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154화 >
숙박업계의 미슐랭이라 불리는 페르모 가이드.
사실 페르모는 원래 여행이나 관광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연예계나 패션계의 이야깃거리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가십 잡지였다.
그러다 한 번 바캉스 시즌에 맞춰, 지중해 유명 휴양지들의 호텔들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코너를 실었던 적이 있는데··· 그 코너가 대박을 터트렸었던 것.
본래는 단발성으로 기획되었던 코너였으나, 해당 코너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지게 되었으며, 소개하는 범위도 유럽 전역, 더 나아가 전 세계로까지 넓어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인원도 확충되고, 리스트도 점점 더 길어지고, 데이터도 꾸준히 쌓이게 되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바로 페르모 가이드.
지금에 와선 유명 호텔, 숙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페르모 잡지사 또한 가십거리가 아니라 관광 및 휴양지들을 소개하는 잡지로 더욱 유명해졌다.
물론 별 세 개를 받은 3성 리스트가 유럽권에 몰려있어 편파의혹이 있다든가, 평가 기준이 서양식 호텔에 맞춰져 있다는 등, 몇몇 논란들이 있긴 하지만···
어찌됐거나 이쪽 업계에서는 공신력 있고 어느 정도 신용이 가며, 무엇보다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음···”
그 페르모 가이드의 평가원 중 한 명인 알프레드 레오. 현재 라이너 호텔 일반객실의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경치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그의 시선은 유독 창가 쪽에서 오래 머물렀다.
큼지막한 통유리와,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
지금도 꽤 볼만하지만, 해가 지고 야경이 펼쳐지면 이 풍경이 한층 더 빛을 발할 것이라고, 알프레드는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서울에 이 정도 리버 뷰를 가진 객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허나,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혔을 때도 과연 유니크한 풍경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애매하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풍경은 누구나 ‘예쁘다’고 느낄만한 멋들어진 풍경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보기 드문 풍경도 아니다.
오히려 정석적인 느낌이 좀 있다고 할까.
물론 그렇다고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이 호텔의 분명한 장점이지만··· 그렇다고 별점을 따내기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그냥 깔끔하고 쉬어가기 좋은 숙소인 건 맞지만, 가이드에 따로 이름을 올릴 정도의 특색은 없는 곳.
지금 시점에서 알프레드의 감상은 딱 이 정도였다.
‘어차피 며칠은 더 보겠지만 말이야.’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객실 내에서의 평가.
아까 봤던 로비도 한 번쯤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고, 레스토랑이나 부대시설들도 한 번씩은 이용해봐야 할 것이다.
호텔은 단순히 숙소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기에, 다른 시설들의 만족도에 따라서 이 평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이곳에서 머무는 기간은 3박4일.
과연 그 기간 동안 자신의 평가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는 알프레드도 내심 기대를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 그래도 2박 정도가 딱 적당한데.’
아직 찾아가봐야 할 곳들이 한참 남아있는 걸 생각하면, 3박은 좀 긴 편이다. 허나 어쩔 수 없다.
본래 페르모 평가원들은 2박3일을 머무른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래왔으나··· 오히려 그걸로 추측이나 특정당하는 경우가 많아져, 되도록 2박3일은 피하라는 방침이 내려진 것이다.
아무래도 평가원으로 특정을 당하게 되면 서비스가 차별되게 되고,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힘들게 되니까 말이다.
‘덕분에 저런 배낭도 매고 다니고···’
알프레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배낭을 빤히 쳐다봤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배낭여행객들이나 매고 다닐 법한 큼지막한 배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배낭여행을 온 여행객도 아니었고, 저 배낭을 꽉꽉 채우고 있는 물건들도 대부분은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그냥 위장용으로 매고 다니는 물건.
허나 그렇다고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고, 그는 실제로 여행을 다니는 내내 저 배낭을 짊어지고 돌아다녀야했다. 배낭과 차림새는 가짜지만, 셔츠에 스며든 땀과 지친 근육은 진짜라고 할까.
“···좀 피곤하구만.”
