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173화 (173/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173화

선반에 있는 쟁반을 하나 꺼내 놓고, 그 위에는 접시와 컵 받침, 찻잔, 작은 주전자를 차례대로 올린다.

접시에는 비스킷 봉지 하나를 뜯어 그대로 담아 낸다. 그리고 찻주전자에는 계량 수저로 칡청 한 숟가락을 집어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젓는다.

“흐아아암.”

이렇게 하면 손님에게 차를 내갈 준비가 끝난다.

작업 자체가 복잡할 게 없어 어려울 이유가 없는 데다, 몇 번만 해 봐도 손에 익을 정도로 단순한 일.

일을 대신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 최성현은 순식간에 세팅을 마쳐 놓은 채, 한가롭게 하품을 내쉬며 칡차를 젓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참 신기하네.’

그러던 와중, 최성현은 젓고 있던 칡차를 가만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전혀 모르고 마셨지만, 지금은 이 안에서 은은하게 일렁거리고 있는 기운을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원래도 몸에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막연한 생각에 가까웠다. 그냥 안에 칡이 들어 있으니 몸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정도.

하나 이렇게 기감이 열리고 난 뒤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막연하게 ‘몸에 좋겠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얼마나 좋은지 이해를 했다고 할까.

이 안에는 최성현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영기가 담겨 있었고, 더군다나 그 영기는 흡수가 용이하도록 한차례 성질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니 뭐, 몸에 좋을 수밖에.

손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이가 꽤 있어 몸이 허하신 분들이 그렇게 찾으시던 이유가 있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이 차의 효능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건 손님들뿐만이 아니라 안마사들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어도 그냥 가끔 생각났을 때나 한잔 마시는 정도였는데, 요새는 아예 커피를 끊고 이것만 마시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혹시 태한이가 의도해 놓은 그림인가?’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안마사들이 자유롭게 칡차를 마실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자연스레 이 영기들을 접하고 흡수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기’라는 개념 자체에 익숙해지는.

멀리 갈 것도 없다.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사례 중의 하나이지 않은가?

물론 이 칡차를 마신다고 모든 사람의 기감이 열리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금의 최성현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으음…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안마사들의 실력을 더 끌어올리고자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몸에 좋으니까 비치해 놓은 걸 수도 있다.

강태한이라면 어느 쪽이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

하지만 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적어도 최성현의 입장에선 어느 쪽이건 그리 나쁘지는 않은 일처럼 보였다. 그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곤 세팅해 놓은 쟁반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실장님.”

“왜?”

“이거 2번 방이라고 했었죠?”

“맞아. 고맙다.”

“진짜 이것까지만 하고 퇴근합니다.”

매듭을 짓듯 확고한 목소리로 말하는 최성현. 그 말에 황 실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미안해. 매번 고맙다.”

“…뭘요. 별것도 아닌데.”

딱 선을 긋는 것처럼 말하다가, 막상 부드러운 반응이 돌아오면 괜히 머쓱해하는 최성현이다. 그는 짐짓 시큰둥한 척 손을 휘휘 내젓고는 다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후에 도착한 2번 방.

방문을 조심스레 똑똑 두드리자, 곧바로 안쪽에서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좀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문을 여는 최성현.

당연한 말이지만, 안쪽은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운 상태다. 최성현은 한 손에 쟁반을 든 채로 가볍게 목 인사를 건내고,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는 벽을 더듬어 조명등을 켰다.

‘…어라?’

조명등이 켜지고 은은한 주황빛이 들어온 방 안.

쟁반을 내려놓기 위해 테이블로 걸어가던 최성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앉아 있는 손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그 이유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 수상하고, 이야기를 꺼내 봤자 의심만 더 살 뿐인 말이었지만… 이 손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아름다웠던 것이다.

한 기운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다섯 가지의 색채.

아직 기감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그러세요?”

다만,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상대방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시간. 침대에 앉아 있던 손님, 정가인은 최성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아니… 그, 다른 게 아니고…….”

그러자 오히려 최성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비어 있는 손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더듬더니, 이윽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아름다우셔서요.”

“…네?”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정가인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으아아아!’

최성현은 스스로 꺼낸 말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 * *

정가인이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놀라움은 천천히 다가왔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가볍게 스트래칭도 해 보고, 신기해서 깡총깡총 뛰어도 보고.

각 과정들을 거쳐 갈 때마다, 그녀의 느낌과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몸이 너무 가볍고 편안하다고.

단순하게 ‘잘 자고 잘 쉬었다’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부분까지 고쳐진 기분이다. 기계로 치자면 낡은 회선을 교체하고 선 정리까지 싹 끝마쳐 놓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확실한 건 직접 활을 잡아 봐야 알겠지만,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교통사고 후유증도 사라진 것 같았다.

아마 지금 이 상태라면 예전처럼 문제없이 활을 쏠 수 있으리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아름다우셔서요.”

“…네?”

방으로 들어온 직원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정가인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무슨 말이었는지 제대로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튀어나간 말. 하나,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을 해 봐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가 아름답다?

기가 맑아 보인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다.

예전에 친구를 보러 수원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했었던 말이다.

이것도 그것과 비슷한 부류의 말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사실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데 황당한 것은, 정작 말을 꺼내 놓은 본인도 허둥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상한 말을 꺼내 놓은 남자는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는데, 보는 사람이 괜스레 안타까워질 정도였다.

