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16화
똑똑.
“들어오세요.”
방금 전 발표와 관련하여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던 장태현 회장.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권태수 팀장. 몇십 분 전 회의장에서 훌륭하게 발표를 마친 그였으나, 지금은 눈빛부터가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딱 봐도 긴장한 기색이 보이고 있었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장태현 회장과 그의 비서 그리고 자기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이게 뭔 일이래.’
물론 오늘 그가 장태현 회장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방금 전 회의실에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에 대한 발표를 했을 때, 회사 임원들뿐만 아니라 장태현 회장도 자리에 있었으니까.
하나 때로는 수많은 사람의 앞에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단 한 사람과의 독대가 더 부담스러울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의 권태수가 딱 그러했다.
이 넓은 공간에 있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
왠지 공기마저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권태수 팀장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회장님께서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장태현 회장은 테이블 측면의 모서리 자리, 본인과 굉장히 가까운 근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레 회장의 맞은편에 앉으려 했던 권태수는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쭈뼛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안 그래도 긴장되고 있었는데, 물리적 거리까지 생각보다 가까워지는 상황이었다.
“이거 너무 긴장을 하신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던 탓일까.
장태현 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권 팀장님을 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아까 전부터 계속 물린 채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이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장태현 회장이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원에게 이런 자리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치다니.
“생각보다 대범하신 부분도 있으시군요?”
마냥 긴장만 하고 조심하기만 해서는 나올 수가 없는 반응이다. 예상외의 모습에 장태현이 히죽 미소를 짓자, 권 팀장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불쾌하기는요. 오히려 유쾌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딱딱한 분위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위트가 섞여 있는 분위기를 훨씬 선호하는 장태현이다.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는, 무릎 위에 내려놓았던 자료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전의 발표는 잘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진행 능력이 탁월하신 분이라 들었는데,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시더군요.”
장태현은 방금 전 회의장에서 있었던 발표를 떠올리며 말했다. 팀장급이 되면 프레젠테이션 능력 정도는 필수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나 훌륭한 수준의 발표였다.
“발표 내용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고생하는 팀원들에게 전해 주면 정말 기뻐하겠네요.”
자연스레 팀원들의 공로도 같이 언급하는 건가.
생각한 것보다 훌륭한 인재일지도 모르겠다. 장태현 회장은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계속해서 본론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현재 협력 업체와 문제가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만.”
“협력 업체와의 문제라 하신다면… 에이플러스와의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장태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장태현 회장의 개인적인 관심만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룹 전체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럴 만도 했다.
‘더 마이스터’라는 초대박 아이템의 후속 제품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처음부터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거기에다 에이플러스와의 기술 협력 및 서비스 제휴 신청까지 얹어졌으니까 말이다.
초대형 글로벌 기업인 에이플러스.
미국의 대표적인 IT 기업 중의 하나이며, 특히나 에이폰을 통해 널리 전 세계에 인지도를 쌓은, 비교할 만한 기업을 찾기가 어려운 수준의 대기업이다.
이런 기업과 협력 관계가 된다?
그야말로 호재 중의 대형 호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한데 그런 곳과 기술을 공유하고 서비스 제휴를 맺게 된다니.
심지어는 우리 쪽에서 제안을 넣은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 온 것이다. 당연히 그룹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안인 것이다.
다만, 그건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중간에 문제가 생겼는지, 에이플러스 쪽에서 계약은 잠시 보류해 두자는 이야기가 나온 상태였다.
“회의 때도 언급하시긴 했습니다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서 말이죠.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발표 때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그쪽 개발 팀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었고, 긍정적으로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 위쪽에서 갑자기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나 봐요.”
해외 기업 중에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하는 곳이 있고, 특히나 에이플러스는 그런 기업들의 대표 격의 입지에 위치해 있는 기업이다.
그런 만큼 일반 직원들에게도 상당히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는 경우가 있고, 자체적으로 일을 진행시키게 내버려 두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승인을 내리는 사람들은 따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초대형 글로벌 기업이라 해도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되도 않는 프로젝트들까지 휙휙 통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미스터 권, 일단 굉장히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먼저 해 둘게. 위쪽에서 해당 안건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나와서 말이야.’
권태수는 바로 어제 도착했던 메일을 떠올렸다.
처음 이야기를 꺼내 왔고 지금까지 같이 진행해 왔던 에이플의 프로그램 개발자, 켈빈 클라스너.
그 메일을 읽은 순간, 권 팀장은 에이플러스와의 협력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경험상 ‘다시 한번 검토한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기획의 폐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해외 기업이라고 해서 뭐 크게 다르겠는가.
사실 그리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밑에서 한참 진행하던 중 위에서 중단시켜서 사라지는 기획. 어느 회사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흐음… 여러모로 아쉬운 상황이군.”
그런 이야기들은 장태현 회장도 알고 있다. 아니, 밑에서 예산을 타 가는 입장이 아니라 예산을 책정하고 나눠 주는 입장이다 보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대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엎어질 기획이라고.
