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69화
“…어이, 캘리버. 너 정말로 뛰어도 괜찮겠어?”
“무리하는 거면 그냥 들어가지 그래.”
관객들의 환호에 대한 호응을 마치고 필드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앞서 먼저 나와 있던 다른 동료들이 그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씩 건넸다.
“흐음. 걱정은 고맙지만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있나? 경기장에 나와 보니 더 괜찮은 것 같은데? 마치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아 본 것처럼 말이야.”
캘리버는 가볍게 발을 구르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이 마냥 빈말은 아닌 듯 몸놀림이 제법 가벼워 보였다.
“오히려 지난 시즌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캘리버가 미국에 도착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고, 그가 이 경기에 쿼터백으로 등판한다는 것도 불과 몇 분 전에 변경된 사항이었다. 경기에 참가하고 싶다는 캘리버의 강력한 의사 표명으로 말이다.
“왜, 내가 발목이라도 잡을까 봐 걱정돼? 쉬는 동안 전략이랑 패스 루트도 다 잊어 먹었을까 봐?”
“그럴 리가. 하지만…….”
캘리버의 말에 팀의 주장, 세드릭 로퍼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캘리버는 팀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쿼터백이자 전략의 중심이었다.
아마 일 년이 아니라 오 년 만에 복귀를 한다고 하더라도, 캘리버는 쿼터백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낼 것이다. 이 마이애미 헤비나이츠라는 팀에서 캘리버라는 인물은 그 정도의 신뢰가 있다.
“내 말은 굳이 뛸 필요는 없지 않겠냐, 하는 거야.”
다만 그렇기에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중요한 핵심 인재인데, 무리하게 복귀를 했다가 다시 몸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훨씬 더 큰 손해일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공식 경기도 아니고, 시즌 개막 앞두고 자선 활동을 겸해서 열리는 친선경기잖아.”
오늘 경기는 지역 내 불우한 환경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단체와 시설들에 대한 기부를 촉진시키고자 편성된 친선경기다.
물론 이 또한 엄연한 공식 일정이고 지역사회에 적지 않게 이바지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경기지만, 그래도 친선경기인 만큼 어느 정도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NFL 리그의 경기도 아닌데, 아직 불안한 상태의 에이스를 굳이 내보낼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허나 그 말에 캘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복귀한 모습을 보여 주기에는 이런 자리가 더 좋지 않을까 싶네. 친선경기인 만큼 저쪽에서도 태클은 살살해 줄 것 같고. 그리고… 내 팬들도 내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고.”
“…뭐, 그것도 그렇기는 하네.”
그 말에 세드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캘리버는 이런 경기에서는 오히려 꼭 얼굴을 내비치려 했던 이상한 놈이다.
필드에 얼굴을 비출 일이 적은 2군 선수들이라면 모를까, 1군 선수들은 대개 이런 친선경기들에 나오기를 꺼려 하는 편이다. 헌데 캘리버는 반대로 이런 경기는 반드시 빠지지 않고 개근해 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모범생 같은 스포츠 스타.
얼핏 양립되기 어려워 보이는 두 단어였으나, 캘리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적어도 세드릭이 알고 있는 녀석 중에 이런 녀석은 또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애초에… 어차피 오늘 태클이 들어올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 아무리 친선경기라고 해도 저쪽에서 그렇게까지 힘을 빼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세드릭의 말에 캘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선경기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미식축구는 미식축구고, 상대 팀은 자신들과 같은 NFL 팀이다. 서로 평소보다 힘을 좀 빼고 한다고는 하지만, 경기의 내용이 과격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아니다, 됐다.”
그가 답하려던 찰나, 스태프들의 신호가 눈에 들어왔다. 세드릭은 적당히 말을 끊고는, 필드의 중앙으로 걸어가 상대편 주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짧은 개회사와 몇 가지 절차 그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 끝마치고 난 후, 곧바로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캘리버는 세드릭이 아까 무엇을 말하려 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팀 라인이 이렇게 단단했었나?”
