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66화
“흐으음…….”
안마를 마치고 난 이후의 휴식 시간.
최성현은 휴게실 소파에 앉은 채 자신의 손바닥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허공을 주무르듯, 두어 차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뭐지, 이게?’
그는 방금 전 처음 느꼈던, 이 묘한 감각의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처음 느껴 보는 그 감각. 몸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그 느낌.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지.’
희미하면서도 손가락 끝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던 것.
다만 처음 느껴 본 생소한 감각이라기보다는.
처음으로 인지한 느낌에 가까웠다. 기존에 없던 뭔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에 있어 왔던 뭔가를 새삼스럽게 알아차린 느낌이었다.
처음 이 느낌을 느낀 것은 단골 손님의 종아리를 짚었을 때였다. 처음에는 이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었었는데…….
다른 손님을 받았을 때에도, 똑같이 그 물줄기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감각의 폭 자체가 넓어진 것처럼 말이다.
“뭐 해?”
“어, 아저씨.”
그렇게 한참 앉아 있었을까. 한 남자가 양손에 머그컵 한 잔씩을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다름이 아니라 함께 이곳에서 장인 코스를 담당하고 있는 안마사, 김성훈이었다.
“목 안 마르냐? 차 마실래?”
“좋죠. 고마워요.”
최성현은 김성훈이 내민 잔을 건네받았다. 은은하게 퍼져 오는 칡차의 향. 최성현은 차의 온도를 확인하듯 조심스레 홀짝여 보고는, 이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커피로 갖다주는 게 더 좋았나?”
“아뇨. 요새는 이게 더 좋아요.”
김성훈이 넌지시 물어보는 말에 최성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김성훈이 무안할까 봐 신경 써서 그리 대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꿀을 넣어 달콤한 첫 맛과 그 뒤에 이어지는 쌉쌀한 칡의 향. 그 두 가지의 조합이 꽤나 절묘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요 근래에는 유난히 입에 착착 감길 뿐더러, 활력도 채워지는 느낌에 커피보다 이 칡차를 더 자주 마시고 있는 최성현이었다.
“그새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요즘에는 커피보다 이쪽이 더 입에 맞더라고요.”
“사실 나도 그래. 묘하게 이걸 더 찾게 되더란 말이지. 몸이 원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저씨는 슬슬 건강한 걸 챙겨 먹으면서 건강 관리하실 때가 되긴 하셨죠.”
“…참나. 이 녀석 말하는 본새 좀 봐라.”
“하하하.”
최성현의 말에 김성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고, 최성현도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멎을 즈음, 김성훈이 넌지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뭐 고민이라도 있냐? 아까부터 어깨도 축 처져 가지고.”
“아, 그게요…….”
최성현은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뭔가를 느낀 것은 확실하다. 비록 희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느낌만큼은 분명했다.
하나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정체를 모르기에 뭐라 설명을 할 수도 없다. 물줄기에 비유를 든 것도 굳이 말을 하자면 그런 것이지, 딱 들어맞는 표현인 건 아니었으니까.
‘…기(氣)?’
그러다 문득, 최성현은 딱 들어맞는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 무협지에 나오는 ‘기’라는 개념. 하나 그는 이내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 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최성현은 팔짱을 낀 채 침음을 흘리며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 혹시, 아저씨는 이런 거 느껴 본 적 없어요?”
“이런 게 뭔데?”
“사람 몸속에서 뭔가 흐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인데… 원래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뭔가요.”
김성훈은 최성현의 말에 잠시 턱에 손을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뻔한 대답이었다.
“피? 혈관?”
“아씨, 혈관이면 제가 말도 안 했죠.”
“그럼 피 말고 사람 몸속에서 흐르는 게 뭐가 있는데? 침? 위액?”
“…아닙니다, 아무것도.”
휴우. 최성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구한테 말해 봤자 이상한 이야기로만 들릴 것 같았다. 아니면… 진짜 이상해진 거던가.
“성현아.”
그때쯤이었다.
소파 뒤쪽에서 걸어온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잠시 틈을 내어 뒤쪽에서 강습을 하고 있던 강태한이었다.
“…왜?”
