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13화
“그건 그렇고, 진짜 길긴 길었네.”
그렇게 통로를 따라 줄줄이 걷고 있었을까.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한 선수가 찌뿌둥한 표정으로 어깨를 살살 돌리며 가볍게 툭 내뱉듯이 말했다.
“뭐가 길어?”
“비행시간 말이야. 잠을 세 번인가 잤는데, 자고 일어났는데도 한참 시간이 남더라고.”
그의 말은 딱히 엄살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들이 비행기에 탑승해 있던 시간만 해도 열 시간이 넘어갔으니까. 그 정도가 되면 누구라도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그러게. 아무래도 좀 뻐근하기는 하지.”
“난 비행기에서 자면 자는 것 같지가 않더라.”
그러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른 선수들도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다들 신이 나 있어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얼굴만 놓고 보면 다들 조금씩 피곤한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이 자식들이 전용기 타고 왔으면서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이 정도면 그냥 진짜 편하게 온 거지.”
그런 그들의 말에 강주완이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한국과 영국을 수도 없이, 그것도 민간 항공사만 이용해 온 그에겐 말 그대로 배부른 소리였다.
“그래도 뻐근한 건 뻐근한 거지, 뭐.”
“그럼 식당까지 조깅해서 갈까? 뛰어서.”
“하하, 그렇게 가면 빨리 갈 수는 있겠네. 도중에 엠뷸런스에 실려 갈 테니까 말이야.”
바트의 반쯤 진심이 섞인 목소리에, 가장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던 이보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곤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신난 건 알겠지만, 첫날은 되도록 식사만 하고 얌전히 지내자고. 다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것도 사실이고, 경기의 피로도 아직 남아 있을 테니까.”
“에에… 원래 첫날이 제일 즐거운 법인데!”
“이보르! 이번 여행의 리더는 주완이야! 여기서도 완장 역할 하려고 하면 곤란하다고!”
“그야 물론이지. 난 그냥 제안하는 거야.”
그는 가장 맨 앞에 서 있는 강주완을 슬쩍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에버튼 FC의 주장은 이보르였으나, 이번 여행의 리더는 강주완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밥만 먹고 호텔로 들어가려 했어.”
다만 강주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몇몇 선수의 반발이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엑, 진짜로?”
“안 놀러 간다고? 술은?”
“노는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컨디션 관리가 최우선이지. 애초에 그것 때문에 감독님도 허락을 해 주신 거지.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일정이잖아.”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지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에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내년에는 프리미어리그는 물론이거니와, 챔피언스리그까지 함께 뛰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매년 열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소위 챔스라 불리는 이 리그는, 작년 유럽 각지에서 최상위 성적을 거둔 32개의 팀들을 선별하여 따로 진행되는 리그다.
말하자면 유럽 최고의 축구 팀을 가리는 무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에버튼 FC는 십 년 만에, 아니 그 이상의 세월 만에 드디어 그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선수 개개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팀 전체, 특히 오랜 세월 응원해 온 팬들에게도 너무나도 중요하고 각별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비록 시즌이 끝나 여유로운 시기이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뜻.
당연한 말이지만, 시즌을 마치고 난 직후의 선수들은 몸에 피로가 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유럽 축구는 그야말로 축구의 천재들만 모여 있다고 봐도 무방한 곳. 그런 곳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전력을 쥐어짜 내어 뛰어다녀야 한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경기를 치르고 난 뒤이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피로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고, 컨디션도 떨어진 상태다.
하나 앞서 말했듯, 그렇다고 마냥 풀어 놓을 수는 없다. 휴식도 체계적으로 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단체로 해외여행?
안 될 것은 없다만, 나중에 성적이 부진할 경우 논란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특히 오랜 세월 응원해 온 에버튼의 팬들에겐 배신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굳이 이런 계획에 허가를, 그것도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앨버트 감독이 허가를 내려 준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이 여행에는 그만큼의 메리트가 있으니까.
