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80화
“키가 큰 게 맞는 거 같은데?”
“으음… 잘 모르겠는데.”
송준우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정수리에서부터 손바닥으로 옆에 있는 전봇대와 키를 가늠해 보았다. 다만 그런다고 키를 측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할머니가 바지 밑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바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곧 있으면 종아리까지 드러나겠다.”
“어… 그러게?”
중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가 큰맘 먹고 사 주셨던 맞춤 교복. 다만 맞춤이라고는 해도 사이즈가 굉장히 커서 핏은 꽤나 헐렁한 편이었다. 한참 성장할 때니까 곧 있으면 키도 몸집도 훌쩍 클 거라며 측정된 사이즈보다 좀 더 크게 맞춘 탓이다.
다만 그렇게 맞춘 것이 무색하게, 오랫동안 키가 크기는커녕 몸집도 잘 불어나지 않아서 헐렁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평소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보니, 제법 사이즈가 맞게 된 느낌이다. 특히 다리 밑단 같은 경우에는 종아리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어 칠부바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쩐지 몸이 좀 꽉 끼는 느낌이더라!”
“이놈아, 그 정도면 입자마자 알아챘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또 할머니가 빨래를 잘못해서 옷이 쪼그라든 줄 알았지. 예전에도 몇 번 그랬었잖아.”
옆에 있는 편의점의 유리창에 몸을 비춰 보던 송준우.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로 그날 강태한이 말했었던 내용들이 전부 사실이었음은 확인된 셈이다. 어깨 결림은 진즉부터 사라져 있었고, 밤에도 잠자리에 들면 눈을 감고 십을 세기도 전에 잠이 드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녀석.”
한편, 그런 손주의 얼굴을 보고 있던 할머니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나이답지 않게 웃는 일이 거의 없었던 아이인데, 요즘에는 웃는 모습도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그만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몇 시인데?”
“어디 보자… 대충 다섯 시 정도 됐을 거 같은데.”
할머니가 슬쩍 하늘을 살펴보며 말하자, 송준우는 까치발을 들어 옆에 있는 편의점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확히 다섯 시 십 분이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늘은 안마 아카데미에서 수업이 있는 날.
처음에는 막연한 호기심과 흥미 정도로만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송준우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그가 가장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태한이 형이 직접 찾아와 가르쳐 주는 시간이다.
평소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도 매우 특별하지만, 태한이 형이 가르쳐 주는 것들은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했기 때문. 뭐랄까, 가만히 앉아서 명상만 하고 있는데도 몸 안에 비어 있는 조각들이 하나둘씩 짜 맞춰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늦은 거여?”
“응! 그러니까 빨리 가자.”
어찌 됐거나, 송준우가 수업을 듣는 시간은 다섯 시다. 이미 지각을 해 버린 상황. 강태한의 수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수업도 아니다.
송준우는 다시 리어카 뒤쪽을 붙잡으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빠르게 할머니 일을 도와주고 아카데미로 뛰어가려는 심산이었다.
“됐어. 빨리 가 봐,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돼?”
리어카에 실려 있는 내용물의 양은 만만치 않다. 원래라면 할머니 혼자서는 평지에서도 끌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정도.
“혼자서도 충분할 거 같은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머니 자신의 몸 상태가 다르다. 꼿꼿하게 펴져 있는 허리부터 탄탄해진 무릎과 다른 관절들까지, 적어도 십 년은 젊어진 느낌이랄까.
“아니, 뭐… 수업은 좀 늦어도 그만이고.”
“됐으니까 어여 가 보래도.”
송준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할머니가 빨리 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그제야 발을 떼었다. 그러고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인사를 하고는 언덕길을 후다닥 내려가는 송준우.
말하던 것과는 달리 내심 조금해했던 것인지 내딛는 발걸음이 빠르다. 그의 할머니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많은 게 바뀌었구만.’
딱히 형편이 크게 나아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웃을 일은 많아졌다. 아픈 곳도 거의 사라졌고, 정신적인 여유도 생겼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손주 녀석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너무 기쁘다 못해 감사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와 손자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살던 이웃들도, 하나둘씩 서서히 건강해져 가는 것이 보인다. 단순히 육체적인 부분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말이다.
“참 고마운 일이야.”
몸이 성하지 못하면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진다.
뭐라고 할까… 머릿속이 탁해진다고 할까, 생각과 시야의 폭이 좁아진다고 할까. 적어도 그녀가 직접 늙어 가며 느껴 보고 관찰해 본 바로는 그러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아픈 곳이 늘어가고, 햇수가 지나갈수록 기운이 빠지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주변을 돌볼 여유도 없어지게 되고…….
이웃들이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이다 보니 누구 한 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러다 보니 동네도 점점 낡아 가고, 분위기도 점점 삭막해지고…….
노후화된 동네에는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할까.
허나 그 자연스러운 수순에 변화가 생겼다.