“이야기할 게 좀 있는데, 사무실 쪽으로 갈까?”
그는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고, 최성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테이블에 놓인 차를 단번에 비우고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원장님이 부르시면 가야지, 뭐.”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짓고는 앞장서서 걸었고, 최성현은 그 뒤를 따랐다. 휴게실과 사무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두 사람은 이내 사무실의 소파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 할 게 있다고 했었던 만큼, 먼저 말문을 튼 것은 강태한이었다.
“너, 뭔가 고민하는 게 있는 것 같던데.”
“아… 따로 걱정을 해 줄 정도는 아닌데.”
김성훈 아저씨랑 대화를 듣고 걱정을 해 주는 건가.
마음은 고맙다만…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이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최성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은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기감(氣感)이 열린 게 아닌가 싶은데.”
“어…….”
최성현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느낀 감각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강태한의 입에서 나온 탓이었다.
* * *
‘역시 성현이가 제일 빨랐나.’
반면, 강태한은 그리 놀라지 않은 반응이었다.
오히려 내심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눈치. 사실 그는 이미 이런 변화가 있을 걸 진즉부터 짐작했었다.
강태한이 가게에 주기적으로 채워 놓는 칡차.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쌓은 강태한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고, 도리어 내공을 정련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어 굳이 챙겨 먹을 필요가 없지만…….
어찌 됐건 현대에서는 쉽사리 접하기 힘든, 나름 순수하고 선명한 영기를 머금은 영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산삼과 같은 물건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고, 다른 수확물들과 비교해 봐도 많이 급이 떨어지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일반인들도 탈이 나거나 부작용이 생길 걱정 없이 영기를 접하고 섭식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수행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 달에 한두 잔 먹는 정도로는 그냥 몸에 활력과 생기를 채워 줄 뿐이지만…….
그걸 일주일에 몇 잔씩 꾸준히 먹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영기의 양 자체는 미미할지라도, 몸이 ‘기’라는 개념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거기에 혈도들도 미리 틔워 둔 상태니.’
평소 강습을 할 때 시범을 보일 때나, 피곤해 보이니 잠깐 어깨를 주물러 준다는 식으로 틈틈이 안마사들의 혈도들을 뚫어 놨던 강태한이다.
말하자면 안마를 빙자한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행하여 근간을 다져 놨다고 할까. 반쯤은 강태한이 어거지로 기감을 깨워 놓고 있는 셈이었다.
한데 최성현은 원래부터 나름의 재능과 적절한 신체를 타고난 녀석이었고… 그렇다 보니 누구보다도 먼저, 기감을 트게 된 것이리라.
“…어, 어떻게 알았냐?”
한편, 최성현은 놀란 눈으로 강태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랄 만도 했다. 스스로도 믿기 힘들어 말로 꺼내기도 애매했었는데, 그걸 말하기도 전에 맞춰 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고딩 때부터 무협지를 하도 많이 봐서 이런 생각에 별로 거부감이 없는 건가?”
“뭐 그런 느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강태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며 위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한번 손을 줘 보라는 수신호였다.
최성현은 군말 없이 그 위에 왼손을 올려놓았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강태한이 그의 손바닥을 짚는 순간, 감각이 사라진 것이다.
“뭐, 뭐야?”
단순히 손의 감각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마치 도화선이라도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감각의 마비는 팔을 타고 올라와 순식간에 팔뚝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게 어깨까지 올라가려는 순간.
“나도 예전부터 기를 다룰 수 있었거든.”
강태한은 빙긋 웃으며 손바닥을 짚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냈고, 그 순간 팔의 감각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돌아왔다.
“야, 깜짝 놀랐잖아!”
다만 최성현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내밀었던 팔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정말로 멀쩡한 게 맞는지 천천히 스트레칭하듯 팔을 움직였다.
“흠, 좀 놀랐나?”
“안 놀랄 수가 없지!”
“그래도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신빙성이 가잖아.”
강태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팔의 상태를 확인한 최성현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방금 그거, 네가 한 게 맞아?”
“뭐냐. 아깐 놀래켰다고 뭐라 하더니.”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말이 좀 안 되잖아.”