챔스까지는 앞으로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컨디션 관리라는 측면에선 이것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인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좀 여유 있게 지내도 괜찮지 않아? 우리에겐 오리엔탈 마사지 마스터님이 계시잖아.”
그 계획의 핵심은 다름 아닌 천마안마.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드윈이 슬쩍 강태한의 존재를 언급하자, 다른 선수들도 동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직접 손맛을 보기도 했거니와 실제로 리그에서도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둔 참이라 그런가, 그들 사이에서 강태한의 이름은 일종의 기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마사지도 최대한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받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드윈에게 강주완이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영국에서 마사지 받았을 때를 생각해 봐. 다 같이 마사지를 받았지만, 유독 너랑 나랑 더 큰 효과를 봤었지. 그렇지 않아?”
“그건… 그랬었지.”
고드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즌에서 그야말로 기염을 토해 낸 에버튼 FC였지만, 그 팀 내에서도 가장 활약한 선수를 꼽으라하면 고드윈과 강주완, 두 선수가 뽑히곤 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천마안마를 이미 다녀온 상태에서 한 번 더 마사지를 받았다는 것.
물론 그 이전부터 두 사람이 투 톱 체제로 팀을 이끌어 가던 공격수이기도 했고, 팀에서 가장 주목을 받던 선수들이기는 했다.
하나 이 두 명이 유독 마사지의 효과를 톡톡히 본 사람이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드윈과 강주완 두 사람이 실제로 체감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번 점프할 때 둘이서만 두 번 점프를 한 느낌이라고 할까. 물론 처음 안마를 받았던 만큼의 폭발적인 도약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몇 걸음은 더 앞서 나간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받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괜찮을 때 받는 게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말이지.”
확실히… 듣고 보니 그건 그렇다.
강태한의 마사지는 단순히 안 좋은 곳만 풀어 주는 수준이 아니다. 불편한 곳이 있다면 해결을 해 주고, 그런 곳이 없다면 더욱 좋게 만들어 놓는다.
상급이었던 몸 상태를 최상급으로 만들어 준달까.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말하면 뭐라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웠지만, 같은 경험을 했던 고드윈과 강주완, 두 사람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니 뭐, 근데 어차피 내가 계획했다하지만 공식 스케줄도 아니고, 너희가 어디 가서 놀고 싶다고 나가면 막을 생각은 없어. 권한도 없고.”
고드윈을 설득하는 듯한 대화였으나, 당연히 그 대화는 다른 팀원들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공항을 거의 다 빠져나온 상황.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을 앞에 두고, 강주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각자 움직일 사람은 움직여도 돼. 나 따라서 호텔로 직행할 사람은 앞에 있는 버스로 가는 거고, 좀 놀고 싶은 사람은 저쪽 택시 승강장으로 가면 되는 거고.”
강주완은 양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툭 내뱉듯이 말했고,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이 버스 쪽으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참, 그냥 선택지가 없는 거잖아? 이건.”
“안마 효과 두 배는 못 참지!”
하나 선택지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선수는 없었다. 이미 강주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모두 생각을 정리한 참이었기 때문.
강태한의 안마의 효과는 확실히 탁월하다.
하나 그렇다고 없는 재능과 열정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다. 그저 잠재력을 끌어 올리고 개화시켜 줄 뿐.
에버튼 FC가 3위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안마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선수들 모두가 축구에 진지한 열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버튼 FC의 선수들은 터미널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모습 그대로 버스 안에 줄줄이 들어갔다.
* * *
“자, 그럼!”
라이너 빌딩 인근 골목의 한 고깃집.
이제 막 테이블에 식기구와 밑반찬 정도만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황 실장이 소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으음.”
다만 기세 좋게 손을 들었던 것과 달리,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맞은편에 앉은 최성현이 핀잔을 주듯 말을 꺼냈다.
“아니, 왜 잔을 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요?”
“그게… 건배사가 안 떠오르네?”
그 말에 최성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서 터지는 헛웃음이었다.
