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66화
“세아 씨, 이번에 뭐 새로운 배역 맡으셨어요?”
방금 한 모금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강태한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유세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아뇨? 근데 왜요?”
“그새 살짝 얼굴이 좀 홀쭉해지신 것 같아서요. 일부러 체중 감량이라도 하신 건가, 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살짝 야윈 느낌이 드는 수준에 가깝다. 유세아는 본인의 뺨을 더듬듯 어루만지더니,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우인 만큼, 본인의 체중이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저도 잘 모르겠네요. 요즘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그래요?”
그와 동시에 강태한의 눈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정밀하게는 아니어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대강 살펴보기 위함. 허나 그렇게 보아도 딱히 이상이 있는 부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흐음. 왜 입맛이 없으시지?”
“…뭐, 요즘 입맛이 없을 만하기는 했죠.”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짝 뾰로통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요 며칠간 어느 분의 카톡 답장을 기다리느라고 잠을 좀 자주 설쳤거든요.”
“하하… 그건, 뭐.”
강태한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말하는 며칠간은 천마안마의 휴가 기간 동안을 말한다. 그리고 그동안 강태한은 아버지와 미국을 돌아다니느라 아무래도 유세아에게 신경을 덜 쓴 부분이 있었다.
“푸훗, 장난이에요.”
다만 직후 유세아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본인의 입을 가리며 한참을 더 킥킥거렸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버지랑 여행을 갔으면 아버지에게 집중을 하는 게 맞죠. 설마 제가 그런 걸로 서운해하겠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 어찌 됐거나 여행 기간 동안 연인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고, 자기가 좀 더 신경을 쓸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유세아는 괜찮다고 했으나 연인으로서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그런 부분을 이해해 준다고 하니.
강태한으로선 아무래도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그런 멋쩍은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식욕이 없었던 건 사실이에요. 이전에는 작품 찍는다고 못 봐, 요 며칠간은 다른 쪽이 여행을 가서 못 봐, 한참 동안 태한 씨를 못 보니 일상생활에서 힘이 잘 안 나는 거 있죠?”
유세아가 살짝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마냥 빈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강태한과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도, 그것 때문에 활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흐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기는 하죠.”
“그렇죠? 보고 싶은 마음이 쌓여서 일상에 지장이 생길 만도 하죠?”
유세아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단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 유도해 내려는 듯한 뉘앙스였다.
예를 들면, 그 마음을 충족시켜 줄 대안이라든가.
그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러는 건지는 대강 짐작이 가고 있었기에, 강태한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까요?”
“네? 음… 어디서요?”
“글쎄요. 일단 여기서 커피 다 마시고, 영화 보고, 세아 씨가 찾아 놨다는 곳에서 저녁도 먹고…….”
강태한은 일정을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 냈다. 이미 사전에 준비되어 있던 데이트 플랜을 모두 언급한 이후, 그는 유세아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미국에서 사 온 선물을 못 가져왔는데, 겸사겸사 그거나 가지러 가실래요?”
“그게 어디에 있는데요?”
“그야 뭐, 제 자취 집에 있죠.”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는 짐짓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짐짓 그러기만 할 뿐, 정작 입꼬리가 조금씩 위쪽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표정이었다.
“흠흠, 그러면 오랜만에 태한 씨네 집이나 갈까요! 마침 앱플릭스에 보고 싶은 영화도 있었으니, 영화나 한 편 같이 보면 되겠네요.”
“밖에서 영화 보고 들어가는데 또 보게요?”
“그럼 드라마!”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는 곧바로 답하며 빠르게 정정했다. 그러다 이내 너무 속 보이는 짓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쑥스러운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슬슬 편하게 들락거릴 만도 한데 말이지.’
유세아가 강태한의 집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다 돌아가는 건, 이제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말 그대로 ‘이제 와서 새삼?’이라는 느낌인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유세아는 지금도 종종 이런 모습들을 보이곤 했다.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한다기보다는, 아직 쑥스러워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뭐…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만.’
그냥 향간에 퍼져 있는 흔하고 상투적인 말들이나 표현들을 떠나서, 매번 강태한의 집에 오고 싶을 때마다 명분이나 구실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저 귀엽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계획대로 되었을 때, 살짝 쑥스러워하는 모습과 함께 활짝 피어오르는 미소도.
“다음에는 같이 여행도 가요.”
“네? 아, 캠핑이요?”
강태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캠핑도 가고, 해외여행도 같이 가고. 최근 일 때문에 해외를 두 번 다녀왔는데, 여행 도중에 세아 씨 생각이 종종 나더라고요.”
“어, 그건 뭐… 저도요.”
어딜 갔는데 그쪽 생각이 나더라.
연인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호감 단계에 있는 남녀 사이라도 흔하게 오갈 만한 말이다. 허나 그 진중한 목소리와 눈빛 때문일까, 유세아는 괜스레 볼을 붉히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음에 서로 시간 나면, 짧게라도 다녀오죠.”
“…좋아요.”
시선을 피하고 있던 유세아는 슬쩍 고개를 들더니,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강태한도 미소를 지었다.
* * *
“…아니, 왜 벌써 시간이 이래?”
고개를 들어 슬쩍 시계를 쳐다본 최성현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이내 난처한 기색이 담긴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상대에게 사과를 건넸다.