손바닥 좀 눌렀다고 팔의 감각이 마비된다니. 그도 이제 나름 실력을 갖추고 인정받는 안마사였지만,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믿거나 말거나는 너의 자유지, 뭐. 하지만…….”
강태한은 다시 손을 줘 보라는 시늉을 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최성현이 손을 건네자, 강태한은 방금 전과 같은 자리를 똑같이 짚어 냈다.
“기감이 트인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다만, 방금처럼 손에 마비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부분을 통해서 새로운 자극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강태한이 직접 혈 자리로 흘려 보내고 있는 영기.
그 영기는 일부러 주변 혈도를 조금씩 자극하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뽐내고 있었다.
“…어어?”
그 느낌에 최성현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전까지는 희미하게만 느껴졌다고 한다면, 지금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뚜렷하다.
하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자극을 기점으로, 마치 어두웠던 지도가 밝혀지듯 몸 전체의 혈도들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 존나 이상해!”
그 전까지 흐릿했던 기감이 훨씬 선명해진 순간.
물론 아직까지 그 능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최성현의 입장에선 마치 몸속에 촉감이라도 생긴 것처럼 미묘한 느낌이었다.
신기하면서도 묘하다고 할까.
자연스레 쉬고 있던 호흡을 괜스레 의식하듯, 자기 몸이 괜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어때?”
“…말했잖아, 존나 이상하다고. 갑자기 없던 감각이 하나 새로 생겨난 느낌이야.”
최성현은 자기 몸 이곳저곳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낯선 느낌에 살짝 불쾌감이 얽혀 있는 목소리. 하나 거기에는 그 이상의 흥분도 함께 섞여 있었다.
안마란, 피로로 인해 문제가 생긴 사람의 몸을 지압하거나 주물러 본래의 쾌적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
그렇다 보니 당연히 사람의 골격이나 근육 같은, 체내 신체 구조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보다 세밀하고 섬세한 안마가 가능해진다.
이해도에 따라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능력도, 그걸 해결하는 능력도 달라지게 되니까.
한데 그런 부분들을 넘어서 아예 체내의 기운까지 읽어 낼 수 있게 되고, 그걸 또 안마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야… 과연 어디까지 가능해지겠는가.
물론, 방금 막 기감을 깨우친 참인 최성현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설렌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는, 슬쩍 강태한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걸 혼자서만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방금 너한테도 알려 줬잖냐.”
그 말에, 강태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 * *
“어, 아람 씨.”
용산에 위치한 작은 카페.
구석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던 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여성의 모습에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우 팀장님.”
“…어, 어, 그래.”
급하게 몸을 일으켰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를 부축해 주기 위함. 하나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자기 두 발로 자연스럽게 테이블까지 걸어왔다.
“…아람 씨가 회복됐다는 말은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태가 좋네?”
“뭐어, 그래도 아직 멀었죠.”
우 팀장의 말에 최아람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두 발로 걸어다닐 수는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보다, 웬일로 연락을 하셨어요?”
“아니, 원래는 그냥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깐 좀 보려고 했었지. 소식 들은 것도 있었고.”
우 팀장은 팔짱을 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 최아람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는 분위기였다.
“…뭐 할 말 있으신 것 같은데?”
“아니, 뭐… 이건 그냥 겸사겸사 하는 말인데.”
분위기를 알아본 최아람이 슬쩍 이야기를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우 팀장이다.
“혹시, 아람 씨가 어떻게 재활을 했는지 좀 들어 볼 수 있을까?”
“그건 뭐 안 될 것까진 없는데… 왜요?”
넌지시 되묻는 최아람. 그런 그녀의 질문에, 순간 우 팀장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올림픽 있잖아.”
“그렇죠. 슬슬 본격적으로 준비할 시즌이죠.”
그 말에 최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하계 올림픽이 있는 해. 당연히 한참 전부터 준비에 임하지만, 이제 거기에 박차를 가하고 컨디션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타이밍이다.
다만 우 팀장의 표정은 그리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진천 쪽으로 가고 있던 중에… 선수들이 타고 가던 버스에서 사고가 좀 크게 났거든.”
…네?
그의 말에 최아람은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되물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