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98화
“캘리버!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캘리버가 이름 모를 할머니를 막 돕기 시작했을 즈음.
멀찍이서 전화를 하고 있던 그의 코치, 에드윈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가만히 있지를 못하냐?”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도 좀 그렇잖아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나무라는 에드윈. 그러거나 말거나, 캘리버는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진 나물들을 주워 주섬주섬 옮겨 담고 있었다.
“어차피 재활 훈련으로 꾸준히 움직여 줘야 하는데, 기왕 움직이는 거 선행이라도 하는 편이 좋죠.”
“…휴우, 그래.”
뭐라 한마디 덧붙이려던 에드윈은, 캘리버의 말에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뭐라 말을 한다고 들을 녀석이었다면, 애초부터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일 하겠다는 걸 하지 말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뭐, 여기에다가 올리면 돼?”
“예. 원래 여기에 있었어요.”
말릴 수 없는 놈이라면, 그냥 도와서 후딱 끝내는 편이 차라리 낫다. 코치 에드윈은 아예 할머니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아 손을 돕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뭐라고 하시는 거야?”
“글쎄요. 그래도 나쁜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아까 저한테 말할 때도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었고.”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대강 말의 뉘앙스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에드윈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내고는, 바닥에 떨어진 나물들을 소쿠리에 옮겨 담았다.
“그럼… 이제 그냥 드리면 되겠지?”
“다 주운 것 같네요.”
좌판에 늘어놓고 팔던 걸 그대로 갖고 돌아온 거라 양이 꽤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 손 두 개가 보태지자 순식간에 일이 끝났다.
“여기, 받으세요.”
“아유, 너무 고마워, 외국인 총각들. 땡큐! 땡큐!”
나물과 채소들이 소복하게 쌓인 소쿠리를 할머니에게 건네는 에드윈. 그러자 할머니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내가 줄 건 없고, 이거라도…….”
“오,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그녀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만 원짜리 지폐.
한국의 물가가 어떤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이게 꽤나 큰 금액일 것이라는 건 그들도 짐작할 수 있었다.
딱히 기대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무리한 보상을 받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손을 저으며 거절하는 두 사람.
“빨리 받아, 한국에선 이런 거 그냥 받는 거야.”
“하하, 음… 아, 그린 라이트! 그린 라이트!”
그럼에도 한사코 쌈짓돈을 쥐어 주려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캘리버는 말을 돌릴 뭔가를 찾다가 그녀의 뒤쪽을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신호가 들어와 있는 횡단보도의 초록불.
둘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으나, 할머니는 건너편으로 건너가야 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굳건했던 표정에 살짝 초조한 기색이 어른거렸다.
“아유, 총각들! 빨리 받아!”
“한쿡말, 못해요. 한쿡말 몰라.”
“아이고…….”
어지간한 상황에는 대처할 수 있다는 마법의 말!
캘리버가 유일하게 외워 둔 한국말을 입에 담자, 할머니는 잠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냥 가서 미안해! 땡큐, 땡큐!”
그럼에도 못내 마음이 남았는지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할머니. 두 사람은 그런 그녀에게 두어 차례 손을 흔들고는, 다시 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하니까 뿌듯해?”
“좋죠.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요. 근데…….”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던 캘리버. 하나 몇 걸음 걸었을까, 그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 가더니,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서고는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그… 아까 서둘러서 움직이다 살짝 삐끗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잘못됐나 봐요. 아까부터 점점 더 아파 오네.”
“아,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니깐!”
그 말에 에드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캘리버의 목소리는 얼핏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그의 몸 상태를 대략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간단하게 조치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드윈이 전문 의료 지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로 구단의 헤드 코치를 맡고 있는 만큼, 기본적인 진찰이나 응급조치 정도는 익히고 있다.
하나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건 상황이 꽤나 심각하다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일단 119부터…….”
“잠시,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드윈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있을 때.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저도 모르게 살짝 놀랐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어… 크흠, 누구십니까?”
“그냥 지나가던 길입니다만, 뭔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신 것 같아서요.”
에드윈은 헛기침을 내뱉고는,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과 같이 능숙한 영어로 답했다.
그들의 모습을 길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청년.
천마안마의 원장, 강태한이었다.
* * *
‘가까이에서 보니 더 잘 알겠군.’
한편, 에드윈에게 말을 거는 와중에도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 다른 남자, 캘리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로 생긴 문제가 아니야.’
온통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는 혈도의 모습.
원래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 서로 엉켜 있고, 붙어 있어야 할 것은 각자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다.
계속 손발을 절고 있는 것만 봐도 문제가 있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니 오히려 그 정도 증상만 나오는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이 정도 상황은 단순히 순간적인 충격이나 일시적인 이상 현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장기가 뒤흔들리거나 혈도까지 무리가 가해질 정도의 충격을 수십 번, 아니 백여 번 꾸준히 가해졌을 때나 생길 법한 상황이다.
‘곧바로 호전되기는 힘들겠어.’
그렇다 보니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것도 힘이 든다.
