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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215화 (215/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215화

사람에게는 욕구라는 것이 있다.

뭔가를 갖고 싶다, 더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 누군가와 만나 보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등.

그 동기와 내용은 제각각일지언정 저마다의 욕망을 품고 있고, 그것은 곧 목적이 되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이뤄 낼 수는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첫째로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기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언젠가 선택의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의 욕망, 내가 하고 싶은 것, 그것 중에서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지금의 최성현이 그러했다.

한동안 벙찐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은, 마치 톱니바퀴가 하나 빠져 멈춰 버린 시계처럼 정적이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다 겨우 나온 목소리.

그는 그새 마른 입술에 한차례 침을 적시며 차근차근한 말투로 이어 말했다.

“내일 에버튼 FC 선수들이 온다고? 가게로?”

“응. 차례차례 올 예정이야.”

“어떤 선수들이?”

“글쎄… 대부분 다?”

강태한이 에버튼 선수들의 면면을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일모레까지 잡혀 있는 선수들의 예약이 대략 열셋, 열넷 정도 되었으니, 아마 대부분의 선수가 찾아오는 것이리라.

“대체 왜?”

“그야 당연히 안마받으려고 오는 거지. 안마원에 그것 말고 또 찾아올 이유가 있기는 한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최성현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진 않았다. 애초에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내 말은… 그걸 왜 지금 말해 줬냐고.”

“난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최성현의 말은 따진다기보다는 투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런 친구의 말에, 강태한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살짝 난감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주질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아니, 그때 실장님이 예약 일정 말해 줄 때 너도 근처에 있었잖아. 그래서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어? 그랬나?”

당시의 순간을 떠올린 강태한이 말하자, 최성현도 순간 멈칫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 보니, 확실히 짚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당시 자기와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곤 딴짓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사실 최성현이 집중해서 들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날 이야기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천마 코스의 예약에 대한 것이었고, 심지어 최성현은 쉬는 날에 잡혀 있는 일정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근처에 있기는 했지만 거기에 있기만 했을 뿐이지, 이야기의 내용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스마트폰 게임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알아서 말을 걸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툭 까놓고 말해 안마사는 각자의 일정만 제대로 인지하고 있으면 그만이고, 천마안마의 분위기가 그렇게 권위적이고 딱딱한 곳도 아니었으니까.

하나 최성현으로서는 후회가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날 조금만 집중을 했더라도 이렇게 갈등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한다…….”

축구는 최성현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이고, 에버튼 FC는 최성현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 팀이다.

에버튼이 뛰는 경기라면 꼭 챙겨 봐야 직성이 풀리고, 그날 영국에서 받아 온 사인 볼은 그의 방 한구석에 트로피처럼 장식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먼지를 닦아 주고 있었으니까.

비록 팬이 된 계기는 단순히 한국 선수 강주완이 뛰고 있는 팀이기 때문이었으나, 그렇다고 팀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그의 팬심이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최성현은 이미 한번 선수들과 만난 적이 있다. 사인 볼도 그때 받아 온 것이니까.

하나 그렇다고 팬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만약 한국에 에버튼 선수들이 어떤 행사가 있어 찾아온다면, 설령 제주도라 할지라도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서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한동안 고뇌와 갈등으로 끙끙거리던 최성현은, 이내 생각을 정리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많이 아쉬운 기회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길게 고민할 내용은 아니었다.

이미 정가인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으니까.

약속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최성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그냥… 정가인이 더 보고 싶다. 뭔가 거창한 계획이 있거나 대단한 뭔가가 준비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냥 만나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정가인이 중요하다?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보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최성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못 나오지.”

최성현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단호한 것이었다. 강태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묘한 미소. 그 미소에 최성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던 찰나, 아직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황 실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근데 성현아.”

“왜요. 또 이걸로 놀리게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아까 하루 만에 조회 수 100만을 넘기면 되게 잘 나오는 거라고 했었지?”

“그렇죠?”

방금 전 같이 왓튜브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다. 최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황 실장은 두 사람 쪽으로 슬쩍 화면을 돌리며 말했다.

“이거 같은 채널에 한 시간 정도 전에 올라온 영상이거든?”

화면에 나와 있는 영상은 방금 전과 같은 덴버정 채널의 영상. 그의 말대로 업로드 시간은 길어 봤자 두 시간 정도 되어 보이는 따끈따끈한 영상이었다.

“그러네요. 그래서요?”

“이건 벌써 조회 수가 50만이더라.”

“…엑, 그래요?”

살짝 놀라서 조회 수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최성현.