보트로 치자면 이미 반쯤 기울어져서 물이 선체 안으로 잔뜩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굴러 들어왔던 호박이니, 그냥 굴러 나가더라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렇기는 하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다.
아쉽기는 하다만 제품 개발 자체는 계속 진행되어 가고 있었으니 큰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다. 장태현은 위로하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권 팀장이 마음고생이 꽤 심했겠네. 나도 살짝 김이 샌 기분인데, 책임자인 권 팀장은 오죽했겠어.”
“하하… 이러다가 잘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쪽에서도 나름 비장의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비장의 계획? 그게 뭔가.”
“음, 그게 말입니다…….”
비장의 계획이라니.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단어이지 않은가.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보이던 장태현이 슬쩍 관심을 보였다.
하나 그렇게까지 대단한 계획까지는 아니다. 권 팀장으로선 반쯤 빈말로 꺼낸 말이었기에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으나, 어쨌거나 진지하게 물어보는 회장에게 자세한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계획이란 것을 늘어놓고 난 이후.
“이건…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계획이군.”
“그렇죠?”
계획이라는 단어가 ‘만약의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방금 그가 들은 말은 계획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수준.
하나의 상황에 어떤 반응만을 가정해 놓고, 무조건 이대로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수준에 불과했다. 만약 중요한 프로젝트에 이런 걸 기획서로 가져온다면 온화한 상사도 성난 들개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조잡한 계획인 것은 분명하다. 가정도 빈약하고, 예상에서 벗어났을 때의 대처도 전무하다. 그냥 ‘A의 상황이 되면 B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한데 왜일까.
그 계획에는 특정 사람들이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득력이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더 마이스터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설득력이 말이다.
* * *
한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의 실리콘밸리.
“데이빗, 이건 진짜 큰 실수 하시는 거라니까요!”
한 남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는 와중에, 그 앞에서 누군가가 격한 목소리로 따지듯이 묻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켈빈 클라스너. 어플리케이션 개발 팀 쪽에서 근무하고 있는 개발자이자, 얼마 전까지 바디케어와의 협업을 진행시키고 있던 직원이었다.
“큰 실수라.”
데이빗이라 불린 남자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딘가 표독스럽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그는, 잠시 코웃음을 친 다음 여전히 시큰둥해하는 목소리로 가볍게 내뱉듯이 말했다.
“실수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기업과 제휴를 맺고 투자하는 걸 말하는 걸세.”
그는 잠시 커피 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을 마시더니, 슬쩍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냉소였다.
“그리고 내 역할은 실수를 바로잡는 거고.”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을 잊은 걸까, 아니면 말문이 막힌 걸까.
켈빈은 뭐라 말을 이어 나가려다 멈칫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고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데이빗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게. 설득을 해도 좋고.”
데이빗은 사내에서 까칠하기로 소문난 상사지만, 그럼에도 소통은 활발히 하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휴우.”
한번 말문이 막힌 게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되돌려 주는 역할을 한 걸까.
서서히 목소리가 올라가며 격한 반응을 보이던 켈빈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데이빗.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제가 너무 격한 반응을 보인 것 같네요. 데이빗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말이죠.”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데이빗은 손을 휘휘 젓고는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이 정도쯤이야 그에게는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 납득은 못 했나?”
“예. 죄송한데, 제가 짠 기획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정말 좋을 수밖에 없거든요. 좀 더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켈빈은 괜스레 주변을 슥슥 둘러보더니, 뒤쪽의 복도와 연결된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좀 계속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여기서 오래 있는 건 서로 불편할 것 같은데.”
그 말마따나, 이곳에는 다른 직원들도 업무를 하고 있는 공간이다. 물론 데이빗의 자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곳.
“…좋아. 거기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솔직히 귀찮은 마음도 있고, 살짝 짜증도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본인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다. 데이빗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서 가는 켈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쪽 휴게실에 가는 건 오랜만인가…….’
기본적으로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에이플러스지만, 그래도 직원 간에 직급은 존재하고, 그 사이에 어느 정도 불편함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직원들이 사용하는 휴게실도 자연스레 분리가 되어 있었다. 딱히 등급에 따라 차별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 같이 있다 보면 불편한 점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뉜 것이다.
“여기로 오시는 건 오랜만이죠?”
“음. 그렇지. 한 일 년 만인 것 같은데.”
마침 생각하고 있던 걸 언급하는 켈빈.
그 말에 대답하며, 데이빗은 휴게실 안쪽을 슬쩍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익숙한 부분보다는 낯선 요소들이 더 자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근데 저건 뭔가?”
호기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데이빗. 켈빈은 계획대로 풀려 가는 상황에 속으로 환호를 보내면서도, 겉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가요?”
“저기, 저 무슨 조종석처럼 생긴 것 말이야.”
데이빗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안마 의자, 더 마이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