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35화
“술은 없구만… 하긴, 카페에서 술을 파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지. 그럼 커피라도 좀 마실까.”
메뉴판을 쳐다보던 베네릭은 언짢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보르의 앞에 있는 빈 컵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음료 한 잔 더 마실 거지?”
“어? 어… 응.”
“그거랑 똑같은 걸로 갖다주면 되나?”
“아니, 디카페인 커피로 부탁할게.”
이보르의 말에 베네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며 카페의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자리에 남은 이보르는 벙찐 표정으로 친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럴 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보르는 평소 딱히 그렇게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적어도 어지간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까.
하지만 이건… 어지간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갑자기 자기가 불임이라고 말해 주는 상황은, 그 누구라도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좀 과한 농담이었을까?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지만, 딱히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뭔가 덤덤한 말투로 말하긴 했으나, 이보르는 알 고 있었다. 저 녀석은 진지한 고민일수록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한다는 것을.
그게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 힘든 일이거나, 설령 도와준다 하더라도 딱히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보르는 어색한 표정으로 이미 다 마신 음료의 얼음 하나를 씹어 먹었다.
“테이블로 가져다주신다네.”
“그야 그렇지. 호텔 커피 가격이 얼만데.”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베네릭. 이보르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두 눈은 주기적으로 베네릭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데?”
그러다 적당히 상황을 보고 한마디를 건넸다.
“뭐 어디 안 좋다거나… 심각한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어물쩍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허나 상대가 힘들게 꺼내 놓은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도 적절한 행동은 아니다.
친구가 걱정되는 마음도 있고… 애당초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자기가 물어본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보르는 난감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재차 질문을 입에 담았다. 반면, 베네릭은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생활에 지장이 간다거나 하는 건 없어. 밤에 제구실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냥,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베네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적당한 표현을 떠올린 듯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차가운 느낌이 짙은 냉소였다.
“그래, 과일에 씨가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럼 뭐냐, 그… 무정자증 같은 건가?”
“그거랑은 좀 다른 모양이야. 나도 뭐 의사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들은 대로 말을 해 보자면…….”
이보르는 한동안 베네릭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듣자하니 딱히 성불구자, 그러니까 소위… 고자가 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단지 그냥 정자에 문제가 있어 임신이 굉장히 어렵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난 아빠가 될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격은 애당초 없었던 거지. 아니다, 원래 있었는데 내가 갖다 버린 셈인가?”
말을 마친 베네릭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젊었을 때 사용했던 약물의 부작용이 남아, 신체에 영향을 줘서 생긴 문제라는 모양이었다.
“혹시… 예전에 스테로이드 맞았던 거 때문이냐?”
“그거 말고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긴 하지. 의사 선생님이 따로 예시로 든 약물이기도 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이보르가 짚이는 부분을 입에 담자, 베네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날에 조급한 마음으로 저질렀던 실수.
지금에야 헐리웃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잘나가는 배우였으나… 영국 영화계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의 그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무명 생활을 지내 왔었다.
주변에서 연기력이 좋다고 인정은 받았었으나, 그래 봤자 조연급도 따내기 힘들어 엑스트라와 단역을 전전해 왔었던 시절.
영국 영화계는 아직도 배우의 집안에 따라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달랐다. 일종의 계급 문화라고 할까.
그곳에서 집안도, 인맥도, 경력도 없는 그가 제대로 된 배역을 따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 년 동안 그가 받은 대사를 전부 옮겨 적어도 A4용지 한 장이 다 채워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주연급을 따낼 수 있는, 정말 좋은 오디션 기회가 하나 있었는데… 해당 배역의 조건이 바로 근육질의 몸을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건강미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운동선수 수준의 탄탄한 몸. 당시의 베네릭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오디션까지 남은 기간은 촉박했다.
베네릭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물을 남용했던 것이 바로 그 시기였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몸을 완성시키기 위해, 제대로 된 처방도 없이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애써 포장하자면, 젊은 날의 실수.
대놓고 말하자면 멍청한 짓거리였다. 결과적으로 해당 배역도 잡지 못했고 몸만 망가졌으니, 멍천한 짓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짓거리였다.
“…근데 그렇게 오래 맞은 건 아니었잖아?”
“당시에도 부작용으로 꽤 고생했었던 거, 너도 알잖냐. 나랑… 어지간히도 맞지 않았던 거지. 여러모로.”
독주를 들이붓다시피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편, 가볍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술이나 담배조차도 사람에 따라 상성이 다른 법인데, 하물며 약물은 어떻겠는가. 그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심한 부작용으로 당시에도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었다.
다만 자조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는 좀 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약물과의 상성도, 이런 편법으로 배역을 따내려고 했던 것도… 여러모로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 * *
“그래서, 라일리랑은 그 문제로 다툰 거냐?”
“뭐 직접 다툰 건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
베네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러모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까…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는 여태 라일리의 문제라고 진단해 왔었거든.”
“…그랬구만.”
이보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연애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 베네릭과 라일리를 함께 본 것도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보르가 기억하고 있는 브라운 부부는, 정말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이상적인 모습의 부부였다.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별생각이 없었던 이보르가, 당시 두어 차례 여자를 소개받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허나 그랬던 부부가 지금은 별거 중이라니.
단순히 친구나 가까운 지인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화목했던 부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런 이보르의 안색을 신경 쓴 것일까.
베네릭은 편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이보르 쪽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려는 시도였다.
“너 요즘 엄청 잘나가더라. 아까 무비 스타, 무비 스타 그러던데, 적어도 지금 영국 내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유명한 거 아니냐?”