한 안마 학원에서부터 시작된 변화.
수강생들이 실습을 하는 데 보조가 필요하다며 사람들을 초대하더니, 거기서 안마를 받고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진 것이다.
몸이 편안해지니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하니, 적막하던 골목의 풍경과 동네의 분위기까지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동네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고, 그 이후 계속해서 살아왔던 이 동네. 어디 갈 곳도 없고, 이대로 동네와 함께 서서히 늙어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와중에 이런 변화가 찾아오니, 기묘할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리어카를 끌며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 리어카에 실려 있는 짐은 꽤나 양이 많았음에도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 * *
조용하게 적막이 깔려 있는 한 회의실.
대청그룹의 건물 안에 위치해 있는 이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둘러앉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흐음…….”
그 적막을 깨트린 것은 한 남자의 침음 소리였다. 공간이 넓어 소리가 울린 탓일까, 아니면 그 전까지 이어진 침묵 때문일까, 그의 침음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 정도군요.”
방금 전에 침음을 흘렸던 남자, 마르케시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서운하다기보다는, 본인이 낙심했음을 표현하고자 약간 연기 톤이 가미된 그런 목소리였다.
“아니, 강 원장님께서 직접 안마사들을 양성하고 있으셨다니! 어떻게 그걸 저한테 안 알려 주고 비밀로 하실 수 있으십니까?”
“딱히 비밀로 한 건 아닙니다만…….”
마르케시의 말에 강태한은 머쓱한 웃음을 흘리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대로의 일이었다. 비밀이라고 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방금 장 사장에게 처음으로 들었다고요! 서운합니다, 서운해!”
마르케시는 또다시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말했다.
요 근래에 강태한이 안마를 가르치는 아카데미를 새로 세웠고, 거기에다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강습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르케시는 이렇게 보란 듯이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장난스러운 느낌이긴 했으나, 아쉬워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하하, 이것 참. 미스터 마르케시께서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면 강 선생님께서도 말씀을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딱히 비밀이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청그룹의 사장, 장태현이 두 사람을 차례대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레 중재가 들어오는 느낌.
“그런데 그건 그렇고, 미스터 마르케시가 이렇게까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아쉬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하하.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르케시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도! 본국에서 안마를 받고 싶단 말입니다!”
마르케시의 본국이라 하면, 인도를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도에도 안마사는 있다. 하지만.
한번 침대에서 잠을 자 본 사람은 맨바닥에서 자는 것이 영 만족스럽지 못한 법이다.
물론 딱 맞는 비유는 아니긴 했다. 강태한과 다른 일반 안마사의 솜씨 차이는, 침대와 맨바닥의 만족감보다 몇 배는 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마르케시는 이제 천마안마의 안마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선호하는 것은 당연히 강태한의 천마 코스고, 여의치 않으면 다른 안마사들의 안마라도 나쁘지 않다. 특히 장인 코스의 안마사들 솜씨는 마르케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정도까지 올라와 있다.
허나 한국에 직접 찾아와 안마를 받는 건… 예약 문제도 있고, 스케줄적인 면에서도 한계가 있다. 안마 의자, 더 마스터로 아쉬움을 달랜다고 해도 거기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강태한이 안마사들을 육성한다면.
인도에 천마안마의 분점을 만들고, 거기에 안마사들을 고용하여 영업을 할 수 있다면!
“그럼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일단은 사업적으로도 대박 아이템이고, 무엇보다 자기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안마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는 사업적인 의미와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물론 보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후자 쪽이 더 짙었지만 말이다.
“으음. 그 말씀은, 인도에 천마안마의 분점을 세우고 싶으시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강 선생님 의견은 모르겠지만,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일단 머나먼 타국까지 가서 일을 할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당연한 말이지만, 대청그룹도 다양한 나라들에 해외 지부들을 두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은근히 고역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고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하지, 머나먼 타국까지 가서 고생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더라도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도 아예 거기서 눌러 살려는 사람이 아니면 장기 근무 할 사람을 찾기가 힘든데… 하물며 인도라면 길게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하긴, 그것도 그런가… 정말 좋은 조건을 내어 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마르케시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정작 강태한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뭐, 사실… 오늘 마르케시 씨가 한번 만나자고 하셨을 때,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던 내용이에요.”
“…예? 정말입니까?”
욕심을 버린 듯 소파 등받이에 늘어지듯 등을 기대고 있던 마르케시. 그랬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인도까지 와 줄 안마사들이 있다고요?”
“흐음. 글쎄요.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그럼 대체……?”
“간단한 이야기죠.”
강태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르케시 씨가 그쪽에서 사람들을 뽑아 저희 아카데미로 보내고, 여기서 강습을 받아 다시 돌아가는 거죠. 물론, 현지에 저희 분점도 내고 말이죠.”
여기서 해외로 나갈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면.
그 반대의 방향으로 사람을 구하면 그만이다. 강태한의 말에 마르케시는 화색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