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74화
“그게 정말인가?”
“네. 그렇게 연락이 왔네요.
감독의 말에 베네릭은 감정이 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 자체에 감동이 배어 나오는 듯한, 굉장히 촉촉한 목소리였다.
한때 그에게 절망감까지 안겨 주었던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해결이 되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꿈만 같은’ 상황이었으나, 아내가 이런 걸로 농담을 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저, 감독님, 죄송한데 혹시…….”
“아아. 걱정하지 말라고. 어차피 오늘 원래 예정되어 있던 장면들은 다 뽑아 놓은 상황이니까.”
조심스레 물어보는 베네릭의 말에, 감독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다.
베네릭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이미 촬영이 끝난 상황이었고, 그것도 굉장히 마음에 들게 뽑혔으니까.
물론 촬영해 놓은 영상을 간단하게 훑어보고 미흡한 부분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재촬영을 할지 말지 검토하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오늘 촬영은 ‘그럴 필요가 없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
“지금 당장 아내한테 가고 싶은 거지?”
“…예. 좀 푼수 같지만, 이해 좀 해 주시겠습니까.”
“푼수 같기는 뭘. 아내한테 안부나 전해 줘.”
베네릭은 주변에서 꽤나 평판이 좋은 배우였었다. 자칫 싸늘해지기 쉬운 촬영장 분위기도 잘 이끌어 주는 편이고, 스태프들은 물론 소외되기 쉬운 단역배우들을 잘 챙겨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본인도 무명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힘든 심정을 잘 알고 있다나. 그 덕분인지 베네릭의 미담은 할리우드 곳곳에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실제로 정식 인터뷰 같은 데서도 자주 언급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요 근래 베네릭의 근황은 스태프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딱 봐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던 데다가, 그렇게 밝았던 사람이 침울해져 있으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일 생각은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가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베네릭 씨!”
“아빠가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감독이 보채듯이 등을 떠밀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도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넸다. 베네릭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감사합니다. 다음에 뵐게요!”
“그래그래. 아내랑 행복한 시간 보내라고.”
감사 인사를 마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촬영지를 떠나가는 베네릭.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감독은, 입가를 감싸 쥐고는 나지막하게 침음을 흘렸다.
“흐음…….”
“왜 그러세요? 감독님.”
“방금 웃을 때, 참 괜찮았지.”
주변 사람들의 축하에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다, 이내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온 그 모습. 평소 덤덤한 중년의 이미지를 보여 주던 베네릭이라 그런지 더욱 희소하게 보인다.
“그 표정이 촬영할 때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물론 이번 촬영은 굉장히 만족스러웠으나, 그래도 방금 전 장면에서 그 얼굴이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영화감독다운 의견을, 그는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에이, 저런 걸 어떻게 연기로 뽑아내요.”
“하긴 뭐 그렇기는 하지.”
본인도 진심으로 말했던 것은 아닌 듯, 감독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저런 부분 하나하나에 욕심을 들이게 된다면 평생에 영화 한 편도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저런 종류의 표정들은 연기로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닐뿐더러,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몇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것들이니까.
“하아… 근데 새삼 아쉽네.”
그러고 나서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그다음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가 한참인 촬영장에서, 감독은 한숨을 내뱉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베네릭 씨 표정 연기?”
“표정……? 아니, 그거 말고.”
스태프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안마를 어디서 받고 왔다는 건지…….”
매일매일 넘쳐나는 기운.
부족할 일은 ‘절대로’ 없을 정도.
그리 길게 대화를 한 건 아니었으나, 베네릭이 말한 몇 마디들은 그의 기억에 자리를 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아, 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서서히 고갈되어 가는 힘.
이 나이대 남자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 또한 ‘정력적인’ 부분에서 적지 않은 애로 사항과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몸에 좋다는 걸 이것저것 챙겨 먹어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수준.
그런 상황이었기에 베네릭의 이야기는, 더군다나 실제로 불임이 해결되기까지 한 이 상황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 * *
휴일 날 강태한과의 갑작스러운 등산 및 수련회 코스를 마치고 난 이후. 금요일.
“스으으… 후우우우…….”
“후우웁, 하아아.”
천마안마의 휴게실에선 다소 요란한 숨소리들이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이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탓이었다.
“왜 한두 명도 아니고 갑자기 다들 저런다냐…….”
“그러게요. 게다가 분위기도 좀 달라졌어요.”
원래도 마냥 늘어져 있기보다는 약간 진지한 분위기이기는 했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모습은 뭐라고 할까… 휴게실이라기보다는 어딘가의 수련원 같은, 그런 느낌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물론, 모든 안마사가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 일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요일 날 강태한과 함께 산을 오르러 갔었던 안마사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이, 박씨. 무슨 심경의 변화야?”
한참 동안 명상에 들어가 있다가 방금 막 빠져나온 박우선 안마사. 그새 식어 있는 칡차 한 모금을 마시려는 찰나, 다른 안마사가 그에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음? 심경의 변화라니?”
“아니. 갑자기 진지하게… 는 아니고, 약간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도 말이야.”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던 것은 원래부터 그랬던 부분이다. 천마안마에서 일하는 안마사 중에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이는 없다.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들 바뀌었다. 강태한의 영향이었다.
