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44화
“오, 태한 씨.”
그렇게 차를 좀 마시고 있었을까.
문을 열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는 강태한의 모습에, 황 실장이 손을 들어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서류 확인한다고 했던 건 다 끝났어?”
“네. 딱히 문제는 없던데요.”
황 실장의 말에 강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인근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황 실장이 찻주전자를 집어 들며 넌지시 물었다.
“차 한잔 마실래?”
“좋죠. 그래도 되나요?”
“괜찮아. 안 그래도 넉넉하게 가져왔거든.”
그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쟁반 위에는 황 실장의 것 외에 찻잔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황 실장은 거기에 차 한 잔을 따르고는, 강태한 쪽으로 내밀었다.
“그건 그렇고, 개막식도 못 봐서 어떻게 해?”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개막식이었나요?”
“아하. 아예 까먹고 있었나 보네.”
강태한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아쉬워한다기보다는, 그런 걸 깜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반응이었다. 그 반응에 황 실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태한 씨도 완벽하지는 않구만. 일정이나 약속 같은 건 한 번도 잊어버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건 좀… 약간 종류가 다르기는 하죠.”
본인이 한다고 했거나 해야 하는 일들은 반드시 기억한다. 약속과 책임을 목숨처럼 중시 여기는, 무림인 특유의 습성에 영향을 받은 탓이다.
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강태한 또한 평범하게 까먹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냥 말 그대로 평범한 인식 수준인 것이다.
“근데 뭐, 놓치면 아까운 정도였어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우리 대표단 나올 때 아는 얼굴이 주우욱 나오니까 뭔가 신기하고 그렇더라고.”
황 실장은 당시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올림픽 개막식을 몇 번이나 봐 왔는데, 예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색다른 즐거움 포인트였다.
“내가 그런데 당사자인 태한 씨는 더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었지. 태한 씨는 적어도 한 번씩은 다 본 얼굴들일 거 아니야.”
본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황 실장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강태한은 본인에게 안마를 받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활약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약간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고 할까.
다녀간 사람의 소식이 인터넷 뉴스에 올라오면 꽤나 뿌듯해하고, 요즘은 좀 뜸하긴 하지만 야구나 해외 축구를 챙겨 보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진천 선수촌에 방문했을 때, 황 실장이 알기로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 대표 선수가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아무래도 강태한에게도 나름 애착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황 실장이다.
“흐음… 그렇게 말하니 좀 아쉽긴 하네요.”
그런 황 실장의 말에, 강태한은 솔직한 심정을 입에 담았다. 담담한 목소리긴 했으나 어딘가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 * *
“근데, 넌 아까부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냐?”
“…응? 나?”
“그래, 너.”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조금 놀란 반응을 보이는 최성현. 그가 자기를 가리키며 되묻자,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뭔 일이라도 있어?”
“아니, 뭐 대단한 일은 아닌데…….”
최성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실제로도 그리 대단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래도 방금 전 상황이 계속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본인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황 실장이 알아서 커피를 타다 줬었던 그 상황.
좀처럼 납득이 가질 않는다고 할까.
황 실장은 자신이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직접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을 꺼내려던 도중에 의식해서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뭐, 혹시 아까 전음(傳音) 보낸 거 때문에?”
한편, 그런 최성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강태한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봐도 뻔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전음? 그게 뭔데.”
“네가 아까 대놓고 보냈었잖아, 자기는 차 말고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말을 했었나, 안 했었나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자기가 말을 한 게 맞는다고 해도, 강태한이 따로 엿들은 게 아니라면 들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그러면 ‘말했었잖아’라고 하지. ‘보냈었잖아’라고 말하진 않겠지, 일반적으로.’
보냈다는 표현은 문자나 무전 같은 것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지 않은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최성현은 한층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음은 말이지.”
[이런 게 전음이야.]
그 순간, 최성현의 머릿속에 강태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말을 들었는데,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곧바로 전달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엑? 어?”
당황한 기색이 대놓고 드러나는 얼굴.
그 얼굴에 강태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전음을 들으면 으레 튀어나오곤 하는, 그가 기대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기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신의 염(念)을 기를 통해 전달할 수 있게 되거든.”
기를 어느 정도 운용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의 생각, 감정, 그런 것들을 기(氣)를 통해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살기를 내뿜어 상대방을 제압한다거나, 위압감을 증폭시켜 좌중을 압도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활용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좀 더 구체적인 의사를 담아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곧 전음이며, 최성현을 고민에 빠트린 것의 정체였다.
“…내가 그런 걸 했다고?”
“전음이라기엔 굉장히 거칠었지만, 하긴 했지.”
강태한은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평소에도 일정 반경에 항상 기감을 펼쳐 놓는다. 경계를 한다기보다는, 사실상 거의 습관에 가까운 느낌이다. 기감이 아예 닫혀 있으면 영 답답한 기분이라고 할까.