여행도 어찌 보면 타지 생활. 게다가 그는 이미 일본에서 한 달의 일정을 거치고 이곳에 온 상태였다. 평가원으로 활동하며 장기여행에 익숙해져있다곤 해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건 부대시설이 기대될 수밖에 없구만···’
이 빌딩의 꼭대기에 있다는 한국식 사우나.
특히 해가 진 이후에 가면,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근 채 보는 서울의 야경이 제법 운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사지.
잘은 모르겠으나, 사전에 인터넷으로 조사를 좀 했을 때, 이곳에 있는 안마원의 마사지가 끝내준다는 리뷰를 하나 봤었다.
[마치 영혼이 탈곡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리뷰 중에 들어있던 그 짤막한 문장.
비단 그 문장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도 터무니없는 수준의 소감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해외 출장을 나갔다가 거래처의 권유로 받게 되었다는데, 원장이 직접 마사지를 해주는 ‘천마코스’가 그렇게 일품이라나.
물론 딱 봐도 일부러 과장해서 쓴 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가를 위해선 체험을 한 번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일본에 있었던 한 달 전부터 미리 예약을 잡아뒀던 알프레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솜씨는 있겠지.’
두 달 넘게 타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쌓인 여독.
그것들을 한 번에 해소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기대는 해볼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알프레드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곤했던 탓일까, 그가 잠에 드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끄흐으음!”
인적이 드문 조용한 분위기의 체육관.
그 안에서, 마치 사력을 쥐어짜내고 있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으하!”
“자, 언니.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바벨을 든 손을 끝까지 뻗어내고 성취감 어린 탄성을 터트리는 최보람. 그런 그녀에게 옆에 서있던 동생, 최아람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나 더’를 말하고 있었다.
“아까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마지막이고, 이건 진짜 마지막.”
그럼 그 다음엔 진짜진짜 마지막이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런 생각이 슬쩍 들었지만,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엔 지금 상황만으로도 벅차다.
“끄흐으응···!”
파르르르, 떨리면서도 올라가는 바벨.
그녀가 행여 놓칠 때를 대비해 손을 아래에 갖다 대고는 있지만, 끝까지 도움을 주지는 않는 최아람이다.
“후아아아!”
“고생했어, 언니.”
덜커덩!
결국 자기 힘으로 마지막까지 마무리하고 바벨을 고정대에 올려놓는 최보람. 그녀는 힘이 다했는지, 벤치에 누운 그대로 팔을 축 늘어트렸다.
“이거 왜 이렇게 무겁니···”
“내가 얕잡아 볼 게 아니라고 했잖아.”
다만 바벨이라고 해도, 그녀가 들어 올린 건 아무런 플레이트도 끼우지 않은 앙상한 봉뿐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언니의 말에 최아람은 피식 웃으며 봉을 집어 들었다.
“이 봉만 해도 한 20kg 정도 되니 꽤 무겁지.”
근육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겠지만, 평소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에겐 충분히 무거울 수 있는 무게다.
허나 말하는 것과는 달리, 최아람은 바벨을 한 손으로 잡고 덤벨마냥 휙휙 움직이고 있었다. 동생을 바라보는 최보람의 눈빛에 경악감이 실렸다.
“그래서 어때, 할만 했어?”
“···아니.”
벤치프레스를 하기 이전에, 그녀는 이미 최아람의 지시에 따라 몇 개의 운동기구를 거쳐 온 상태였다.
최아람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라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전력을 다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인 모양이었다. 최보람은 이제 휠체어 바퀴를 굴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흐음. 그럼 내일부턴 운동량을 좀 줄일까?”
“···아니.”
허나 최보람은 동생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해야 운동이 좀 되는 거 아니야?”
“뭐··· 그렇기는 하지.”
“그럼, 힘들어도 해봐야지.”
최보람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천마안마를 다녀온 이후.
동생처럼 잠깐 일어섰다든가하는 기적까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다리의 감각이 살아난 것이다.
꿈속의 착각도 아니고, 가끔 찾아오던 환상통도 아닌··· 진짜 자기다리로 느끼는 감각이 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두 발로 서보고 싶으니까.”
