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71화
“코치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 벤치에 앉아 있던 정가인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평소와 같이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괜찮아요.”
“…뭐가.”
“별일 없을 거예요. 생각 외로 금방 나을 수도 있고… 저 대신 다연 언니가 나가도 되잖아요.”
김 코치가 되묻자, 그녀는 평소와 같이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히려 자기를 위로하려 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송다연은 양궁 국가 대표 후보에 있었던 선수 중의 한 명이다. 지금 국가 대표에 있는 선수들이 더 뛰어날 뿐이지, 기수만 조금 달랐다면 충분히 국가 대표에 이름을 올릴 만한 기량을 지닌 선수다.
아마 정가인이 부상과 컨디션 문제 때문에 기권을 하게 된다면, 그 자리는 송다연으로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정가인은 사실상 수석이나 다름없는, 다른 선수들 사이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줬던 선수다. 냉정하게 대체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코치로서 ‘그건 아니다’라고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냐, 못 하냐를 떠나서…….
김 코치는 정가인이 국가 대표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알고 있다.
그가 그녀의 코치를 맡은 건 국가 대표에 뽑힌 이후로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전부터 업계 내에서 소문이 자자하기도 했고, 그 짧은 기간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평소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별로 없고 언뜻 보기에 항상 냉정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승부욕이 많고 열정도 넘치며… 배려와 걱정도 많은 아이.
지금 담담하게 꺼내 놓은 이 말도 코치와 스태프진들을 생각하여 말을 꺼낸 것이리라.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힘든 상황이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럴 때가 오면 그렇게 해야겠지.”
김 코치는 올림픽 양궁 국가 대표 팀의 코치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선수들이 제 기량을 다할 수 있도록 지도를 하는 역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메달을 따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만약 이대로 정가인의 상태가 계속되고 딱히 호전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면, 후보 선수로 대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 더 도움이 되고, 메달을 따는 데도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애초에 그 편이 좀 더 공정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그걸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김 코치는 되도록이면 정가인이 올림픽에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노력들이 보답 받았으면 하는, 그런 개인적인 마음도 있지만, 그보단 그녀가 지니고 있는 기량과 실력이 너무나도 아쉬운 것이다.
“가인이 너는, 그냥 회복하고 기량을 되찾는 데에만 집중해라. 나도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코치의 말에 정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내심 불안했었던 건지, 굳어 있던 입꼬리가 슬쩍 느슨하게 풀려 내려왔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지.’
하나 그런 희망찬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말만으로 바뀌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정가인과 김 코치의 바람이 이뤄지려면 지금 상태를 바꾸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작 그 특별한 조치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앞에서 먼저 말했듯, 그냥 시간에 맡기는 자연치료 외에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
“저, 김 코치님.”
그러던 와중.
연습장 안으로 빼꼼히 고개를 들이민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누군가하고 쳐다보니, 관리 팀 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우대석 팀장이 찾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우대석 팀장. 올림픽 국가 대표 운영 팀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선수들과 스태프진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평이 괜찮은 인물이다.
본래 중앙 관리 쪽과 실무 쪽은 여러모로 합이 안 맞아 사이가 나쁘기 마련인데, 우 팀장은 선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쪽 사정을 잘 이해해 주기 때문.
“이렇게 신경 안 써 주셔도 되는데…….”
특히 얼마 전 사고로 인해 선수들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꾸준히 선수촌에 방문하며 애로 사항이나 특이 사항들을 접수하고 나름의 조치들을 취해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목적이리라.
물론 딱히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이제 와서 다른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속적으로 선수들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 보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글쎄요. 일단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어요.”
“…그래요?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요 근래 선수촌 분위기 때문인지 침울해 있을 때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의외인 부분이다. 김 코치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내일 서울을 또 간다고요?”
“그래.”
정가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김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확정이 된 사안이라는 듯 단호한 반응이었다.
“우 팀장님이 괜찮은 이야기를 가져오셨어.”
아까 전에 연습장을 나갔던 그는, 우대석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적어도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기에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나 싶었는데… 다짜고짜 또 서울에 가야 한다니. 정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조금 꺼려지네요. 안 그래도 어제 갔다가 오늘 돌아온 참이니까요.”
그녀는 활의 상태를 점검하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리의 상태를 고치기 위해 수차례 병원을 오갔던 결과, 그녀가 얻은 답은 한 가지였다.
자기가 호소하고 있는 이 불편한 증상은, 당장에 어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심지어 어떤 증상이라고 특정하기도 애매하여 그냥 ‘교통사고 후유증’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고 있지 않은가.
어떤 병인지도 모르는데, 고칠 방법을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은 것은 막연하게 몸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냥 몸이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휴식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훈련은 감을 잃지 않는 정도로만 병행하고 말이다.
“이제 와서 병원 몇 군데 더 다녀온다고 해서 뭐가 바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런 의미에서 또 서울로 올라가는 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쓸데없이 시간과 기운만 낭비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근데 이번에는 병원에 가는 게 아니야.”
“…그래요?”
목소리는 여전히 시큰둥했으나, 나름 관심이 생겼는지 활을 매만지던 손이 멈췄다. 정가인은 김 코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뭐 하러 가는 건데요?”
“안마원.”
“…안마원이요?”
김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너, 최아람 선수 알지?”
“…알죠.”
지난 올림픽의 여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 운동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더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가 있었으니……. 해당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던 선수가, 이후 약물 검사에 걸려 메달이 박탈되었던 것이다.
그 말인즉슨, 약물로 도핑을 했던 선수마저 이기고 금메달을 쟁취해 냈다는 것. 그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었다.