“아, 하하하. 그, 제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요.”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좀 오래 흘렀을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으로 보이는 남자는, 뭐라도 수습을 해 보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아직 붉게 물든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걸 뭐라 해야 되나, 그냥 눈에 딱 보이는 느낌이! 굉장히 아름다우시다, 뭐 그런 거죠. 첫 인상이라 해야 하나? 후광 같은 느낌이죠.”

“…킥.”

허둥거리며 뭐라 말을 늘어놓는 최성현의 모습.

그 모습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가인의 입꼬리가 어느 순간 슬쩍 올라갔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그러던 중, 정가인은 어느 순간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참고 있다가 터진 웃음이라 그런지, 웃음이 나오는 시간이 유독 길었다.

“하하… 어쨌거나, 죄송했습니다.”

최성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까지도 들고 있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잘 수습이 된 모양.

난감하고 어색한 상황이라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상한 사이비로 보이는 것보다는 그냥 웃긴 말실수 한번 한 것으로 보이는 게 훨씬 낫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고, 가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말이다.

“…후우우. 죄송합니다. 너무 웃어 버렸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이상하게 말을 했는데요.”

최성현은 두 손을 살살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했던 것치고는 잘 풀어 나갔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근데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했더라.’

하나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뒤섞여 버린 탓일까, 다음 절차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리 복잡한 메뉴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잘 쉬셨나요?”

그렇다고 이 어색한 침묵을 이어 나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최성현은 그나마 이 상황에서 꺼낼 만한 말을 입에 담았다.

“신기할 정도로요.”

“다행입니다. 그럼…….”

“아, 저 차는 마셔도 되는 건가요?”

그럼 편안히 쉬시다 나오세요.

적당한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려던 최성현이었으나, 그 말을 제대로 꺼내 놓기 전에 정가인이 먼저 쟁반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 물론이죠. 한 잔 드릴까요?”

“그럼 고맙죠.”

최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칡차의 향. 달큰한 꿀 냄새에 섞여 들어오는 쌉쌀한 칡의 향이 제법이다. 최성현이 찻잔을 건네자,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은 정가인이 조그맣게 감탄을 터트렸다.

“평범하게 티백 녹차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여기는 나오는 차부터가 다르네요.”

“하하… 손님들한테 평가가 좋더라고요.”

“그럴 만하네요. 이건 무슨 차인가요?”

“칡차에요. 원장님이 직접 만드는 겁니다.”

“칡차라… 처음 마셔 봐요.”

한 번 더 향기를 맡아 보고 조심스레 입가로 가져가는 정가인. 최성현은 팔짱을 끼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상황이 마음대로 되질 않네…….’

평소처럼 쟁반만 놓고 가면 되는데 말이 헛나가고, 어떻게 수습을 해서 빨리 자리를 뜨려 했더니 왠지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뭐. 그렇다고 나쁠 건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다고 했었던 말. 그 말 자체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꺼낸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지어 낸 것은 아니었다.

툭 까놓고 말하면…….

왠지 끌린다. 비단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좀 더 이 자리에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 실제로 맛도 좋네요!”

그때쯤 조심스레 차 한 모금을 마신 정가인이 조그맣게 감탄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최성현 또한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 *

“가게 전용 어플이요?”

다음 날 아침, 천마안마의 휴게실.

소파에 앉아 인터넷 뉴스를 살펴보고 있던 강태한은, 황 실장이 건넨 말에 넌지시 되물었다.

“그래. 그쪽이 아무래도 편하지 않을까 해서.”

황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답했다.

고작 하루 이틀 전화선을 뽑아 놨다고 해서 쏟아지던 예약 문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가게의 전화선은 꽂아 놨지만, 예약 손님이 몰려들어 가게가 바빠질 때에는 다시 뽑아 놓고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그게 좋기는 하겠네요.”

현재 상황에선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걸, 강태한도 인지하고는 있었다. 이번에 직원을 늘리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상 전부 안마사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다만 직원을 늘린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따로 콜센터를 두는 게 아닌 이상 말이다.

“그쪽이 더 편한 손님들도 많으실 테고요.”

“그렇지.”

그렇다면, 인터넷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이다

사실 손님들한테서도 종종 그런 목소리가 나오곤 했었다. 혹시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느냐고.

아무래도 그렇게 운영하는 편이 비어 있는 날을 확인하기도 편할 것이고, 황 실장의 입장에서도 일일이 예약 일정을 기록해 놓지 않아도 되니, 양쪽 모두 여러모로 편리해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면 한번 진행해 볼까?”

“혹시 아는 프로그래머분 있으세요?”

“다리 몇 번 건너면 있겠지.”

황 실장의 말에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뭣하면 호텔 쪽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쪽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예약이 더 활발하다고 들었으니까.

“저 왔습니다.”

그때쯤, 휴게실의 뒤쪽 문을 열고 최성현이 들어왔다. 인사를 하는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피로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냐?”

“왜요?”

“좀 피곤해 보여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슬쩍 물어보는 황 실장.

예전에야 저런 모습이 종종 있었지만, 요 근래 건실한 삶을 살기 시작한 후로는 별로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어제 좀 늦게 잤거든요.”

“그래? 무슨 일로.”

“그게…….”

황 실장의 말에 답하려던 최성현은 순간 말을 멈췄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방금 전보다 어색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적당히 둘러대며 말을 피하는 최성현.

어제 가게에서 만났던 손님과 친해져서 밤새 카톡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고는, 왠지 말하기가 어려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