그리고 강태한은 이 기감의 영역을 통해 주변의 움직임, 기척, 기운의 흐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조심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초심자의 전음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전음은 소리 없이 상대방에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 굳이 비유를 들자면, 기를 통해 상대에게 직접 무전을 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무전을 도청하는 것이 가능하듯, 전음 또한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경지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면 조금만 집중해도 훔쳐 듣는 것이 가능하고,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대놓고 들리는 수준이다.
“차가 많이 물리기는 했었나 봐. 커피가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더라.”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이상 아무 데서나 함부로 전음을 보내면 안 되는 이유. 강태한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놀리듯이 말했고, 최성현은 괜스레 머쓱한 표정으로 혀를 차곤 덧붙이듯이 말했다.
“요즘 좀 많이 마시긴 했잖아.”
“그렇긴 해. 어떻게, 설탕이라도 좀 타 줄까?”
“됐다, 인마.”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치는 최성현. 강태한은 그 모습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와 뿌듯함이 반씩 섞여 있는, 묘한 미소였다.
‘뭐, 어찌 됐거나…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올라왔네.’
물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은연중에 보낸 것이고, 전음을 보내는 방식도 굉장히 거칠고 서투르기는 했다.
허나 어찌 됐거나 전음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이는 그가 요 며칠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다는 증표이자, 그 성과였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구만.’
누군가를 가르치며 가장 허탈할 때는, 상대방의 성장이 느껴지지 않을 때다. 기껏 열심히 가르쳐 놨는데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면 허망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성현은…….
적어도 가르치는 맛이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하나를 알려 주면 둘을 깨우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알려 주는 것 하나하나 익혀 가며 착실하게 성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여러모로 기대 이상이라고 할까.
생각보다도 체질이 더 잘 맞는 것인가, 처음 예상한 것과 비교해 봐도 훨씬 빠른 성장이다. 이곳이 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말이다.
“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은 모르겠는데… 또 기(氣)와 관련된 이야기인 거지?”
“네, 맞아요.”
“그럴 거 같더라.”
한편 옆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듣고 있던 황 실장. 그는 대충 알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만 아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참이다.
“그럼 이제, 성현이가 학원장에 어울리는 그런 수준까지 올라온 건가?”
“아이,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안 그래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넌지시 물어보는 황 실장의 말에 최성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조금 장난스러운 분위기. 다만 강태한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짐짓 진지하게 검토를 해 보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예전에는 약간 부족한 면과 조금 아슬아슬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딘가 확신이 담겨 있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지금이라면 적어도 실력이랑 기량 면에서 부족한 부분은 딱히 없다고 봐야죠.”
저도 모르게 은연중에 튀어나왔던 전음.
비록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강태한도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그 자체로 이류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강태한도 이렇게까지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크흠, 흠. 그래?”
한편 강태한의 발언 이후로 잠시 동안 흐른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최성현은 괜히 시선을 살짝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내심 뿌듯해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 * *
[현재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는 시드니입니다. 지금은 양궁 혼성 단체전과 펜싱 개인 16강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중인데요.]
[방금 전 양궁에서 정가인 선수가 카메라를 깨트리는 진풍경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현장의 분위기 또한 술렁이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 양궁 강국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현장에서도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분위기입니다. ‘말도 안 돼!’보다는 ‘할 놈이 했다’, 뭐 이런 느낌이라 할까요.]
“흐음…….”
경기장 내부에 위치해 있는 선수 대기실.
그곳에 앉아 올림픽 중계를 보고 있던 여성은, 미묘한 침음을 흘리며 보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여성 펜싱 국가 대표인 주세화.
슬쩍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한 그녀는, 스마트폰을 개인 캐비닛에 집어넣고는 이윽고 장구류를 하나씩 꺼내 몸에 착용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양궁 이야기만 했었지.’
장비를 착용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방금 봤었던 중계를 떠올렸다. 양궁 쪽으로만 화제가 집중되어 있던 중계를 말이다.
물론, 딱히 서운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양궁은 오랫동안 금메달을 가져온 종목이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원도 펜싱과는 격이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펜싱도 요 근래 올림픽들에서 의외의 성적들을 거두며 적지 않은 메달들을 따내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비주류라는 느낌이 짙은 게 사실이다.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만 말이야.”
다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녀는 거울을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올림픽. 여태 동안 그녀가 나서 본 경기 중에 가장 큰 무대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지금 그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그동안의 선수 생활 중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생님 보기 부끄럽지 않게만 하자.”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한차례 크게 손뼉을 쳐 냈다.
한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때문에 올림픽은커녕 선수 활동마저 끊어질 상황에 처했던 그녀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천마안마를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뛰어난 컨디션으로, 이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무대에서 성과를 보여 주는 것뿐.
“미스 주? 준비는 끝났나요?”
“네. 다 됐습니다.”
“그럼 바로 가시겠습니다.”
흥분을 고양하는 정도의 적당한 긴장감.
그리고 설렘.
그 두 가지의 마음을 함께 품고서, 그녀는 머리 보호구를 챙겨 들고 대기실을 나섰다.
그날, 그녀는 펜싱의 전통적인 강호인 이태리를 꺾어 내고, 그다음 경기에서 프랑스까지 쓰러트리며 압도적인 기량과 실력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