미식축구의 공격의 핵심은 쿼터백이고, 그렇기에 수비 측 라인은 쿼터백을 뭉개 버리기 위해 달려든다. 그리고 공격 측 라인은 쿼터백이 공을 던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것이 그 격렬한 라인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다.
다만 그렇게 라인이 버텨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결국 그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고려하여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이 쿼터백의 역할이다.
헌데… 라인이 무너지지 않는다.
슬슬 압박감이 밀려올 시간인데, 그럴 기미가 하나도 없다. 흔히 미식축구의 라인맨들을 성벽에 비유하곤 하는데, 말 그대로 그런 느낌이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녀석도 강 선생님한테 안마를 받았었구나, 하는 사실이 말이다.
미식축구는 힘과 힘이 서로 맞부딪치는 시합이고, 라인맨들의 싸움은 더더욱 그러하다. 약간의 피지컬 차이에도 승패가 결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컨디션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더불어 피지컬적인 부분에서도 한차례 업그레이드를 거친 헤비나이츠는, 이전과 비교했을 때 팀의 기량 자체가 몇 단계 정도는 올라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정도 상황이면 뭐… 고등학교 쿼터백을 불러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게임이 끝나겠구만.”
쿼터백으로서는 편안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상황이다. 캘리버는 느긋하게 패스 루트가 확보되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패스를 던졌다.
그날, 마이애미 헤비나이츠는 같은 NFL 소속의 메사추세츠 아르마딜로스를 상대로, 쿼터백을 향한 태클을 단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은 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냈다.
* * *
“그… 계십니까?”
천천히 열린 문틈 사이로 한 노인이 고개를 내밀더니, 조심스레 로비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예.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여기 동네 노인회 회장을 하고 있는 김춘수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원장님에게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만…….”
직원의 응대에 노인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간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도 쑥스러워하는,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모습이 무색하게, 노인의 말을 들은 순간 직원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환대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원장님에게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 다른 일행분들은 아직 안 오신 건가요?”
“아뇨, 지금 뒤에 다 와 있습니다. 여보게들, 괜찮으시다고 하니 다들 들어오라고.”
노인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하자, 다른 노인 세 명이 차례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 곳인데.”
“그러게. 하긴, 내가 가 본 안마원은 동네 찜질방에 있던 곳밖에 없긴 했지만 말이야.”
그들은 처음 들어왔던 노인과 마찬가지로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가게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말끔한 내부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거… 이런 데서 우리가 젊은이들 시간을 뺏어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노인들은 하나같이 깔끔한 복장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기만 해도 나름대로 복장에 신경을 썼다는, 되도록 예의를 차리고자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뜻이다.
“무얼. 우리가 그냥 다짜고짜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와 달라고 해서 온 건데.”
“맞습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희가 초대를 한 입장이니까요.”
가장 체격이 큰 노인이 그렇게 말하자, 미소를 짓고 있던 직원이 동조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안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바로 안내를 좀 해 드릴까요? 아마 곧바로 안마를 받을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시지요.”
김춘수는 동의를 구하듯 다른 노인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은 안마복을 입고 각자 침대에 누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곳이구먼그래.”
“왜, 어떤 걸 생각했는데?”
“아니, 이것보다는 좀 후줄근하고… 최씨도 알다시피, 이 건물 자체가 오래됐고 가게가 들어와도 오래 버틴 적이 없잖여. 이번에도 오래 못 가고 금방 사라지는, 그런 가게인 줄 알았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노인들도 그 말에 공감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거여. 인테리어에 금칠 좀 했다고 어디 안마사 솜씨까지 좋아지남? 하물며 여긴 그냥 학원이라면서. 시원찮을 게 뻔하지, 뭐.”