무언가 문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면야, 그 부분만 해결하면 어느 정도 조치가 된다. 자생력만 받쳐 준다면야, 몸이 스스로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 이런 경우는 다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충격으로 인해 몸 곳곳에 누적된 피해들이, 무언가가 발단이 되어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어렵게 꼬아 놓은 매듭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딱히 매듭은 없지만, 실뭉치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꼬여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뭐.’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강태한은 이미 이 남자를 도와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강태한이 한번 마음을 먹었다는 것의 의미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까다롭다고 포기할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혹시 의료인이십니까?”
“의료인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전문가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언뜻 애매하게 들려오는 답변.
하나 그 목소리에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와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하지?’
당연한 말이지만, 캘리버의 몸을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었다. 섣불리 뭔가 조치를 취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이 낯선 사람을 돌려보내고, 다시 119에 연락해서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일 것이다.
한데 왜일까.
방금 들었던 목소리의 담담한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일까.
이성은 ‘허튼짓하지 말고 구급차나 불러’라고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왠지 더 큰 기회를 놓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에드윈?”
결국 결론을 내린 에드윈. 그 말에 놀란 것은 옆에 있던 캘리버였다. 거절의 표시가 아니라, 평소 자기가 알던 코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결정에 순수하게 놀란 것이었다.
“그쪽도 괜찮으실까요?”
“…예, 뭐. 코치가 괜찮다면야.”
동의를 구하는 강태한의 말에 캘리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솔직히 이 낯선 남자를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에드윈 코치의 결정을 믿었다. 그가 이런 판단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럼…….”
한편, 캘리버의 대답을 듣자마자 강태한은 그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본인의 동의까지 받았다면야, 더 이상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강태한은 곧장 그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반대 손으로 주먹을 쥐어 척추 쪽을 가볍게 후려쳤다.
“어억?!”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린 캘리버.
그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듯,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던 에드윈은 아예 당황한 표정으로 얼어 버렸다.
‘일단 혈도부터 깨워 놓고…….’
하나 강태한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주먹도 풀지 않았다. 허리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척추를 따라 차례차례 올라가며 타격을 계속한다.
“어어어엇……!”
“당신, 전문가 맞습니까?”
결국 보다 못한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그를 제지하려는 듯한 목소리. 일단은 믿음을 가져 보려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믿음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으하아아앗!”
하나 에드윈이 그에게 다가가던 도중.
강태한이 캘리버의 가슴팍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쑥 누르자, 깊은 탄성과 함께 한참 동안 구부러져 있던 허리가 빳빳하게 펴졌다.
“그걸 그렇게 억지로 편다고 해결될 리가…….”
“아뇨, 아뇨, 코치님!”
억지로 힘으로 눌러서 펴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애당초 역효과만 일으키는 행동이다.
참다못해 화가 난 목소리를 내는 에드윈. 하나, 정작 캘리버 본인이 손을 들어 그런 그를 만류했다.
“지금 너무 개운한데요?”
“…개운하다고?”
“예. 신기할 정도로요.”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캘리버는 허리를 편 상태로 가볍게 몸을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방금 전까지 고통스러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등은, 등은 괜찮아?”
“예. 좀 놀라긴 했는데, 아프진 않았어요. 오히려 뭐라고 해야 되나… 튀어나와 있던 못을 집어넣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강태한이 그의 등을 후려친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연하게도 때리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충격을 가해, 닫혀 있던 혈 자리를 열어 젖히고 막혀 있던 혈도가 순환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 놓은 것.
그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혈도의 순환은 다시 활성화되었고, 일시적으로 생겼던 허리의 통증도 자연스레 완화시켰던 것이다.
“이야, 이거 정말 감사… 허윽!”
하나, 강태한이 말한 조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깨도 한번 두드리고, 안쪽 근육까지 닿을 기세로 엄지손가락을 강하게 밀어 넣기도 한다. 때로는 뭔가를 조립하듯 거칠게 손을 움직이기도 한다.
우드득, 빠득, 으드드득.
그리고 중간중간 울려 퍼지는 섬뜩한 소리.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를 들어도 등골이 쭈뼛해질 법한 소리였는데, 자신의 몸에서 나는 걸 듣고 있자니 두 배로 섬찟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얼추 됐군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고, 강태한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을 때.
“흐아아아…….”
캘리버는 그제야 한껏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 어라?”
그러다 문득, 뒤늦게 발견했다.
자기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행 보조기를.
저걸 붙잡지 않으면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든 것이 자신의 몸 상태였는데, 지금 그는 보행 보조기를 방치해 놓은 채 멀쩡하게 서 있는 중이었다.
“어어?”
게다가, 다리가 멀쩡하다.
정확히는 증상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다.
물론 완전히 멀쩡해진 것은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떨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서 있는 것 정도는 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일단 장소가 장소인 만큼 간단한 조치만 취해 드렸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캘리버. 놀란 것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은 오직 강태한뿐.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 캘리버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행 중이라 바쁘긴 하겠지만, 혹시 시간이 되면 연락하고 찾아오시죠. 영업시간에는 무리지만, 저녁 시간이라면 제가 시간을 좀 내 보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어,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명함을 건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강태한.
그런 강태한을 에드윈이 불러 세우자,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멀어지기 시작하는 강태한.
두 사람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에 쥐어진 명함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글쎄요… 찍어서 여행사 직원한테 물어볼까요.”
“좋은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는 에드윈.
이 명함을 건네준 사람이 천마안마의 원장 본인이었다는 걸 두 사람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