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62화
“아, 가능하십니까.”
강태한의 대답에 곽상영은 화색을 지었다.
그냥 만나는 약속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주겠지만, 안마까지 받는 것은 혹시나 거절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강 원장님.”
“별말씀을. 저도 얼굴을 터 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곽상영의 반응에, 강태한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어찌 됐거나 사업적으로 이어진 관계인 만큼, 서로 어색한 것보다는 나름 친분이 있는 쪽이 더 좋지 않겠는가.
“날짜는 언제 가능하십니까?”
“흐음, 오시기 이틀 정도 전에 미리 말씀만 해 주시면, 날짜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원래 8시 이후라면 강태한은 퇴근해 있는 시간. 하지만 그렇기에 따로 약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시간을 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강태한의 말에 곽상영이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혹시 이틀 뒤도 가능하십니까?”
“…사실상 바로군요.”
이틀 정도 전에 연락만 달라 했는데 이틀 뒤라면, 사실상 곧바로 약속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강태한이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되도록 빠르게 잡으라고 하셨나 보네요.”
“예… 사실 최근 인도 쪽에 지점을 새로 내서, 본사 쪽은 업무가 좀 많거든요. 얼마 전에 귀국을 하셨는데, 언제 다시 나가게 되실지 몰라서.”
곽상영은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만 강태한도 의외라는 생각에 되물었을 뿐, 딱히 안 된다고 할 이유는 없었다.
“약속이 빨리 진행된다면야, 저도 좋죠.”
오겠다고 했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식으로 빨리 왔다 가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강태한은 재차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 * *
“흐으음…….”
시가지의 도로를 따라 달리는 한 고급 세단.
적막에 가까울 정도로 고요한 차 안에서, 한 여성의 침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뒷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든 태블릿 PC로 뭔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확실히, 다시 봐도 신기한 데이터란 말이지.”
그녀의 이름은 장재연.
대청그룹의 전 회장 장우영의 세 번째 자식이자 유일한 딸로, 호텔업계에서 요 근래 급부상하고 있는 브랜드이자 기업, 위아리치의 사장이기도 했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성공적인 커리어를 거두었으며, 여성 CEO로서도 유명한 인물.
혹자는 혈연관계가 있는 만큼 사실상 대청그룹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겠느냐, 그런 말을 하지만, 실상은 지분 하나 나눠 가진 것 없었고, 위아리치를 여기까지 키워 낸 건 오로지 장재연의 업적이다.
그런 그녀가 현재 태블릿 PC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 라이너 호텔의 실적과 관련된 보고서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그 외의 지표들에서도 기업 내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지점.
물론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잘될 것이라고 예상되던 곳이기는 했다. 일단 서울 한복판에서 리버 뷰를 즐길 수 있고, 위치도 여의도 바로 근처라 접근성과 유동 인구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 일 년 정도는 지나야 자리를 잡지 않을까 싶었고, 그게 일반적이다.
오프닝 매출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호텔들이 제대로 매출을 내기까지는 대략 그 정도 기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에 나와 있는 보고서의 내용과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실상 이미 자리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느낌이다. 나오는 매출 자체가 높기도 하거니와, 그 높은 매출이 매달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흐음.”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기며 훑어보던 그녀는, 유독 한 페이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거기엔 호텔과 같은 빌딩에 있는, 천마안마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호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별개의 시설이지만, 사우나와 같은 다른 부대시설과도 잘 어우러지며 가게 자체의 인지도도 매우 높은 곳.
총지배인의 판단으로 호텔과 사업적인 연계도 맺고 있으며,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라이너 호텔의 독보적인 흥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실상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라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느 정도인데 이러는 걸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보고서는 그냥 아무나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지점의 간부급 인원들이 자료와 소견을 제출하고, 그걸 총지배인이 최종적으로 검수하여 올리는 보고서다.
그런 만큼 딱히 과장이나 허구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확신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인간은 애당초 총지배인의 자리에 앉혀 두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직접 방문하여 안마를 받아 볼 필요가 있다’였다. 보고서에는 너무 고평가만 이어져 있는 탓에 도리어 이곳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만약 이 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대로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아, 고생하셨어요.”
장재연은 이곳까지 운전해 온 비서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고개를 들어 가볍게 빌딩 외부를 살펴보는 장재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법 나쁘지 않다. 적어도 이 주변 일대의 빌딩 중에서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하다.
‘다시 봐도 잘 뽑혔단 말이지.’
그녀는 만족스레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건물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어 제법 활성화되어 있는 상권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천마안마가… 20층이었지.’
그렇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안내판을 훑어보고 있던 장재연. 머지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으나.
“…어?”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빠랑, 오빠?”
다름이 아니라 대청그룹의 전 회장인 장우영과 현 회장인 장태현이었다.
* * *
“뭐야, 장재연, 네가 여긴 웬일이냐?”
놀란 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장우영의 얼굴엔 내심 반가운 기색이 나타났으나, 장태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안 좋은 남매 특유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웬일이긴 무슨 웬일. 내 건물에 내가 있는 게 웬일이겠어, 아니면 오빠가 여기 있는 게 웬일이겠어?”
다만 장재연의 목소리도 마냥 정답지만은 않았다.