“모를 수가 있나.”
비록 자기는 양궁 선수이고 분야는 다르지만, 그래도 스포츠를 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존경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최아람 선수가 왜요?”
“그 선수가 하반신 마비로 고생하다가 최근에 재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 본 적 있어?”
“앞의 이야기는 들어 봤는데…….”
최아람 선수의 하반신 마비에 대한 내용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한참 이야기가 돌았었다.
안타깝기도 하거니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경력이 팍 꺾여 버리는 게, 같은 스포츠 선수로서 마냥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재활에 성공하셨다는 말은, 지금 처음 듣네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선수였기에 정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감각조차 사라졌던 상황이라 패럴림픽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뛰는 것까진 무리여도, 걷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하다더라고.”
“…근데 그게 가능해요?”
하나 다행인 것과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정가인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되묻자, 김 코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근데 우 팀장이 얼마 전에 직접 만나서 똑똑히 봤다더라고. 최아람 선수가 말하기로는, 어느 분한테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는 모양이야.”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정가인이 입을 열었다.
“…왠지 그분이 안마사이실 것 같네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문맥상 그렇잖아요.”
그녀의 반응에 김 코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우리 올림픽 후배들을 위해 최아람 선수가 직접 그분에게 우리 사연을 들려 주셨다는 모양이야. 그분은 흔쾌히 도와주기로 하셨고.”
“…그렇군요.”
“일단 증상이 가장 심한 네가 먼저 받아 보고, 그다음에 다른 선수들도 차례대로 방문할 예정인데… 어떻게 할래? 좀 꺼려지면 거절해도 괜찮아.”
정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는 대강 이해가 됐다. 다만, 처음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아직 안마를 한 번도 안 받아 봤으면 모르겠는데, 이게 딱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 진천 선수촌은 국가 대표 선수들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성된, 사실상 스포츠 선수들을 위한 시설들이 거의 대부분 구비되어 있는 곳이다.
당연히 안마를 받을 수 있는 곳도 있고, 물리치료를 위한 설비 또한 갖춰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안마사와 물리치료사들은 나름 엄선되어 선발된 실력 있는 인원들이다.
그리고 정가인은 후유증이 나타난 이후로 꾸준히, 병원뿐만 아니라 안마원도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태인 것이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아마 안마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더 크게 고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반대로 말하면, 그냥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 거라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뭔가 다르니까 권유를 하시는 거겠지.’
하나 최아람 선수도 이런 부분들은 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설령 짐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쪽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우 팀장이 말해 줬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까진 생기지 않더라도 호기심이 생기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아뇨. 신경 써 주신 건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예의도 아닐 테고요.”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김 코치가 넌지시 말을 걸자, 비로소 생각을 정리한 정가인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한 번 더 다녀오죠, 서울로.”
* * *
“어때.”
천마안마의 사무실.
그곳에서 강태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최성현과 마주 앉아 있는 상태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좀 느껴져?”
“…아니.”
최성현은 눈을 감은 채로 양반다리를 하고, 아까 전부터 천천히 그리고 길게 호흡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숨만 쉬고 있는데.”
하나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다만 그 짜증은 강태한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향한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짜증의 기색을 느낀 강태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만 눈 뜨고 편하게 앉아 봐.”
“…후으으.”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은 자세를 풀고 늘어지듯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냥 양반다리를 하고 심호흡만 좀 했을 뿐인데, 왠지 몸의 기력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거참, 며칠 운동 쉬었다고 그새 체력이 빠졌나. 그냥 숨만 좀 쉬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드냐.”
“힘들 만하지.”
강태한은 칡차가 담긴 컵을 앞으로 내밀며 답했다.
그냥 일반인이 호흡에 집중 좀 하는 걸로는 힘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최성현이 하고 있는 것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숨만 쉬는 것이 아니라 기감을 펼치고 대기 중에 있는 기(氣)를 인식하려 하는, 말하자면 심공의 기초적인 단계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니까 어색한 거는 당연한 거지.”
거기에다, 주변에 있는 기의 양도 턱없이 부족하다.
현대에 비하면 기가 넘쳐나는 무림에서도 처음 심공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곳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살짝 길 정도는 틔워 줄까.’
어쨌거나 이런 환경에서 기감을 익혀 가야 하기에 일단은 혼자 내버려 뒀지만, 아무래도 그렇게만 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다.
결론을 내린 강태한은, 슬쩍 손을 펴고는 주변에 기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이 방 안에 맴도는 기는 몇 배로 불어났을 터.
“…음?”
그러자 곧바로 최성현의 반응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문득 그를 자극한 것이다.
“…야, 갑자기 뭔가 될 것도 같은데?”
“그래?”
“잠깐만.”
그는 이야기할 시간도 없다는 듯, 다시 양반다리를 틀고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대기 중으로 풀린 기에 기감이 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듯한 예감도 들었을뿐더러…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저, 원장님.”
“쉬잇.”
그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에게 강태한은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조용하라는 소리를 냈다. 이제 막 기감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선, 작은 소리마저 커다란 방해가 될 수 있었으니까.
강태한은 직원을 조용히 시키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슬며시 문을 닫았다.
“아, 죄송합니다. 노크를 먼저 했어야했는데.”
“괜찮습니다.”
다만 그걸로 직원을 탓할 일은 아니다. 강태한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다른 게 아니고, 말씀하셨던 손님이 오셔서요.”
“아, 그럴 시간이네요.”
직원의 말에 강태한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최아람이 이야기를 했었던 국가 대표 양궁 선수, 그중의 한 명이 찾아오기로 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