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81화
“으음…….”
유세아는 찌뿌둥한 목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직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천장. 다만 처음 보는 천장은 아니다.
“…헤헤.”
그녀는 여기서 눈을 뜬 게 마음에 드는 듯, 웃음을 흘리며 덮고 있는 이불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하나 이윽고 뭔가 생각이 난 듯, 유세아는 휙, 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그녀는 아쉬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한 씨!”
“일어났어요?”
그러자, 강태한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 쪽에서는 뭔가 끓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진짜 제가 아침 준비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방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개면서 툴툴거리듯이 말했다. 마냥 빈말은 아닌 것이, 전날 냉장고를 둘러보며 메뉴까지 선정해 놨던 유세아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뭐, 굳이 누가 한다고 정해 놓을 필요가 있나요. 그냥 먼저 일어나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강태한이 항상 유세아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
유세아는 스마트폰을 집어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오전 여섯 시가 될 시간.
솔직히 이 정도면 객관적으로 봐도 꽤 이른 시간이지 않은가? 본인이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난 시간이다.
하지만 강태한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서 식사 준비까지 하고 있는 상황. 유세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태한 씨는 원래 항상 이런 시간에 일어나요?”
“뭐… 그건 그때그때 다르죠?”
강태한은 싱긋 웃으며 애매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태한에게 수면 시간은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수면의 효율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필요하다면 한 달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다. 내공이 일정 수준 이상 쌓인 덕분에, 심공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잠을 자는 것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빨리 세수부터 하고 같이 아침 먹어요.”
다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는 상황.
강태한은 적당히 화제의 방향을 돌려놓은 다음, 냄비가 끓어오르고 있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네에.”
유세아는 아직 아쉬운 기색이 남았는지 일부러 목소리를 길게 늘어트리고는, 침실을 빠져나와 곧바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 덕분일까.
헤매는 일 없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발걸음이다. 이윽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선 유세아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후후.”
자그마한 양치용 컵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칫솔.
지난번에 유세아가 놓고 갔던 그대로다.
단순하게 보면 그냥 그뿐이지만… 왠지 이 공간에 함께 있어도 된다는 증표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연인의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흔적에 그녀는 괜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양치를 하고, 이제 막 세수를 시작했을 쯤.
“쓸 만해요?”
“네? 뭐가요?”
“폼 클렌징이요. 저번에 그거 없으면 세수 못 한다고 해서 따로 사 와 봤는데.”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반응이었다.
“그, 그렇게 말하면 제가 엄청 까탈스러운 사람인 것처럼 들리잖아요!”
“뭐 어때서 그래요. 여배우가 자기 피부에 까탈스러운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오히려 태한 씨가 이상한 거예요. 요즘 비누로 세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듣기로 요즘엔 군대에서도 다 폼 클렌징으로 씻는다던데.”
강태한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뭐, 별다른 문제는 없던데요.”
“그게 참 미스테리란 말이죠. 그러면서 피부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좋은 편이니까요.”
“뭐, 그야…….”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피부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대부분 체내에 쌓인 노폐물이 원인이 되는데, 강태한의 체내에는 그런 게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문제가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폼 클렌징은 괜찮아요?”
“어디에 있는… 아, 찾았어요.”
이번에도 스리슬쩍 화제를 돌리는 강태한. 한편, 유세아는 그제야 폼 클렌징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좋은 걸로 사셨네요?”
“그냥 동네 가게에서 적당한 걸로 샀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 브랜드는 백화점에만 들어와 있는 브랜드라는 걸 유세아는 알고 있었다.
물론 폼 클렌징이 비싸 봤자 얼마나 하겠냐만… 여기서 중요한 건 가격이 아니다. 이건 강태한이 쓰지 않는 물건이고, 순전히 유세아를 생각해서 사 놓은 물건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좋은 걸로 잘 사셨네요. 잘 쓸게요, 태한 씨.”
“쓸 만하다니 다행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주방으로 되돌아가는 강태한.
한편 유세아는 그 뒤에도 한동안 폼 클렌징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의 배려야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이었다.
* * *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건데 말이야.”
천마안마의 안마실 중에 한 곳.
안마가 시작되고 한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대에 누워 있던 손님이 넌지시 말했다. 감탄이 묻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최 선생 손맛이 요즘 날로 좋아지는 것 같아.”
“하하, 칭찬해 주셔도 뭐 안 나옵니다.”
손님의 말에 최성현은 능청스레 답했다. 다만 그 대답과는 달리, 입가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냥 칭찬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래. 내가 최 선생한테 꽤 자주 받았잖아? 근데 요즘은 한 번 한 번이 새로운 느낌이라니까.”
손님은 천마안마가 열린 직후부터 최성현에게 꾸준히 안마를 받아 왔던 단골 중에 한 명이다. 예전에 예약이 한가할 때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받은 적도 꽤 많았을 정도.
다만 평소 말을 자주하는 손님은 아니고, 묵묵히 안마를 받고 나서 마음에 들었으면 다음 예약을 잡는, 그런 과묵한 스타일의 손님이다. 그런 사람에게 거듭 칭찬을 들은 탓일까.
“에이, 뭘요. 저는 한참 멀었죠.”
아닌 척하면서도 최성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전보다 솜씨가 더 좋아진 것 같다는 말, 그 말 자체는 예전부터 종종 들어왔었으나, 요즘은 특히 자주 듣고 있었다. 거의 단골마다 한 번씩은 언급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물론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수준이 달라지기는 했지.’
실제로 자기 실력이 훌쩍 뛰어오른 걸 본인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칭찬들이 빈말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 손을 움직이는 최성현.