장재연은 어릴 적 몇몇 사건들을 거치며, 가족들과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굳이 대청그룹에서 나와 따로 독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최근 아버지 성격이 예전과 달리 유들해지면서 관계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오빠와의 사이까지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장태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보다, 오늘 내가 여기 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사업적인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대청그룹의 회장이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올 만한 이유는 딱히 없다. 마침 짚이는 부분도 있었기에,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장태현을 쳐다보았다.
반면, 장태현은 갈피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알고 오셨던 거예요, 아버지?”
“아니? 모르는 일이다.”
하나 장우영도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마찬가지. 시치미를 떼는 장태현의 모습에 장재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뭘 모르는 척이야. 딱 봐도 저번에 말했던 커넥션,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뻔하구만.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도 데리고 오고.”
위아리치는 국내에서도 꽤 힘을 쓰는 호텔 브랜드지만 그보다 해외 사업 쪽 비중이 더 크며, 특히 동남아시아, 인도 쪽에 영향력이 제법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지난번 장태현이 사업적으로 제안을 했던 것이 하나 있었고, 장재연은 그걸 깔끔하게 거절했었다.
아마 그와 관련하여 다시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리라. 그것 말고는 대청그룹의 회장이 여기까지 올 만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야, 재연아. 미안한데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장재연의 반응에 장태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눈살이 더욱 찌푸려진 느낌이었다.
“이 녀석, 요즘 좀 잘나가더니 자의식이 너무 세졌네. 아버지랑 나는 그냥, 여기 천마안마에서 안마받고 나오는 길이다.”
“…천마안마?”
장재연이 되물으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를 봐서는 장태현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 그냥 담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거, 거길 왜 갔는데?”
“안마받고 나오는 길이라고 말했잖아. 애초에 안마원을 안마받으러 가지, 그럼 뭐 하러 가냐?”
장재연의 얼굴에는 실시간으로 다양한 표정들이 지나갔다. 당황, 어색함, 부끄러움. 반면 장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버지랑 저 녀석도 다니는 곳이라고?’
아버지는 대청그룹의 전 회장이고, 장태현은 현 회장이다. 자기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만족의 기준이 좀 높을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대한민국 재계 서열 11위… 지금은 10위까지 올라간, 명실상부한 대기업의 회장들이니까.
‘…대체 어느 정도인 거야?’
방금 전의 부끄러웠던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잊혀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더욱 커진 천마안마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를 잡았다.
* * *
“야, 성현아.”
천마안마의 휴게실에 놓여 있는 소파.
거기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던 황 실장은, 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성현에게 말을 걸었다.
“네? 왜요?”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
하루 종일 미소를 짓고 있는 최성현의 모습. 단순히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분위기부터 사람의 기운 자체가 밝아진 듯한 느낌이다.
“하하, 뭐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어요!”
황 실장에게 하는 대답도 평소보다 밝은 느낌.
그 모습에 황 실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물어보긴 했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참 순수하구만.’
지난번에 가게로 찾아오셨던 최성현의 아버지.
그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최성현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만 봐도 추측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당연한 부분인가.’
아버지와 화해를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얼핏 들으면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족은 인간관계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가족과 갈등이 있었다가, 그 갈등이 해소된다면… 뭐, 뛸 듯이 기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황 실장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 싸우고 헤어졌다가, 화해를 하기는커녕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일이 그에게는 커다란 미련이었다.
“에이, 괜히 꿀꿀해졌네.”
“왜요. 제가 기분 좋아 보이는 게요?”
“그래, 임마.”
괜히 씁쓸한 기억을 떠올렸던 황 실장은, 괜스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한가하면, 잠깐 카운터나 좀 교대해 주고 오든가. 지금 준비실도 같이 보고 있어서 바빠 보이던데.”
“카운터요? 알았어요.”
평소라면 ‘안마사인데 카운터까지 시키네’라며 툴툴거릴 텐데, 지금은 군말 없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성현이다.
“흐음… 근무 태도가 아주 바람직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황 실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휴게실 밖으로 빠져나와 카운터 쪽으로 다가간 최성현. 그는 로비에 있는 손님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흐음…….”
로비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성숙한 외모의 여성. 간간이 추임새를 넣듯 침음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손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을 보러 온, 혹은 평가하러 온 사람에 더 가까워 보였다.
“성현 선생님, 오늘 혹시 부동산에서 누가 온다는 말이 있었나요?”
“아뇨. 딱히 그런 건 딱히 못 들었는데요.”
카운터 직원이 물어봤으나, 최성현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성현.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내용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아, 실장님.”
그때쯤, 뒤쪽에서 슬그머니 황 실장이 걸어왔다. 최성현만 훌쩍 보낸 게 미안해서 따라 나온 것.
카운터에 있던 두 사람은 반가운 기색으로 황 실장을 맞이하며, 로비의 손님을 슬쩍 가리켰다. 그녀는 이제 뒤쪽에 걸린 사인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아아.”
그녀를 본 황 실장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준비실 쪽을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지금 차 두 잔만 타서, 사무실로 가져와.”
“차를요?”
“그래. 흠… 칡차는 아마 이따가 드실 테니까, 야관문차로 하자.”
직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실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성현이 황 실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 아시는 분이에요?”
“음? 알지.”
저 사람이 가게에 찾아온 건 처음이지만,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적어도 황 실장에게 있어서는 알아 둬야 하는 정보였으니까.
“여기 호텔이랑 건물 주인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준비운동을 하듯 한번 얼굴을 크게 폈다가 다시 오므렸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는 접객용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