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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178화 (178/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178화

“키가 좀 작아졌냐뇨…….”

“아니면 앉은키가 좀 커졌다고 했어야 했나? 보면 알겠지만 요거, 요 바퀴가 꽤 크거든.”

아르힌은 휠체어의 바퀴를 탁, 탁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으나, 정작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르케시는 그러지 못했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거창하게 무슨 일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그냥 젊었을 때 몸을 막 굴리던 업보를 지금 받는 거지.”

그는 한차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늘 쪽에 있는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휠체어를 돌려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고, 마르케시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래, 술은 뭐로 할 텐가?”

그렇게 인파 속을 벗어나 테이블에 도착한 두 사람.

마르케시가 자리에 앉자, 아르힌이 넌지시 물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으나, 얼굴에는 방금 전보다 다소 지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뭐든 다 괜찮은데, 와인은 추천을 못하겠구만. 어제 급하게 구하려니 싸구려밖에 없더라고.”

“그럼… 차가운 맥주나 한잔 주시죠.”

“하하하! 차가운 맥주라. 돈은 많이 벌어도 입맛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 아무래도 시원한 맥주가 싸구려 와인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구만.”

아르힌은 웃음을 터트리며 뒤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컵마저도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 한 잔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래서.”

다만 마르케시의 관심사는 맥주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손으로 붙잡은 맥주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겁니까? 그런 이야기는 제가 못 들었는데 말이죠.”

“그럴 만하지. 이걸 타고 다닌 지 아직 한 달이 채 안 되었거든. 굳이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저도 다른 사람입니까?”

“넌 맨날 사고치고 다니는 아들 같은 놈이지.”

아르힌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에는 단순한 지인, 그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고마움, 미안함, 그런 복잡한 느낌. 그리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마르케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제가 왜 이제야, 그것도 아저씨 생일날에 알아야 하는 거냔 말입니다.”

“그야, 뭐…….”

아르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복잡하던 표정에는 미안함의 비중이 좀 더 커져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머쓱해하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하면 네가 걱정할 게 뻔하잖냐.”

“…….”

그리고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아르힌의 얼굴. 뭐라 말을 하려던 마르케시는 순간 울컥했는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는 끼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 * *

마르케시는 어렸을 적에 양친을 잃었다.

돈을 목적으로 한 납치였다는데, 아무래도 납치의 기본도 모르는 놈들이었던 모양이다.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목숨을 잃으셨다니 말이다.

다만 자신의 유년기가 불행하기만 했는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아르힌 두르.

바로 이 사람이 친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봐 줬으니까.

법적으로 따지자면 후견인 정도의 입장일 뿐이지만, 마르케시 자신에게 있어 아르힌의 존재는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사회의 예절과 매너라든가.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법이라든가.

자신의 감정을 교양 있게 표출하는 방법, 야외에서 수프를 끓이는 법,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는 법 그리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느낄 수 있는 온화함…….

그런 것들을, 마르케시는 아르힌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마르케시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짐을 짊어질 준비가 되었을 때, 아르힌은 후견인이자 의형제로서 맡고 있던 모든 걸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 줬다.

그는 아르힌에게 믿음과 사랑을 배웠다.

먼저 다음 세계로 넘어가신 아버지가 들으면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거 이태리에서 온 귀한 놈인데, 비싼 의자 다 부서지겠다, 이놈아.”

“등 좀 세게 기댔다고 부서지면 제 잘못이 아니라 만든 놈들의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일까.

지금 상황이 괜스레 미안하고, 섭섭하고, 복잡하다. 마르케시는 아르힌의 말에 짐짓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짧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예요?”

“말했잖냐. 어렸을 때 몸 함부로 굴리던 업보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아르힌 두르는 현재 인도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 감독 중의 한 명이기도 하지만, 그전에는 발리우드에서 알아 주던 국민 배우였다.