다만 지금 휴게실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는, ‘다들 진지하다’ 정도로 설명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라고 할까, 다들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뭐… 그야 바뀔 만도 하지.”
한편, 그런 동료의 질문에 박우선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뿌듯함과 만족감 그리고 자부심 같은 것들이 섞여 있는 묘한 미소였다.
“보이는 시야가 달라지게 됐으니까.”
그날, 강태한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갔을 때.
그는 대기 중에 떠다니는 영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껴 보았고, 호흡으로 내공을 쌓는 느낌을 실제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기감의 방향을 바깥으로 돌려 외부의 기운을 직접 탐지해 보기도 했다.
더군다나 저녁 식사로 먹었던 멧돼지 바베큐…….
고기 자체도 누린내 하나 없는 환상적인 맛이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기운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좋은 걸 먹고 자라서 그렇다나.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한 게, 영기가 충만해진 산에서 약초, 나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캐먹었을 것이고, 그 몸에는 그 기운이 한껏 응축되어 있었을 것이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말하는구만?”
“깨달음이라… 어떻게 보면, 그런 셈이지.”
거기에다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에는, 강태한이 직접 명상을 하고 있는 안마사들을 찾아다니며 따로 강습을 해 주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 냈다. 화요일까지만 해도 기감만 열려 있을 뿐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몰랐었지만, 지금의 그는 상대방의 몸 상태를 읽어 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영역에 이르렀다.
비록 하룻밤 동안의 짧은 특훈이었지만, 특훈에 참가한 이들은 그것만으로도 몇 단계는 성장해 내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영향은 안마사들이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흐어억… 주 선생, 오늘은 평소랑, 뭔가 다르네?”
“그런가요? 어떻게 다른데요?”
“뭐랄까, 막 안쪽 깊숙이까지… 끄흑! 눌러 주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자극이 확! 온다고 할까. 끄헉! 예전보다 솜씨가 확 늘어난 느낌이야…….”
특훈을 통해 기감을 다루는 것에 능숙해졌고, 이를 통해 외부의 기운을 감지해 본 경험도 생겼다.
이런 부분들은 손님에게 안마를 할 때에도 고스란히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손님들의 만족도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이야… 황 실장! 내가 여기 올 때마다 안마사들 실력이 조금씩 늘어나는 걸 느끼고 있기는 했었는데, 오늘은 진짜 유별날 정도구만.”
“이 정도면 일반 코스도 예전의 장인 코스 정도의 만족도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 변화의 폭이 역동적이었던 덕분일까.
손님들의 긍정적인 피드백 또한 곧바로 튀어나온다. 생각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 황 실장은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이야, 역시 태한 씨라니까. 이게 진짜로 되네.”
“어떤 게요?”
“저번에 말한 거 말이야. 가게 안마사들 실력을 좀 확 올렸으면 좋겠다니까, 진짜 하루 만에 올려 왔네.”
방금 막 안마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온 강태한.
그가 들어오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는 황 실장의 말에, 강태한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다 한 것처럼 들리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뭐 굉장히 좋은 환경을 마련해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각자 성취를 이뤄 낸 건, 각자가 그만큼 진지하게 수련을 해낸 결과인 거죠.”
스스로 갈고닦기에 수(修).
직접 행해야만 하기에 행(行)이다.
수행에 있어 타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조언을 해 주거나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뿐. 말하자면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사다리를 놔주는 것 정도다. 결국 그 사다리를 올라가는 건, 본인의 의지다.
물론 직접 혈과 혈을 맞대고 내공을 때려 박아 넣어 강제로 힘을 키워 주는 방식도 있기는 하다만… 적어도 지금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명상을 하고 있는 개개인에게 강습을 해 주긴 했으나, 조언 정도만 했을 뿐이지 따로 기를 불어넣어 주거나 한 일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흐음…….”
다만 그걸 듣고 있는 황 실장으로선 그저 겸손의 말로 들릴 뿐이다. 사다리를 오르는 건 본인의 의지라고 하지만, 반대로 사다리가 없으면 아무리 의지가 불타올라도 이렇게 쉽게 올라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뭐, 태한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강태한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뿐이다. 그는 옆에 내려 둔 컵을 들고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똑똑.
그때쯤, 조용하게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 실장이 슬쩍 강태한의 눈치를 살피자,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오세요.”
노크에 답하는 황 실장의 목소리.
이야기가 도중에 끊어진 참이었기에 방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허나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적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실례하겠습니다, 원장님!”
“원장님, 물어볼 게 있어서 좀 왔는데요.”
“아, 밀지 마! 문도 좁은데 왜 미는 거야?”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우수수, 대충 어림잡아도 예닐곱 명 정도가 한 번에 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 그들은 다름 아닌 천마안마의 안마사들이었다.
“그…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다들.”
“아니, 그 다른 게 아니고…….”
강태한이 물어보자, 안마사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가장 맨 앞에 서 있는 안마사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에 수요일에 쉬는 안마사들과 등산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랬었죠.”
“혹시 다른 요일에는 가실 예정이 없으신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 말이죠!”
아하.
그 말에 강태한은 대강 상황을 파악하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찾아온 안마사들은, 모두 수요일 날 특훈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의욕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
조바심과 설렘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강태한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개중에는 눈빛에서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이도 있다. 그 모습들에 강태한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