬 발전된 개념입니다.

‘가만, 내 몸속에 존재한다고 했지? 그럼 지금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대한은 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살폈다. 하지만 딱히 이상하거나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혹시 나를 납치해서 해부하거나 인체 실험에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빠르게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서 먼저 시신경에 접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뭐든지 해봐.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보라고.’

지잉!

순간, 머리가 띵 울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그러더니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만든 작은 인형 같은 게 둥실 떠올랐다.

대한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그걸 쳐다봤다.

‘우잉!’

―안녕하세요? 전 에바예요.

작고 앙증맞은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에바!

그 모습을 길거리 한복판에 서서 떡하니 바라보고 있는 대한!

둘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날 선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에바가 먼저 슬며시 시선을 거뒀다.

―크흠, 그럼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겠습니다.

에바는 맑고 영롱한 목소리로 또랑또랑 말을 이었다.

허공에 홀로그램이 난무하기 시작하자 그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대한은 놀라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미지의 존재가 전하는, 난생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세계로 푹 빠져들었다.

에바의 황당하고도 판타스틱한 설명이 한동안 이어졌다. 대한은 그걸 아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줄여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유통 기한이 지난 네가 폐기되지 않으려고 네 멋대로 내 몸속에 들어와서 기생을 시작했다는 말이네.’

―에잉! 표현이 너무 거칠어요. 좀 순화해서 말씀하셔도 되는데…….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네요.

에바는 당황한 듯 볼이 살짝 붉어졌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르지만 애교를 부린답시고 몸까지 비비 꼬아댔다. 하지만 대한은 이런 에바의 귀여운 모습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거 아주 곤란하게 됐네.’

―마스터께선…….

‘마스터? 아까부터 누구한테 자꾸 마스터라고 하는 거야? 혹시 나?’

대한은 에바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확실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에바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앞으로 저의 마스터가 되실 분이니 이제부터라도 마스터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네?

‘크흠! 일단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

대한은 슬쩍 곤란한 대답을 넘기며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사이 에바도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마스터께서는 스파이럴 제국인과 비슷한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계세요.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저희가 마스터의 신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어쨌든 내 허락 없이 내 몸에 들어온 건 맞잖아?’

―네? 아! 네. 그, 그건 맞습니다.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지 에바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만약 내가 에바를 끝까지 거부하면 어떻게 되지?’

―저를 비롯한 1조 개의 피코셀은 즉시 활동을 멈추고 폐기됩니다.

‘폐기된다고? 폐기되면 혹시 내 몸 안에 그냥 쓰레기처럼 남는 건가?’

대한은 만의 하나의 경우를 가정해 노골적으로 물어봤다.

에바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마스터의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전혀 인체에 해롭지 않아요.

‘그 말은 에바와 피코셀이 죽으면 내 몸 밖으로 배출된다는 얘기네?’

―저희는 생명체가 아니라서 죽는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자가 파괴 후 분해돼서 자연적 원소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어쨌든 죽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군.’

에바는 굳이 더 이상 대한의 표현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자신과 피코셀이 소멸한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에 만족했다.

대한은 잠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

그사이 대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불안했던지 먼저 에바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스터께서는 저희를 거부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 에바의 말을 듣고 보니 나한테 큰 해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물론이죠. 저는 스파이럴 제국에서 개발된 로열나이트 아카데미 에듀케이션 모듈 중 유일하게 트리플S 인증을 받은 최상급 초자아 슈퍼 인공지능 에듀케이션 모듈이거든요. 절대 마스터에게 해를 끼치거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에바는 참, 말을 길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나노셀이 몸속에 들어와 주인공을 초인으로 만드는 그런 판타지 소설은 많이 읽어보았다.

피코셀은 나노셀보다 더 발전된 개념이라고 했다. 그러니 분명 자신에게 뭔가 유익한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지금의 이 허접한 몸을 더 좋게 바꿔줄 것이 분명했다.

대한은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에바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난 에바의 마스터가 되겠어.’

―어머! 정말 저희의 마스터가 되어주시는 거예요?

‘응.’

―우와! 감사합니다.

에바는 너무나 기뻐서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한차례 춤을 췄다.

처음에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봐서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마음에 결정을 내리게 되자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마스터! 앞으로 저 에바와 1조, 아니 현재 남은 9천억 피코셀은 마스터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에바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앙증맞은 손을 들어 대한을 향해 경례했다.

대한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자 에바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내밀었다.

대한의 손가락과 에바의 두 손이 닿자 그들은 동시에 마주 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물론 에바는 홀로그램이라 물리적으로 어떤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시각적으로, 아니 정신적으로 뭔지 모를 충만감이 느껴졌다.

“어머, 쟤 뭐니?”

“글쎄? 미쳤나 봐! 허공에다 손가락질하고 있네.”

“생긴 것도 살찐 돼지 같은 게 하는 짓도 정상이 아니다.”

“야! 작게 말해. 듣겠다.”

“듣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지가 우리한테 뭘 어쩌겠어.”

“호호호! 그건 맞아.”

대한은 자신을 지나치며 독설을 퍼붓는 여학생들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듣고 보니 정말 자신이 미쳤다고 할 만했다. 길거리 한복판에 서서 허공에다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말이다.

“크흠!”

대한은 무안해서 괜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당장 창피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얼굴이 뜨뜻해졌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조심해야겠다.’

―마스터, 죄송해요. 앞으로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아니야. 사실은 나도 좀 흥분했어.’

―저도 마스터를 만나서 너무 좋고, 흥분돼요.

‘우리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다시 하도록 하자.’

―예, 마스터.

대한은 시계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잘못하면 지각을 할 것 같았다. 그는 헐레벌떡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학교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헤엑, 헤엑, 헤엑…….”

대한은 가쁜 숨을 내쉬며 교실로 들어왔다. 대한이 나타나자 스물다섯 쌍의 눈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꿀꺽!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괜히 긴장되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한껏 몰렸던 시선은 놀란 피라미가 도망치듯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의 존재감은 Zero(0)다!

이미 그는 반에서 공기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한은 창가 중간으로 걸어가 비어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