최보람은 가벼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허나 거기에 담겨있는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녀가 포기하고 있었던 소원, 오랜만에 되살아난 각오. 그것들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기에, 최아람의 입가에는 슬픔과 뿌듯함이 함께 드러난 복잡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선생님이 근육을 기르고 꾸준히 자극을 주면, 아무래도 회복이 빨라질 수 있다고 했었거든.”
“···나 때도 그렇긴 했지.”
강태한의 말을 떠올리며 최보람이 말하자, 최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적극적인 재활훈련을 통해, 강태한이 말했던 것보다 회복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었다.
“그럼, 한 세트만 더 해볼까?”
“···그건 좀.”
언니에게 싱긋 웃으며 말하는 최아람. 그러자 최보람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태면 저 앙상한 바벨에도 깔려죽을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 너, 재만 씨랑은 별다른 이야기 없었니?”
이대로는 한 세트를 더 시킬 것 같았기에, 최보람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최아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만 씨가 왜?”
“어제 같이 저녁 먹고 왔었잖아.”
장우영 회장의 수행원인 이재만.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몇 번 마주치다보니 두 자매와는 자연스레 친분이 생긴 사람인데··· 최아람에게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마음이 있다는 걸, 아마 최아람 본인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 거기 맛있더라. 파스타인데 양도 많았고.”
“···그렇구나.”
다만, 관계에 별다른 진전은 없어보였다.
해맑기 짝이 없는 동생의 반응에 최보람은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만 해서 그런가?’
이렇게 되면 자기가 직접 말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것만큼 눈치 없는 짓도 없다. 최보람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동생을 바라봤다.
“근데 재만 씨가 맨날 슈트만 입고 다니잖아.”
“응? 어, 그렇지.”
아무래도 장우영 회장님의 수행원으로서 만나는 일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본 최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다른 옷을 입고 왔는데 좀··· 달라보였어.”
어머.
동생의 말에 최보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약간 의외의 반응. 허나 그녀는 이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마다의 템포가 있는 거니까.’
동생은 그 템포가 살짝 느릴 뿐일지도 모른다.
최보람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스스로 납득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상체 위주로 운동을 하신 모양이더라고.”
“···아, 근육이?”
“응.”
즉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최아람.
최보람은 그녀의 동생을 한동안 쳐다보다··· 눈을 감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흐아아아아···”
라이너 빌딩 꼭대기에 위치해있는 사우나.
그곳 탈의실의 선풍기 앞에 앉아, 알프레드는 몸에 가득 찬 사우나의 열기를 흘려보내듯 작은 탄성을 길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목욕탕이 잘 되어있어서 다행이야.’
그는 이제 막 두 개의 부대시설을 이용한 참이었다.
방금 이용한 사우나.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용한, 이 아래층에 위치해있는 피트니스 센터.
그리고 두 개의 시설 모두 굉장히 훌륭했다.
솔직히 피트니스 센터는 평가를 해야 하니까 억지로 찾아간 거였으나, 그럼에도 높은 만족도를 느낄 수 있었고, 사우나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탕에서 다 같이 벗고 다니는 것은 아직 적응하기 힘든 문화였으나··· 이것도 어찌 보면 이국적인 문화체험이라 할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보는 도시의 야경이 참 좋았다.
객실에서 보이는 리버 뷰는 꽤 흔한 편이지만.
이렇게 커다란 온탕에서 목욕을 즐기며 보는 리버 뷰는, 꽤나 강력한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고층에 위치한 스파 시설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곳들은 고가의 비용을 요구하는 럭셔리 시설들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여기는 20달러도 안 되는 수준이다.
가성비의 면에선 비교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딱히 시설이 뒤쳐지거나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단 리스트에 추천 정도는 해볼까···’
기존의 평가에서 살짝 점수를 올리는 알프레드.
추천 후에는 다른 평가원들의 심사도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자기 기준에서 이 정도면 별점 하나 정도는 가능하다는 게 알프레드의 생각이었다.
‘슬슬 일어날까.’
알프레드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쐬고 있던 선풍기를 끄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그에겐 아직 다음 행선지가 남아있었다.
“어디보자···”
엘리베이터의 안내판을 훑어보는 알프레드. 그가 다음 행선지의 위치를 찾아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층.
다름 아닌 천마안마가 위치해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