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85화
“…흐음.”
강태한은 잠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본인이 알고 있는 생사경에 대한 정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새삼 별다른 내용이 나올 리는 없었다.
무림에서도 사실상 뜬구름 잡는 망상 정도로 취급받던 개념이었기에, 애당초 뭔가 참고할 만한 내용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이들은 어디 문파의 시조들이나 달마대사들처럼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들 뿐.
그마저도 뭔가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선대 고수들의 업적을 칭송하거나 이야기꾼들이 저잣거리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들이기 위해 꾸며 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간혹가다 본인이 생사경에 도달했다고 자처하며 떠들어 대는 이들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그런 이들은 크게 둘 중의 하나였다.
어줍지 않은 깨달음으로 자신감이 넘치게 된 나머지 오만해져 버린 삼류 무인이거나, 아니면 정녕 미쳐 버린 광인(狂人)이거나. 이런 상황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사경이라는 말 자체가 헛소리로 치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뭔가 실마리가 보인 것 같기는 한데…….”
다만, 강태한은 생사경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무공의 끝이라 알려진 현경(玄境), 그다음의 경지가 존재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소위 무공의 끝이라고 알려져 있는 현경. 그 경지에 직접 도달해 보니, ‘여기가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현경조차도 하나의 봉우리일 뿐이지, 산의 정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가 한계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벽이 틀어막고 있을 뿐, 그 뒤에도 분명히 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강태한이 그 벽을 부수거나 넘어선 적은 없다. 그냥 새로운 벽의 존재를 인지하고 계속 부딪치기만 해 봤을 뿐,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반복해 오던 나날. 무림에서 온갖 자원들을 끌어 모아 수행을 쌓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전신의 내공이 한번 싹 날아가 초기화되었던 현대에선 두말할 필요도 없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방금 전 있었던 일은 강태한 본인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딱히 자신을 과소평가한 것도, 황 실장의 상태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강태한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도달해 있던 경지의 영역에서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죽어 가는 황 실장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에 가까운 심정이었고, 어떻게든 명줄만이라도 이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비명을 내지르고, 다른 사람이랑 멀쩡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의식이 회복되었으니… 이건 명백하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그다음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던 초록빛 불꽃.
그것을 본 순간, 강태한은 이것이 일반적인 인지의 영역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개념인 것을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생명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실체화된 모습이라고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한 단계 위의 경지를 훔쳐본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의아하구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강태한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바닥 안에 푸른빛이 감도는 강환(罡丸) 하나를 만들어 냈다.
내공을 유형화시킬 정도로 압축시켜 낸 강기를, 다시 한번 구의 형태로 압착하여 만들어 내는 물건.
이것만 보더라도 강태한의 내공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처음 단전이 텅 비어 있어 운기조식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감회가 새로운 정도라 할 수 있으리라.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무림에 있었던 시절과 비견될 만한 수준인 것은 결코 아니다. 비교를 하는 것조차 머쓱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좀 커다란 연못과 호수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사실 당연한 부분이었다.
기(氣)라는 개념이 당연한 무림에서 몇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내공과 기가 메말라 붙은 현대에서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쌓아 올린 내공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전의 힘을 되찾기는커녕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많이 남아 있는 상황. 말하자면, 아직 출발선상에도 서지 못한 상태다.
헌데 힘이 넘쳐흐르던 시절에도 찾지 못했던 다음 경지의 실마리를, 어떻게 지금 느낄 수 있었느냐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공의 깊이와 깨달음의 경지는 별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서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지금은 알 수 없는 건가…….”
강태한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머리마저 뒤로 젖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그에게는 의문을 해소해 줄 스승도, 함께 고민해 줄 친우도 없었다.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설렘이군.”
허나 그런 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린아이와도 같은… 그런 기대감이 잔뜩 맺힌 순수한 표정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경지로 향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무림인에게 가장 즐겁고 설레는 일이지 않겠는가.
스스로 품었던 의문들도, 그걸 되짚어가는 일과 고민에 잠긴 시간들조차 그 실마리의 흔적을 더듬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한번 건너편의 경지에 발을 담그고 실마리를 붙잡기 위해서, 강태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산 구석에 틀어박혀 수행에 몰두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그는 이미 무림에서, 그것도 갑자 단위의 내공을 쌓은 상태로 몇 년 동안 수행에만 빠져 있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진전도 얻지 못한 채 벽에만 부딪쳐 왔었다.
그렇다면 결국 해답은 강태한이 지금까지 현대에서 보낸 시간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단순했다.
“일단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게 좋겠지.”
현대에서 이어 왔던 생활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충실하게 이어 오는 것. 그것이 강태한의 결론이었다.
