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83화
‘으으…….’
황 실장은 침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가. 뭔가 평소와 다른 감각으로 붕 떠 있는 느낌이다. 정신이 몽롱하다고 할까, 신경이 무뎌진 느낌이라고 할까. 혹은… 시간 자체가 터무니없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만 같다.
‘아… 그럴 만도 한가.’
자신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애써 기억을 가다듬다 보니, 대략적인 내용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아직 빨간불인데도 한 아이가 횡단보도로 뛰어들었고, 트럭 한 대가 같은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아이를 붙잡고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를 어디로 던졌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인도 쪽으로 던졌나, 아니면 더 안쪽 차도로 깊숙이 던졌을까. 상식적으로는 전자 쪽이 맞겠으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니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했네.’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다니.
순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 황 실장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 실장은 그런 인간상과는 꽤나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굳이 자기가 나서서 희생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일을 안타깝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일은 없다.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회 경험이 좀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바뀌게 된 성격이다.
선행을 베푸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선행에 항상 보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작은 감사의 인사조차도 듣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진정한 선행은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황 실장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고,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다. 그냥 자기 사람들 정도만 챙기는, 그 정도 선으로 말이다.
그랬었는데… 무슨 변덕이었을까.
횡단보도에 뛰어든 게 어린아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주변 사람의 영향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다름 아닌 강태한이다.
눈앞에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도와주고, 도움을 주고 나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생색도 내지 않는다.
뭔가에 초월해 있는 듯한 그런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바꿔 가는 힘이 있다. 옆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싫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태했던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고, 가벼웠던 마음가짐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으로 바꿔 놓는… 그런 자연스러운 영향력 말이다.
아마 이번 일도 그런 영향의 연장선일 것이다.
방금 전 상황에서도 강태한이 있었다면, 그는 주저 없이 아이를 향해 뛰어들었을 테니까. 아무렇지 않게 아이랑 같이 인도로 돌아오고는, 가볍게 핀잔을 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갈 길을 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걸 좀 어설프게 따라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정작 본인이 차에 치이고, 어느 쪽으로 아이를 던졌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어설퍼도 너무나도 어설픈 형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이는 괜찮나?’
‘덕분에 멀쩡한 것 같네요.’
순간, 혼자서 떠올린 생각에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강태한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일까, 그 대답은 강태한의 목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그런가…….’
머릿속 생각에 답변이 나오고 있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 스스로 원하는 대답을 망상한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누가 대답을 해 준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덕분에 마음에 걸리고 있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황 실장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았다.
* * *
“어… 원장님?”
방금 전 강태한에게 전화를 걸었었던 조재우.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강태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그는, 조심스레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통화.
그리고 그 상대는 강태한이다. 화면에는 분명 강태한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고 통화 시간도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인데, 수화기 건너편에 있었을 상대방은 지금 황 실장의 옆에 앉아 맥을 짚고 있었다.
‘사실은 마침 주변에 계셨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20층에 위치한 천마안마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내려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등신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허나 그는 이내 좌우로 고개를 휘젓고는 강태한에게로 다가갔다. 강태한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는, 적어도 지금 당장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
한편, 다급히 내려오자마자 황 실장의 곁에 자리를 잡은 강태한. 그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태를 살펴보고 있던 그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원장님! 혹시 도와드릴 게 있나요?”
“…119에 연락은 하셨나요?”
“예? 아, 네! 원장님에게 전화하기 전에 먼저 해 놨었어요.”
무언가 사고가 났으면, 구조 팀에 연락을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최우선인 일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강태한에게 전화를 건 것도 ‘어떻게 좀 해 달라’의 의미보다는 보고의 차원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황 실장의 몸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허나 한 차례, 두 차례 반복할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건, 이미.’
간혹, 천마안마에 찾아오는 단골 중에서는 강태한이 뭐든지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떠받들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실제로 앉은뱅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든가, 오랜 지병을 말끔히 고쳐 놓는다든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몇 차례 해냈으니 말이다.
허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강태한은 정정해 왔다.
자신은 그저 할 수 있는 일들만 해낼 뿐이고,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도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이다. 그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황 실장의 몸 상태는 굉장히 좋지 않았다. 외부로 나오는 출혈은 거의 없었으나 내부는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혈도의 상태도 뒤죽박죽으로 엉켜진 상태였다.
“척추에 직접 충격이 가해진 모양인데…….”