훤칠한 외모와 근육질 위로 윤기가 흐르는 구릿빛 피부. 그리고 그 웃을 때 드러나는 새하얗고 고른 치열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

다만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거의 모든 장면을 스턴트맨이나 특수 효과 없이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는 것이다.

날아가고 있는 헬기를 줄사다리만 잡고 기어 올라간다든가, 건물의 옥상에서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다닌다든가, 달리는 기차 위에서 싸운다든가…….

소위 발리우드 액션이라 불리는 거창한 것들이 있지 않은가? 당시에는 CG의 기술도 많이 부족했는데, 그걸 스턴트맨 없이 배우가 직접 연기한 것이다.

당시 붙었던 별명은 미스터 풀메탈.

다만 당연하게도, 아르힌의 몸은 강철이 아니었다.

은퇴의 계기가 된 것은 5층 높이에서의 낙하 사고.

다행히 당시에는 하루 정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걸로 그쳤으나, 결국은 배우를 그만두고 감독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다행히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 나갔고, 당연히 그 이상 연기에 목숨을 걸며 몸을 혹사시키는 일도 없었다. 다만.

“감독 생활하면서 반쯤 요양 생활을 보내긴 했지만… 그런다고 이미 상한 몸이 회복되진 않는 거지.”

몸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단련이 된다.

하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오히려 더 마모되어 버리는, 그런 소모품 같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관절.

아르힌은 자기 두 발로 뛰어 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걷는 것도 힘들어 휠체어 신세를 지기 시작한 지금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리라.

“왜 그걸 이제야 말해요, 아르힌.”

다만 마르케시는 그런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다.

몸이 좀 불편하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통화도 정기적으로 해 왔지만… 매번 말하는 ‘별일 없다’라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듯 원망의 기색이 담겨 있는 목소리.

하나 그 원망의 방향은 아르힌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다름 아닌 마르케시, 자기 자신을 탓하는 마음.

결국은 자기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지금 아르힌의 나이와 젊었을 때의 행적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인데. 굳이 약한 소리는 꺼내지 않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자기는 수화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저택에 찾아가는 빈도도 점점 줄어들었다. 신입이라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경비원이 자기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말이다.

만약 정말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래선 안 됐다. 아니… 설령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안 됐다. 마르케시는 스스로를 질책하듯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딱, 소리 나게 내리쳤다.

“미안하긴 뭘 미안해. 멀쩡한 이마는 왜 때리고?”

그런 마르케시의 모습에 아르힌은 일부러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가 굳이 아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죄책감이나 가지라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요새 네 덕분에 몸 상태도 꽤 좋아졌어.”

“…제 덕분에요?”

아르힌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한 일도 없다. 마르케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아르힌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쪽, 저택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마 전에 네가 보내 준 거 있잖냐. 그… 마스터?”

“…마이스터요?”

“그래! 더 마이스터였나, 하는 안마 의자. 그거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어. 자기 전에 한 번씩 하는데, 꿈자리가 아주 편안하다.”

인도에 맨 처음으로 ‘더 마이스터’를 들여왔을 때, 마르케시는 가장 먼저 두 대를 따로 빼놓았었다.

한 대는 개인용으로 쓸 목적으로 자기 방에 갖다 놓았고… 다른 한 대는 비서를 시켜 여기 이곳, 아르힌의 저택으로 옮겨 놓았다.

다만 아르힌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걸 알고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게 있으면 가장 먼저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랬다면… 그나마 다행이네요.”

뭔가 도움이 되었다니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마르케시는 조그맣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의자 뒤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그쯤이었다.

‘…음?’

더 마이스터를 떠올리고 나니, 이와 연결되어 자연스레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른다. 다름 아닌 더 마이스터의 기술 제공자, 천마안마의 강태한이었다.

“…아르힌.”

“왜?”

아르힌의 건강은 의학적으로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병이 생기거나 어딜 다친 것이 아니라, 이미 몸이 소모된 것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강태한이라면, 그가 아는 강태한이라면.