“흐으음……!”
생각의 정리를 마친 강태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가볍게 기지개를 펴 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 끝날 시간.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이지.”
서울 강남구 안쪽에 위치해 있는 한 대형 병원의 1인실. 그곳의 침대에 누워 있던 황 실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난 이렇게까지 오래 쉬어야 될 일인가 싶기는 해. 지금 당장에도 걸어 다니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거든.”
그는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팔다리를 차례차례 움직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최성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병문안도 괜히 온 것 같네.”
“아니지. 그러니까 병문안이 더 절실하지. 심심해 죽겠는데 사람이랑 얘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멀쩡한 황 실장의 모습에 최성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황 실장도 너스레 웃으며 말했다.
“근데 진짜로 신기하기는 하네…….”
“뭐가?”
“실장님 이렇게 멀쩡한 거요. 사실은 덤프트럭이 아니라 무슨 조막만 한 트럭에 치인 거 아니에요?”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던 조재우의 말에 따르면 어디 공사장에서 보일 법한 느낌의 큼지막한 트럭이었다고 했었다.
실제로도 부딪치고 나서 꽤 멀리까지 튕겨져 나가 주변 사람들이 죄다 비명을 내질렀다는 모양.
다만 최성현이 봤을 때는 정말 그 정도로 큰 사고였었는지도 의심될 정도였다. 대충 몸의 상태를 보고, 직접 혈도의 상태까지 확인해 봐도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트럭 크기 같은 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야. 그 운전수랑 이야기했었던 거 아니에요?”
“했었지. 병문안도 가장 먼저 왔었고.”
황 실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자기가 트럭으로 사람을 치었다는 죄책감과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멀쩡하다는 감사함.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는지, 그는 황 실장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아 냈었다.
“근데 누가 그 자리에서 ‘트럭이 몇 톤짜리예요?’라고 물어보냐. 그냥 미안하다, 다행이다, 이런 이야기하고 사고처리는 어떻게 할 거냐 정도나 말하지.”
“으음… 그것도 그렇네.”
최성현은 적당히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애초에 장난으로 물어본 것이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건 그렇고, 방이 진짜 좋네요.”
최성현은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쾌적한 것이, 치료 목적뿐만 아니라 방 안에 머무르는 사람의 편의와 안락함도 추구한 것이 느껴지는 병실이다.
여기 병원이 대청그룹 쪽과 연관이 있어 따로 구할 수 있었던 병실이라고 했었던가.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으나, 확실히 훌륭한 병실이기는 했다.
“으음. 사실 나는 다인실을 좀 더 좋아하기는 해.”
다만 그런 최성현의 감탄에 황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도 들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다인실? 왜요?”
“난 사람들이 좀 있어야 덜 심심하더라고.”
“에이… 배부른 소리 한다, 진짜.”
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최성현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황 실장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다른 사람이랑 같이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뭐 어쨌거나, 갖다 달라고 하신 거 가져왔어요.”
“아, 그래. 언제 꺼내나 했네.”
최성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밑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 실장의 노트북 가방이었다.
“심심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 참이었거든.”
스마트폰이 있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트북이 있어야 선택지가 넓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황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노트북을 꺼내 들더니 전원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뭐, 게임이라도 하시게요?”
“게임? 뭐… 그것도 나쁘진 않기는 한데.”
괜찮은 제안이지만 황 실장이 생각해 두고 있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콘센트를 꽂고 전원을 연결한 황 실장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밀린 사무 작업이나 좀 할까 했지.”
“…예? 일을 한다고요?”
“안 될 건 뭐 있나.”
황 실장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딸칵, 딸칵 하는 클릭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 결국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최성현이었다.
“아니… 굳이 입원한 상태로 그럴 필요가 있나.”
“못 할 이유도 없잖냐.”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상식적으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약간 일중독이라는 게 이런 때 쓰이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냥, 내가 뭐라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런 의아한 최성현의 반응에 황 실장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태한에게 도움이 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죽어가던 황 실장을 살려 낸 것은 강태한이다.
당시에는 의식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단편적인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들만 봐도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제로 경험해 봤을 정도니…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가만히 병실에 앉아 농땡이나 피우고 있으면, 그저 심심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불편해진다.
물론 강태한이라면 ‘이참에 좀 푹 쉬세요’ 같은 말을 하겠지만, 이렇게 마음에 빚을 진 상태로 쉰다고 마냥 편하게 쉴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일 좀 한다고 갚을 수 있는 빚도 아니지만…….’
적어도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황 실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입가에 실소를 머금은 채로 노트북을 켜고 거기에 있는 문서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