무엇보다, 척추를 따라 흐르는 대주혈(大柱穴)의 맥이 끊어져 버린 상태다. 대주(大柱)라는 그 명칭대로 몸의 큰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혈맥인데, 그곳이 손상되어 버린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인데, 가장 치명적인 점은 대주혈이 상, 중, 하의 세 단전들과도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주혈에 큰 충격이 가해지게 되면, 세 단전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가해지게 된다는 것. 지금처럼 맥이 끊어져 버릴 정도의 충격에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분야건 간에, 높은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보이는 게 많아지게 된다. 덕분에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빠르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강태한은 황 실장의 몸 상태를 처음 살펴본 순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이미 어떻게 손을 대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대주혈의 맥이 끊어지고 세 단전이 동시에 충격을 받은 상태다. 원래라면 불가능함을 인지한 순간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 실장이다.
함께 천마안마를 꾸려 나간 파트너이자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그런 사업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아이는.”
그때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마르고 갈라진 그리고 희미한 목소리였으나, 적어도 강태한에게는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다름 아닌 황 실장의 목소리였다.
“아이는… 괜찮나?”
강태한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바로 인근에서, 울상인 얼굴로 이쪽을 살펴보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옷이 지저분하고 곳곳에 생채기가 있는 것만 빼면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멀쩡한 것 같네요.”
강태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그러자 황 실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힘없고 흐릿했으나, 그렇기에 선명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이윽고, 그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와 동시에, 강태한의 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든 살려 낸다.
분명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대로 황 실장이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고민을 할 필요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 * *
강태한은 우선 명문(命門)혈에 자극을 가하고, 그곳에 고여 있는 원기(原氣)를 끌어 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체내에 지니고 있는, 다른 말로는 선천진기(先天眞氣)라 불리는 그것. 그 어떤 내공보다도 순수하고 본인의 체질에 어울리는 그것을 순환시켜, 체내의 재생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린다.
본래 원기를 건드리는 것은 수명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고,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다루면 적지 않은 거부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 황 실장의 몸은 거짓말처럼 얌전했다.
아마 그의 몸 자체가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은 수명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다.
강태한에게 수동적으로나마 협력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놓아 버린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희망적인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스읍… 후우우…….”
체내의 기를 끌어모으고, 그 성질을 황 실장의 체질에 맞게 가공하여 명문혈을 통해 불어넣는다.
본래라면 아무리 지쳐 있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전신에 활력을 가득 채워 넣고도 남을 충분한 양이다.
허나 그 기운은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체내의 기를 받아들이고 생기를 순환시킬 단전들이, 모두 충격을 입고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비유를 들자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라고 할까. 비록 단전들이 깨지거나 아예 망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세 단전이 동시에 손상을 입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스읍… 후우우…….”
허나, 계속 반복한다.
밑 빠진 독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물을 붓고 있는 동안에는 물이 담겨 있는 항아리다. 적어도 물에 젖은 항아리는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혈도의 자리를 되돌리고 재생력을 끌어 올린다. 지금 뭐라도 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재우 씨!”
“네, 네!”
“여기, 양쪽에 풍문혈이랑 곡원혈, 여기 좀 계속 눌러 줘요, 빨리!”
부족한 실력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한다.
“거기, 앞에 빌딩에서 제세동기 좀 가져와 주십쇼! 최대한 빨리요!”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일단 활용한다.
그렇게 기를 불어넣기를 한 차례.
두 차례, 다섯 차례, 그 뒤로도 계속…….
허나 바뀌는 것은 없다.
그 모든 시도가 얼핏 무의미해 보일 지경이다. 결국 강태한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어찌할 수가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
강태한의 눈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그것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광채처럼도 보였고 조그맣게 타오르는 불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시간은 멈춰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이 순간을 따로 떼어다 놓은 느낌. 그 이질적이고 왜곡된 감각 속에서, 오직 자신과 그 불꽃만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었다.
강태한은 천천히 희미한 불꽃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기에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기를 불어넣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와 함께, 조그맣던 불꽃이 크게 일어났다.
딱히 강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더 이상 희미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선명하고 밝은 불길.
“…….”
그다음 순간, 멈춰 서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던 불꽃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강태한은 그 자리를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그그그극, 뭐, 뭐야?”
그렇게 몇 초 정도 지났을까.
바닥에 엎드려 있던 황 실장은, 갑자기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등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