방금 읽어 냈던 혈도의 상황을 바탕으로 어깨의 혈자리를 짚어 내고, 흐름이 약해져 있어 탁기가 고여 있던 곳에 물길을 틔워 낸다.
“어흐…….”
강태한이 하는 것에 비하면 아직 꽤나 미숙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쾌감이 흐른다. 물이 애매하게 졸졸 나오던 수도꼭지가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라고 할까. 손님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직접 혈도를 읽어 낼 수 있고, 적절한 혈을 짚어 낼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해진 안마.
그 전에 해 왔던 안마 솜씨도 제법 뛰어난 편이었지만, 이건 거기서 하나의 영역을 더 열어 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새로운 감각을 익힌 거니까.
그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
그 전에는 불가능했었던 조치들.
물론 아직 강태한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안마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다시 혈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체내의 혈도를 느낄 수 있는 것과 느끼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정말 큰 차이였다. 말 그대로 거대한 벽을 하나 넘어선 느낌이라고 할까.
“이 정도면 여기 원장님 실력 수준까지 금방 따라잡는 거 아니야?”
“하하, 그건 좀 무리일 것 같네요.”
다만 벽을 넘어서면서 깨달은 것도 있다.
별 의도 없이 입에 담은 손님의 말에, 최성현은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벽을 넘어서면, 거기에 막혀 있던 경치가 보이는 법이다. 최성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감각을 갈고닦으면 닦을수록,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강태한이 도달해 있는 경지는… 아직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 사이에 몇 개의 벽이 더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만 해 볼 뿐.
“뭐… 그래도 그게 목표이긴 해요.”
다만.
그래도 그걸 목표로 삼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끝까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을 걷다 보면 얻는 게 있지 않겠는가. 최성현은 얼핏 가벼우면서도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 * *
다음 날.
강태한은 라이너 호텔의 로비에 위치해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자기 집 거실처럼 익숙해진 곳. 누군가가 찾아올 때마다 대부분 이곳에서 만나 왔으니, 그만큼 친숙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마스터 강! 여깁니다!”
“……?”
하나 지금 상황에 강태한은 약간 의아해하는 반응을 내비쳤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호칭에 고개를 돌려 보니, 마르케시가 손을 흔들고 있던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마르케시.”
“하하, 그러게요. 반갑습니다!”
“한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바로 이틀 전, 유세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찰나 전화를 걸어왔던 건 마르케시였다. 그리고 그때 오늘의 약속을 잡아 둔 것도 마르케시였다.
하지만 분명 전화상으로는 현지에 있는 다른 직원을 대리인으로 보내겠다고 했었는데… 막상 자리에 와 보니, 마르케시 본인이 앉아 있는 것이다.
“이틀 전만 해도 인도에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는 것인 만큼,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그걸 위해 인도에서 한국으로 곧바로 날아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가 문제지.
“아, 그래도 겸사겸사 다른 일도 하러 왔습니다. 대청 그룹 쪽과 진행시킬 이야기도 좀 있어서 말이죠.”
다만 강태한의 당황한 기색을 부담스러워하는 표시로 해석했는지, 마르케시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시죠.”
‘편하게’ 부분을 강조하듯이 말하는 마르케시. 그 모습에 강태한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넌지시 말했다.
“미스터 마르케시야말로 편하게 계세요.”
“예? 아… 아하하.”
강태한의 말에, 마르케시는 그제야 자기가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힘을 주고 뻣뻣하게 앉아 있는 것이, 마치 면접이라도 보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음료는 주문하셨나요?”
“아, 선생님이 오시면 주문하려고 했지요. 어디 보자, 여기는 뭐가 괜찮습니까?”
일부러 가벼운 화제를 던지는 강태한. 그 의도를 읽어 냈는지, 마르케시도 비교적 편해진 말투로 답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주문까지 마치고 난 이후.
“…그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강태한이었다.
“어쩐 일로 한국까지 오셨습니까?”
지난번 통화를 할 때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일이 좀 있다’라는 말까지는 했지만, 그 부탁이 무엇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만큼 비밀스러운 내용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사적인 내용이라 그런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에서 한국까지 본인이 직접 날아온 것을 보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하하, 바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 단도직입적인 모습에 마르케시는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만 그런 가벼운 모습도 잠시, 한동안 뜸을 들인 그는, 사뭇 진중한 목소리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한테는 은인 같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니, 은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게 더 낫겠군요.”
마르케시의 말에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진지한 분위기. 이럴 때는 괜한 리액션을 하는 것보단,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많은 은혜를 입은 만큼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생신 파티가 있으셔서 그때야 겨우 찾아뵈러 갔는데,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시더라고요.”
“어딘가 다치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마르케시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다만 젊으셨을 적에 몸을 워낙 험하게 굴리셔서… 그 여파가 나중에, 이제야 나오는 모양이더라고요. 몸이 이미 닳은 상태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병원에서도 어쩔 방도가 없다고 하고요.”
마르케시의 말에는 씁쓸한 기색이 맺혀 있었다. 반쯤 시선을 내리깔고 말하던 마르케시는 고개를 들어 강태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요즘 한창 바쁘신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르케시의 말에 강태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 자체는 꽤나 흔한 일이다. 다른 일에 신경이 팔렸다가 정작 소중한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해, 나중에 뒤늦게 후회하는 일.
다만, 흔한 일이라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안고 가는 마음의 짐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저야 크게 어려울 것 없지요.”
이윽고, 강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씀하시면, 저녁에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기한테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자기도 도움을 준다. 그것이 강태한의 철칙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