“딸랑 세 명 앉아 있는데, 건배사는 무슨.”
“그냥 기분이지, 뭐.”
“그럼 머뭇거리지 말고 시원하게 하시든지.”
최성현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같이 잔을 들어 올렸고, 강태한도 함께 잔을 들어 짠, 소리를 냈다.
그리고 깔끔하게 첫 잔을 털어 넣는 세 사람. 곧이어 저마다 취기 어린 탄성을 조그맣게 터트리더니, 각자 알아서 안주를 챙겨 먹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뭔가 얼굴 보기가 어려워진 것 같네. 소파에서도 잘 안 보이고.”
“누구, 저요?”
“응. 반면에 태한 씨는 좀 자주 보이는 것 같아.”
황 실장은 최성현과 강태한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최성현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럽기는 하죠. 실제로 저는 비교적 한가해졌으니까.”
“그렇지?”
황 실장이 말한 소파는 휴게실에 있는 소파다.
정말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 앉아 있기 좋은 곳.
덕분에 세 사람이 자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농담도 나누는 장소였으나… 요 근래 최성현이 소파에 있는 모습은 꽤 드문 일이 되었다.
“이 녀석이 하도 바쁘게 돌아다니니까 말이야.”
다만 그 이유는 그리 유별난 게 아니었다.
단지, 최성현에게 연습을 도와 달라고 하거나 가르쳐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아졌을 뿐이다.
본래라면 최성현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거나 강태한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적어진 것.
기감에 대한 적응도 이제 안정적인 상태에 돌입된 데다, 최성현 본인의 경지가 점차 쌓여 감에 따라 시야와 이해도의 폭이 넓어진 덕분이다.
애당초 다른 안마사들이 배우는 내용 자체가 비교적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이제 대부분의 질문과 조언 정도는 최성현의 선에서 해결이 가능해진 것.
게다가 특유의 친화력 덕분일까, 아니면 얼마 전까지 같은 길을 걸었기에 해 줄 수 있는 실용적인 팁들 덕분일까. 대부분의 안마사는 최성현에게 질문하는 걸 선호했고, 자연스레 강태한은 그만큼 남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성현이가 저 대신 고생해 주는 거죠, 뭐.”
“그… 런가?”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강태한. 다만 정작 최성현은 애매한 반응을 내비쳤다.
“내가 싫어서 하는 일도 아닌데, 뭘 고생까지야.”
“흠… 그럼 좋아서 하는 일이다?”
“좀 그런 편이죠?”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최성현의 대답에 황 실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긍정의 답이 돌아온 것이다.
“어… 그래?”
“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계속 배워 가는 입장이니까 복습도 되고요.”
최성현은 종종 허세를 피우긴 하지만, 그럴 때는 티가 난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진심 그대로 뱉은 말이라는 뜻이었다.
“흐음.”
한편, 그 말을 들은 강태한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굉장히 흡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역시 내가 눈여겨본 인재야.’
조금 앞서 가는 것으로 자만에 빠지지 말 것.
한번 배운 것이라도 꾸준히 살펴볼 것.
비단 모든 일을 배울 때 중요하게 여겨지는 마음가짐이지만, 무공을 익힐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자칫하면 기초에 소홀해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까.
다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쉽지가 않기에 따로 경계하고 항상 상기해야 하는 부분인데… 최성현은 기본적으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는 것.
이건 보는 이로 하여금, 특히나 직접 가르친 입장에서는 뿌듯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뿐인가.
최성현에게는 교육자의 재능도 있는지, 어려운 내용을 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데에 탁월했다.
강태한이 대충 썰어서 뭉탱이로 때 주는 느낌이라면, 최성현은 한입 크기로 썰어서 먹기 좋게 차려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괜히 궁금한 게 있는 사람들이 최성현에게 몰리는 게 아니었다.
‘역시 학원장 자리에 어울려.’
마침 필요한 자리에 딱 맞아떨어지는 인재상.
강태한은 최성현을 바라보며 천천히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흡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