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58화
“어… 다음은 폴, 네 차례야.”
불과 몇 분 전.
첫 번째로 세드릭이 방을 나서고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자기를 호명하는 소리에 폴 레이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간 비틀거리는 몸짓이었다.
“오우케이! 드디어 그 안마사 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거지? 하하하!”
그 모습에 호명한 스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주변에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취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으, 계속 마시고 있었던 거야?”
“기다리고 있자니 영 지루해서 말이야. 많이는 안 마셨어. 한두 잔 정도?”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가 일어난 자리에는 반쯤 비워진 양주병이 놓여 있었다. 스태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뒤쪽의 복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가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방이야. 혼자 갈 수 있지? 아니면, 안내가 필요하려나?”
“오우오우! 그럴 리가. 노 프라블럼! 하하하.”
폴은 혀가 잔뜩 꼬여 있는 발음으로 말을 하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복도에 나오자마자 천장을 스윽 훑어보았다.
‘CCTV들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고.’
잔뜩 취한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양주 한 병을 반쯤 비우기는 했다만, 그의 주량에 그 정도는 그리 과음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양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취한 행세를 하고 있는 이유.
그 이유는 단순했다.
술김에 주먹이 나가 버렸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부 나중에 이 말을 꺼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 뿐이다.
‘뭐 아예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걸로 어느 정도는 무마가 된다. 팀에서도 시즌을 앞두고 큰 소란을 떨고 싶지는 않을 것이고, 저쪽도 여행객의 신분이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적당한 핑계 거리만 있으면 구단에서 알아서 무마를 해 줄 상황이라고나 할까.
애초에 마구잡이로 구타를 할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화풀이도 할 겸, 팔이랑 손목 몇 군데 정도만 부러트리면 그만이다. 캘리버에게 안마를 해 줄 수 없을 정도만 되면 되는 것이다.
설령 만약에 일이 좀 커진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이면 보석금 수준에서 충분히 마무리가 된다. 비슷한 폭행 사고를 이미 몇 번이나 일으켜 본 폴이었기에, 이 정도 견적은 곧바로 낼 수 있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폴 레이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헉, 허억… 꺼어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가 있는 본인의 팔을 내려다보며,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혼자서 꺽꺽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허나 자세히 살펴보면, 팔과 어깨를 이어 주는 관절 부분이 마치 소시지를 비틀어 놓은 것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으학, 내 팔, 내 팔…….”
사람은 원래 다치게 되었을 때 고통을 느낀다.
해당 부위에 이상이 생겼음을 머리에 알리기 위함이며, 최대한 빠르게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허나 그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경우.
신경은 오히려 고통을 차단해 놓는다.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이 엄청난 고통으로 인한 쇼크를 방지하는 것이 더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유예를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치 태풍이 들이닥치기 전의 고요함 같은 기괴한 김장감이 흐른다. 그 기이한 감각 속에서, 폴은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단편적인 단어들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걸 어떻게…….”
당연한 말이지만, 프로스포츠 선수를 하다 보면 다치는 일이 많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부상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다.
허나 팔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지금 상황은…….
이런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이 상태에서 팔을 움직이는 게 옳은 판단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냐뇨. 그쪽이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더니, 혼자서 붕 떠오르셨잖아요.”
한편 폴의 단편적인 중얼거림을 ‘어떻게 한 거냐’로 해석한 것인지, 강태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 미소는 왠지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드는 비릿한 미소였다. 적어도 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괜찮아요?”
“히이익!”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어보며 다른 손을 내미는 강태한. 거기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폴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몸을 움츠렸다.
그 반사적인 행동에, 그동안 강태한의 손에 고정되어 있던 팔이 떨어졌다. 고정 상태에서 벗어난 그의 팔은 힘줄마저 끊어진 것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흐아아아악! 으헉, 흐아아악!”
그 순간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 번에 찾아온 것일까, 그는 갑작스레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놀라움과 공포에 기겁하여 비명보단 웅얼거림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고통 그 자체로 인해 단말마를 내지르는 느낌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태한이라면 이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나 상태를 완화시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람을 좀 불러올게요.”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고쳐 놓을 것이라면 망가트리지도 않았으리라. 자비는 폐인으로 만들지 않고 이 정도 손속에서 끝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딱히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태한 씨, 무슨 일이십니… 어어?”
다만 강태한이 다른 사람을 불러올 필요는 없었다. 인근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리겔이 화들짝 놀라며 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 * *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흐음.”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백 번도 더 볼 수 있죠.”
리겔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화면에 나와 있는 영상이 다시 한번 재생되기 시작했다.
“물론, 백 번 봐도 이해가 될 것 같진 않지만요.”
해당 영상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CCTV에 촬영된 영상의 일부분이었다. 마이애미 헤비나이츠 소속의 폴 레이즌 선수가 안마사 강태한에게 폭행을 행하는 장면이 담겨 있는 영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술에 취한 채 다짜고짜 일반인에게 주먹을 휘두르다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가뿐하게 막히고 갑자기 혼자 공중제비를 돌더니 팔이 꺾여 비명을 내지르는, 그런 영상이었다.
“내가 보안관 생활을 좀 오래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사건의 경(輕), 중(重)을 따지자면 가벼운 편에 속한다. 어러 명이 다친 것도 아니고,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총기가 사용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개인 간에 일어난 일방적인 폭행 사건이고, 이 정도 사건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툭 하면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보안관이 당황한 것은 이 상황에 대한 조치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이 CCTV 영상에 담겨 있는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게 CCTV 필터링이 들어간 합성 영상 뭐 이런 게 아니라, 진짜 원본이라는 거지?”
“네, 맞습니다.”
“허허, 참.”