뭔가 다를 수도 있다. 물론 확신은 할 수 없다. 하나 한번 시도해 본다고 무슨 손해가 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아직 여권 기간 만료 안 됐죠?”

마르케시는 짐짓 의미심장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 * *

올림픽 양궁 국가 대표, 정가인 선수가 다녀간 이후.

처음 예정되었던 대로, 다른 선수들도 차례차례 천마안마에 방문하여 안마를 받기 시작했다. 정가인 선수와 같은 사고로 후유증을 앓는 선수들이었다.

정가인 선수의 기적적인 회복을 보고 계속 진행시키기로 한 것. 다만 그렇다고 우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과연 이게 정말 안마 하나로 해결된 문제인가.

혹시 다른 요소들이 겹쳐서 생긴 우연이 아닌가.

설령 안마 덕분에 해결된 일이라 해도, 과연 다른 선수들도 정가인 선수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들이 남아 있던 것이다.

다만 그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이게… 말이 되나?”

“하하하! 붕붕 날아다닐 것 같아!”

정가인으로 다음으로 찾아왔던 태권도 선수 두 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컨디션은 최악에, 연습은 할 수라도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는데… 천마안마에 다녀온 이후로는 거의 새 사람이 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이 후유증을 호소하던 부위는 각각 허리와 머리 부분이었다.

정가인은 오른쪽 허벅다리에 문제가 있었으니, 말하자면 각각 다른 부위를 다치고 다른 증상을 호소하던 세 사람이 모두 효과를 봤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만능인데?”

“그러게…….”

아직 뭐든지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폭넓은 범위의 증상들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반쯤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후로는 의심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서로 앞다퉈 선수들을 보내려 하고, 심지어는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사고를 당하지 않은 다른 종목의 선수들까지 안마를 받고 싶다고 슬그머니 끼어드는 상황이었다.

“흐으음… 글쎄요.”

한편 천마안마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강태한.

그는 턱에 손을 올리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강태한의 대답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 우대석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이긴 했으나, 딱 그 정도뿐이었다. 그 또한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다른 선수들까지 안마를 해 주시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영업에 지장이 가시겠죠. 제가 무례한 부탁을 드린 것 같습니다.”

방금 전, 우팀장은 강태한에게 ‘혹시 사고를 당하지 않은 선수들도 찾아와도 되겠느냐’라는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돌아온 대답은 거절.

하나 우대석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는 선수들에게 안마를 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태한의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그가 그렇게 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선의를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최악의 대처 중의 하나는… 거기서 더 큰 부탁을 하는 것이다. 우대석은 고개숙여 사과를 표했다.

“아닙니다. 선수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고, 팀장님이 무슨 마음으로 말씀하셨는지도 이해가 가니까요.”

하지만 강태한이 그렇게 불쾌한 기분으로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대표라는 입장인 만큼, 선수들은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우고 싶을 것이다.

뭐 승부욕도 개인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국가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국제경기에 아무런 승부욕도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 팀장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

다만 강태한의 입장에선 한번 선을 그었을 뿐.

안 그래도 페르모 가이드에 이름이 올라간 이후로, 예약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아무리 국가 대표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 특별 손님이 가게에 꾸준히 들락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면… 다른 손님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러니까… 제가 쉬는 날에 선수촌에 한번 방문을 하도록 하죠. 봉사 활동 느낌으로요.”

강태한은 다른 방법을 넌지시 꺼냈다.

원래 예약이 불가능한 시간에 특별 손님이 매일같이 들락거리는 건 국가 대표 선수들이 특혜를 받는 그림이 되지만.

강태한이 쉬는 날에 봉사 활동을 나간다고 하면, 그걸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쪽이 훨씬 더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그림이다.

“…네?”

“못 들으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다만 우 팀장은 자기가 들은 말이 맞나 불확실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곤란하신 건가요? 그럼 없던 일로 하셔도…….”

“아뇨아뇨!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강태한이 한 번 더 물어보자, 우 팀장은 거세게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답했다. 행여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기겁하는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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