축구라는 건 어찌 보면 그냥 스포츠 종목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몇몇 남자에게 있어, 특히 유럽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뭐랄까. 취미를 넘어서 아예 인생의 일부가 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나 훌리건의 본국이라 불리는 영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느낌이 짙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릭의 말은 딱히 과장이 아니었다. 현재 에버튼 FC의 대활약과 챔스 진출은, 프리미어리그가 폐막하고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화제가 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뭐,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런 친구의 말에 이보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딱히 오만한 모습이라기보단, 담백하게 사실을 입에 담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베네릭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야, 에버튼이 챔스라니. 나는 상상도 못 했다.”
“나도 매년 챔스를 목표로 삼고 있긴 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같은 심정이야. 몇 년 뒤면 모를까, 올해의 에버튼이 챔스에 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
이보르는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팀이고 본인이 직접 달려서 쟁취해 낸 성과이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인 건 사실이다. 괜히 아직까지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비결이 뭐야?”
“비결? 언론에 이미 다 나오지 않았나?”
그리고 이 정도로 화제가 되면, 당연히 그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기 마련.
하지만 그에 대한 내용은 이미 인터뷰에서 몇 번이고 말한 상황이다. 보다 정확히는, 강주완이 신나서 안마에 대한 찬양을 몇 차례 늘어놨다.
“그 안마사랑 안마 의자에 대한 이야기? 그 말을 전부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뭔가 더 있겠지. 나한테만 좀 말해 줘 봐.”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질문이 끊어진 건 아니다.
겸손의 의미이거나 적당한 위장 전술이라 생각하고, 설령 안마에 효과가 있었다고 믿더라도 그와 병행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인데…….”
물론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억울한 심정이다. 하긴 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보르 본인도 강주완과 고드윈이 처음 안마를 받고 왔을 때, 허풍으로 치부하고 무시했었으니 말이다.
‘직접 받아 보기 전까지는 납득하기가 어렵지.’
예전 본인의 태도를 떠올리며 납득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보르. 그러던 와중, 그는 갑작스레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베네릭, 너 한국에 얼마나 있는댔지?”
“오래는 안 있지. 그냥 행사 때문에 들렀을 뿐이니까. 이틀 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뭐 일정이라도 따로 있어서 돌아가는 거야?”
“그건 아니야. 한동안은 집에서 쉬려고 했어.”
그 말에 이보르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마침 잘됐다는 듯이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좋네. 그럼 여기서 며칠만 더 있어.”
“안 될 건 없는데…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베네릭. 반면, 이보르는 방금 전보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못 믿겠다고 한 안마 이야기 있지?”
“어, 그래.”
“그 오리엔탈 마스터… 아니, 안마사 선생님이 이 건물 위층에 계시거든.”
이보르는 베네릭을 쳐다보더니, 벌써부터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이듯이 말했다.
“아마 원장님한테 물어봐야 알겠지만… 너와 라일리 사이의 문제에,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행여 선생님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말을 조심하긴 했으나, 이보르는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 *
“…자, 그럼.”
조용한 방 안의 분위기.
그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본인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듯한 긴장된 목소리였다.
“해 보자고.”
남자의 정체는 권태수 팀장.
바디케어에서 더 마이스터의 후속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연구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잘 작동이 되면 좋겠는데요.”
“되겠지. 안 되면 다시 고치면 되고.”
그런 권태수 팀장의 말에, 주변 직원들이 덧붙이듯이 한마디씩 입에 담았다. 그들의 앞에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기계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시제품.
아직 시제품인지라 마감도 대충 되어있고 여러모로 어설픈 느낌이 강했으나, 여기엔 그동안의 개발과 연구 성과들이 총집합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안마 의자로서의 성능은 이미 훌륭했다. 다만 아직 미완된 부분이 남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에이폰과의 연동 기능이다.
일상생활 중 에이폰에 수집된 헬스 데이터를 활용하여, 좀 더 개인에 맞춰 세밀하고 효율적인 안마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도록 개발한 기능.
다만 해당 기능을 위한 시스템 구축과 프로그래밍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다소 문제가 생겼다. 보다 정확히는, 실제로 가동을 시키면 조금씩 오차가 있었던 것이다.
“조심하세요, 팀장님. 뭔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끄시고. 저는 아직도 어깨가 욱신거리고 있거든요.”
“…그래.”
한 직원의 말에 권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램적으로는 조그만 오차지만, 시술자에게 체감되는 그 영향은 꽤나 컸다. 근육을 풀어 주는 게 아니라 작살내 놓는 느낌이라고 할까.
덕분에 앞서 테스트를 해 본 직원들은 다들 어디 한 군데씩 담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지압의 위치가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도 확연하게 달라지는 효과. 이를 보고 권 팀장은 새삼 안마라는 행위의 신묘함을 느꼈다. 그 때문에 개발에 난항을 겪은 것은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이번에는 잘되어야 하는데…….’
그리고 이번에는 권 팀장이 테스트를 해 볼 차례.
앞서 담에 걸린 희생자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위바위보가 아니라 직급으로 순서를 정했으리라.
“그럼 팀장님, 시작합니다?”
“어. 바로 시작해 줘.”
그와 동시에 우웅… 하며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하는 안마 의자. 이윽고 롤러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고, 곧이어 안마가 시작되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어?’
평소와 비슷하게 무난한 느낌.
허나 그 느낌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정확히는 허리춤부터 어깨까지 지압이 들어가는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세밀한 자극이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으흐으음… 어흐윽!”
아프다. 하지만 이건, 기분 좋은 아픔이다.
소위 시원하다고 불리는 바로 그 느낌.
그 기분 좋은 아픔이 스며들듯, 몸 안쪽까지 무단으로 침투해 오는 느낌에, 권 팀장은 온몸을 비틀며 거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신 거야, 아니면 아프신 거야?”
“일단은 좋은 쪽인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은, 본인들의 상사의 애매한 모습이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인지를 토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