덴버정의 채널이 꽤 유명한 채널인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갓 업로드된 영상에 몇십만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나 황 실장은 허구나 과장 없이 사실을 그대로 입에 담았을 뿐. 떡하니 찍혀 있는 조회 수에 최성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영상이길래요?”

“얼마 전에 태한 씨 손님으로 온 외국인 한 명 있잖아. 되게 키 크고 근육질이었던 사람.”

“아, 누구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요.”

굉장히 모호한 설명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 실장은 마우스의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사람, 굉장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인가 보더라고. 그냥 간단한 인터뷰인데, 이렇게 얼굴 비추고 근황이 나오는 게 진짜 오랜만이라던가. 댓글창이 난리도 아니더라.”

그 말대로 영상에는 이미 상당한 숫자의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영어로 이뤄진 댓글들이 말이다.

사실상 한글로 된 댓글은 거의 없는 상황.

덴버정의 채널은 원래도 외국인 구독자들이 좀 있는 편이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최성현은 놀란 표정으로 댓글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하더니, 이내 뭔가를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앞으로 올라올 한국 마사지 콘텐츠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사람… 누구야, 캘리버 씨? 아무튼 이 사람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런저런 영상들을 올릴 예정이래. 안마받기 전후 비교 영상도 포함해서.”

“어, 우리랑은 이야기 된 거예요?”

“이야기 됐으니까 나나 태한 씨가 무덤덤한 거겠지? 물론, 이렇게까지 대박이 날 줄은 몰랐지만.”

황 실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쪽에 있는 강태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강태한.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러다 미국에도 분점을 내게 생겼네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강태한의 농담을 적당한 웃음으로 받아치는 황 실장. 그런 그가 강태한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 * *

한참 고요한 분위기의 넓은 회의장.

사람은 여럿 모여 있었으나, 내부의 공기는 차분함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그 공기 속에서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흠. 회의가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좀 있는데, 다들 출석들이 굉장히 빠르시네요.”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청그룹의 회장, 장태현.

그렇게 말을 꺼낸 그는 슬쩍 구석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본래 회의 일정보다 이십 분가량은 이른 시간. 하나 이미 모든 사람이 착석해 있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모이실 필요는 없는데.”

장태현의 말에 자리에 앉은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된 한마디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룹의 회장이 여기 앉아 있는데 어떻게 천천히 오냐고.

이곳은 바디케어 본사에 위치해 있는 대회의장.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 장태현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은 없다. 아니, 애초에 그룹 내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일찍부터 도착하여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에, 회의에 참가하는 임원들은 부리나케 하던 일을 내려놓고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인 것이 지금.

다들 언뜻 평온해 보이는 모습으로 자료를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다들 뛰어오느라 지친 호흡을 애써 티 안 나게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하하, 저희 쪽 임원들이 다 솔선수범을 하는 타입이라서요. 으레 이렇게 일찍 모이고들 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훌륭합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장의 말에, 장태현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입에 담았다.

정말 그냥 순수하게 앞뒤 상황을 모르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하려고 이런 퍼포먼스를 보인 걸까.

적어도 그의 표정과 목소리만 놓고 보면 전자 쪽에 가까웠으나, 본래 목적은 무조건 후자 쪽이라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똑똑.

그때쯤 울리는 노크 소리.

“…들어오게.”

슬쩍 장태현 회장의 눈치를 살피고 사장이 들어오라는 말을 꺼내자, 닫혀 있던 문이 슥 열리며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 어서 들어와요.”

장태현 회장은 보자마자 그를 알아보았는지, 유난히 반가운 표정을 내비치며 환대를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굳이 그룹 자회사의 회의까지 참여한 것은, 그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그만큼의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아마 오늘 이곳에 방문한 이후로 가장 환한 표정이지 않을까. 물론 당사자에게는 부대에 방문한 사단장처럼 난감한 존재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크흠, 흠. 다들 안녕하십니까. 이곳에 모인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들 바쁜 분들이신데, 이렇게 시간을 내 자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편 그렇게 환대를 받으며 단상 위에 올라선 남자.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뒤쪽의 스크린에 발표 자료를 띄워 놓았다.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한 개발팀장 권태수.

그는 요 근래 있었던 바디케어 급성장의 주역 중 한 명이자, 그 이후를 이끌어 나갈 차기 핵심 기획의 담당자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자, 그럼… 안마 의자 더 마이스터의 후속 제품, 가칭 더 세컨드의 개발 상황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회의는 바로 그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차후 방향을 의논하기 위한 자리.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발표를 듣는 정태현 회장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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