보안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 아시안 배우들의 무술 영화가 굉장히 유행을 했던 적이 있어.”
“뭐, 브루스 리나 성룡 같은 사람들이요?”
“그래. 옛날에 많이 봤었는데,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자니… 약간 그때 봤었던 영화 중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
우락부락한 미식축구 선수와 평범한 안마사.
두 사람의 몸집은, 비교를 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났다. 아마 몸무게만 재 봐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십중팔구 전자 쪽이 이길 것이다. 체급 차이부터가 몇 단계는 차이가 나는데, 평소의 운동량도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폴 레이즌이 뻗은 주먹은 너무나도 쉽게 강태한의 손바닥에 막히더니, 이내 그의 몸은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영화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현실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 선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병원에 있습니다.”
“진단은? 전치까지 몇 주 정도라고 하던가?”
“지금 상황에서 기간까지 말하기는 좀 어렵다던데요. 팔을 움직이려면 대략 적어도 반년, 예전처럼 힘을 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그나마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앞서 말했듯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허허, 참.”
“어떻게… 보안관님, 문제가 될까요?”
보안관의 옆에 앉아 있던 리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폴 레이즌이 어떻게 되건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단지 강태한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그의 업체를 고용한 건 마이애미 헤비나이츠고, 폴 레이즌은 헤비나이츠의 선수였지만, 어쨌거나 그의 업무는 강태한을 수행하는 거였으니까.
애초에 일반인에게 시비를 걸고 주먹을 휘두르는 프로스포츠 선수 따위에게 동정심 같은 건 없다.
“문제는 무슨 놈의 문제. 문제가 있었다면, 진즉에 구속을 했겠지.”
다만 보안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삿대질로 모니터의 영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저 동양인 안마사가 저 코뿔소처럼 우락부락한 거구의 현역 미식축구 선수를, 손바닥 하나로 공중제비를 돌려서 어깨관절을 탈골시켰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과정이 담겨 있는 CCTV 영상을 봐도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당사자 본인인 강태한에게도 물어봤다. 그러자 ‘나는 날아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았을 뿐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그대로의 내용인데, 거기서 뭘 더 묻겠는가.
애초에 그의 잘못이라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설령 이 모든 과정을 강태한이 한 게 맞다 하더라도, 먼저 폭력을 행사한 건 폴 레이즌 쪽이고 그는 폭력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려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사건이고 뭐고 그냥 끝이야, 끝. 굳이 둘 중에 누군가를 잡아가야 한다면, 저 팔 돌아간 양반을 데려가야겠지.”
죄가 있는 쪽을 따지자면, 먼저 술 처먹고 일반인에게 주먹을 휘두른 쪽이다. 그에 대한 대가는 이미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저 양반이 헤비나이츠 쿼터백이었지?”
“예. 맞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뛰기 글렀구만. 다시 공을 쥐어 보기라도 하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상황에 맞춰 정확한 패스를 보내야 하는 쿼터백에게, 어깨 부상은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치명적이다.
그런 와중에 전치 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운 수준의 부상이라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저, 근데 보안관님.”
그러던 와중,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 호텔에서 CCTV를 관리하고 있는 보안 직원이었다.
“이미 끝난 사건이면, 영상은 왜 자꾸 반복해서 틀라고 하셨던 겁니까?”
“뭐? 그야… 보고 또 봐도 신기하니까.”
그는 보안관으로서 충분히 직업의식을 갖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그런 그에게도 흥미와 호기심 정도는 있는 법이었다.
“…그거뿐입니까?”
“그렇지, 뭐. 흠… 좀 그런가?”
“좀 깨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네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는 직원과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안관. 그 반응을 보며, 리겔은 한차례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 * *
한편, 마이애미에 위치한 헤비나이츠의 훈련 시설.
그곳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감독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 다친 사람은 없고?”
[예. 다른 애들은 다칠 이유가 없기는 하죠. 애초에 폴 녀석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는 모양이고요.]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은 라스베이거스에 가 있는 에드윈 코치였다. 오늘 있었던 사고를 전달하던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폴, 그 자식 수틀리는 거 있으면 주먹부터 나가는 거. 불만 많아 보일 때부터 관리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주먹 휘두른 놈이 잘못이지, 그게 어떻게 자네 잘못이겠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죄에 헤비나이츠의 감독, 알베르토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이듯이 말했다.
“어쨌거나, 나도 내일 중으로 그쪽에 가겠네.”
[감독님이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가 직접 초청한 VVIP인데, 불상사가 있었으니 사과도 직접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감독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예의다. 알베르토의 말에 에드윈은 할 말이 없는 듯 입맛을 다시다 짤막하게 답했다.
[…뭐, 그렇게 하십쇼.]
“그래. 그렇다고 일정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는 말고.”
알베르토는 본인의 스케줄 표를 확인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착잡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번 시즌은 그래도 이미 훈련해 놓은 게 있으니 폴 녀석에게 힘을 좀 실어 줘 볼까 했었는데… 물 건너갔구만. 세부 전략도 뜯어고쳐야겠고.”
[갑작스러운 쿼터백 교체는 부담이 좀 크긴 하죠.]
“그러니까 말이야. 뭐, 어쩌겠나. 최대한 캘리버랑 호흡을 맞춰 보는 수밖에. 곧 완치라고 했었나?”
[예. 몸은 이미 완전히 나았다고 봐도 무방하고, 컨디션도 거의 전성기 수준입니다. 아마 지난 시즌보다 더 잘 뛸걸요.]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구만.”
감독은 종이에 메모를 적으며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폴이랑 최대한 호흡을 맞추며 천천히 캘리버를 다시 적응시킬 생각이었으나,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