“어허, 최씨. 젊은이들이 시간 내줘서 공짜로 받는 입장인데, 그런 속 좁은 소리 할 거여?”
최씨 노인의 말에 가장 연장자이자 이번 일을 수락한 노인회 회장, 김춘수가 꾸짖듯이 말했다. 약간 노한 기색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애초에 연습 상대라고 한 만큼 김 형 말대로 별거 없이 시원찮기는 하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겠어?”
“…김 형 말이 맞구만. 내가 미안하이.”
평소에는 나긋나긋한 성격이지만, 경우가 없는 행동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김춘수 노인이다.
물론 그 범위에는 친한 지인들까지도 포함되며, 오히려 더 엄한 잣대가 적용된다. 그 성격을 아는 최씨 노인은 곧바로 사과를 입에 담았다.
다만, 방금 전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김춘수 노인조차도 안마의 수준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냥 흥미가 가는 괜찮은 심심풀이 정도.
이곳에 온 노인들은 ‘노인정에 앉아 장기나 두고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근데… 거기 누구야, 준우 있는데.”
“준우면, 송준우? 박씨 할멈네?”
“그래. 거기 할멈이 그렇게 칭찬을 하던데? 그때 안마 한번 받은 이후로, 아직까지 무릎이 욱신거린 적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 그 사람이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어제 보니까 동네 언덕길도 쑥쑥 올라가더라고. 리어카도 끌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시점에서 유일하게 안마를 받아 본 이의 소감과 그녀와 관련된 목격담을 나누고 있던 찰나.
“기다리셨죠?”
아카데미의 원장, 최성현이 들어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그는 이곳의 수강생으로 보이는 안마사 네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수업이 정리가 덜 되어서요.”
“아닙니다, 원장님. 침대가 참 뜨뜻~ 한 것이, 이대로 반나절은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최성현은 소소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침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우선은 김춘수 쪽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춘수의 등 위에 최성현의 손이 올라왔다.
그 순간, 뭔가 저릿하는 느낌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손이 올라간 등뿐만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곳까지 흘러들어 가는, 그런 자극이었다.
“흐읏!”
마치 오랫동안 굳어 있던 사막에 물 한 줄기가 흘러들어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느낌에 김춘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최성현의 손은 다른 부분들도 차례차례 짚어 가기 시작했다.
“허리 쪽이 좀 많이 뭉치신 거 같고… 평소 불필요한 상황에도 어깨에 힘을 주는 경우가 잦으신 모양이네요. 이쪽은 관절도 좀 안 좋으시고…….”
이곳저곳을 짚어 가는 동시에, 필요하다면 가볍게 주무르거나 툭툭 혈을 짚어 낸다. 얼핏 보기에는 성의가 없어 보일 정도로 무심한 동작이었으나, 그때마다 노인의 입에선 어울리지 않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얼추 몸은 풀어 드린 것 같고… 성대환 씨?”
“네, 원장님.”
“근육은 등이랑 허리 위주로 풀어 드리고, 혈은 신주(身柱)혈을 중심으로 양옆 어깨 쪽 혈들을 짚어 드리면 될 겁니다.”
최성현이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사전 작업이다.
말하자면 감각을 미리 깨워 뒀다고 할까, 혈도를 예열시켜 두었다고 할까. 몸 상태를 확인하는 동시에 뒤에 이어질 안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다.
“저번에 따로 질문하셨던 내용을 생각하면서 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특히 혈들을 짚을 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아 곧바로 이어지는 안마.
비록 최성현에 비하면 솜씨는 한참 뒤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미 혈도의 순환이 활성화되고 감각도 한층 증폭되어 있는 상태다. 그 덕분일까.
“어억, 억… 으하아아…….”
본격적으로 힘이 들어간 안마가 시작되고, 뭉쳐 있던 근육들이 하나둘씩 풀어지자, 김춘수의 얼굴에 마치 녹아내린 것처럼 노곤한 미소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