“실장님, 이거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응? 아냐, 아냐. 원래 내 업무인데, 뭐.”
이곳은 천마아카데미의 원장실.
원래라면 황 실장이 와 있을 이유가 없는 곳이지만, 지금은 최성현의 부탁으로 찾아와 함께 서류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내가 직접 한번 둘러볼 필요도 있었고.”
“그야 그렇긴 한데… 시간이 벌써 열 시인데요.”
새벽까지도 노는 일이 잦은 이들에게는 딱히 늦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들도 퇴근 시간이 열 시라고 하면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황 실장은 안마원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다시 여기에 와서 일을 시작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최성현으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미안하면 처음부터 오라고 하지를 말지.”
“아니, 그야 뭐… 그렇기는 한데.”
최성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대로, 서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황 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최성현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미 오라고 했으면, 그냥 떳떳하게 있어. 애초에 거의 다 끝나기도 했고.”
“음… 뭐 좀 더 도와드릴까요?”
“넌 하고 있는 입력 작업이나 마저 해라. 괜히 이상한 거 건드려서 일 키우지 말고.”
황 실장의 말에 최성현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이미 비슷한 사례들을 몇 차례 겪은 탓이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 있었을까.
“아으, 끝이다, 끝!”
“오래 있기는 했네. 올 때까지만 해도 약간은 해가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남아 있던 업무를 마친 두 사람은 문단속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다 퇴근을 한 상황이었기에 나가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너 뭐 타고 돌아 가냐?”
“저 지하철이요. 실장님이 태워 주시게요?”
“아니? 차 안 가져왔는데.”
황 실장의 말에 최성현이 표정을 찡그렸다.
“아, 왜 안 가져오셨어요. 사실은 스리슬쩍 실장님 차 얻어 탈 생각에 싱글벙글하고 있었는데.”
“그것 참 안됐네. 너는 차 안 사냐?”
“저요?”
“그래. 너 이제 은근 페이도 많이 받잖아. 어지간한 중형차 한 대 정도는 중고로 뽑을 만한데?”
“차를 산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운전 실력까지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저 완전 장롱면허인데. 면허 딴 이후로는 범퍼카도 몇 번 안 타 봤어요.”
황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하고 있던 내용과 상반되는 이야기가 나온 탓이다.
“너 예전에 친구들이랑 제주도 가서 렌트카 몰아 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죠. 그날 이후로 부모님이 아프기라도 한 게 아니면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는 결심도 했고요. 이건 같이 탄 친구들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어지간히 못했나 보네?”
“우회전하다가 인도 위로 올라갔거든요.”
“으하…….”
그런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두 사람.
둘 다 지하철을 타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언덕에 있는 오래된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 뭐 고민거리 있다 하지 않았냐?”
“아, 그거요?”
황 실장의 말에 최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마사들끼리 서로 연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실전처럼 연습을 할 수 있는 연습 상대가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음… 가게에서 강습할 땐 그런 게 없었잖아?”
“그렇죠. 하지만 그땐 손님들을 받았으니, 어지간하면 지속적으로 실전의 기회가 있었잖아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황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안마원에 수강생들 손님을 따로 받으면?”
“그것도 무리가 있죠. 현역으로 일하고 계신 분도 있고 당장 안마사로 투입되도 괜찮으신 분들도 있지만, 약간 부족하신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것도 그렇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양성하려고 준비한 게 아카데미였으니까. 황 실장은 그 말에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렇다고 거기 안마사들이 실력이 엄청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 나름 태한 씨가 엄선해서 뽑은 걸로 아는데?”
“그렇죠. 그냥 당장 안마원에서 시작하기에는 좀 부족한 점들이 있을 뿐.”
최성현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쯤이었다.
“아이구구구!”
이제 막 들어서기 시작하는 교차로.
그중 왼쪽 언덕길에서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한참 위쪽에서 넘어진 할머니와, 언덕길을 굴러떨어지고 있는 리어카가 보였다.
“준우야, 위험하니까 리어카 그냥 놔!”
할머니의 시선은 리어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 뒤쪽이다. 점점 속력이 붙어 가는 리어카의 뒤편에는, 어떻게든 리어카를 세워 보려는 듯이 어린 남자아이가 한 명 매달려 있었다.
“저거, 저거, 저거 어떻게 하냐?”
순간 당황한 황 실장이 횡설수설하며 발을 움직였다. 일단 리어카가 굴러올 듯한 방향으로 몸을 옮기기는 했으나, 딱히 방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잘은 몰라도 리어카는 굴러오는 모양새만 봐도 제법 중량이 있어 보였다.
“실장님은 물러나 계세요.”
그리고 최성현은 그 말을 남기더니, 황 실장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훌쩍 앞으로 나섰다.
아니, 그냥 앞으로 나서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언덕길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더니, 한참 가속이 붙은 리어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최성현, 인마!”
뒤늦게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쫓아가는 황 실장.
허나 그 반응이 무색하게, 최성현은 흔들리며 떨어지던 리어카를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속도에 맞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정도 내려갔을까.
“후우.”
최성현이 발을 디딜 때마다 리어카의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내 완전히 멈춰 서자, 최성현은 가볍게 긴 숨을 내쉬며 저릿한 팔다리를 털어 냈다.
“할머니 말은 잘 들어야지, 이놈아.”
그러고는 앞에 있는 남자아이,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