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150화 (150/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150화 >

다음 날, 살짝 늦은 아침.

“으음···”

유세아는 눈가를 때리는 햇빛에 천천히 눈을 떴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눈이 부신 걸까. 어쩌면 엄마가 또 커텐을 걷어놓은 걸지도 모르겠다. 유세아는 그런 생각에 창가 쪽을 쳐다봤다.

“···응?”

헌데, 다르다.

이곳이 자기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일초.

여기가 강태한의 침실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이초.

그리고 지난 밤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까지 삼초.

“···어머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강태한의 베게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사실이 약간 기쁘면서도 놀랍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두근거리는, 그런 복잡한 심정 때문인지, 유세아는 저도 모르게 덮고 있는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그때쯤이었을까.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문이 열렸다.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싱긋 미소를 짓고 있는 강태한의 얼굴이었다.

“일어났어요?”

“네? ···네.”

저 미소가 참 사람 잡는 물건이다.

새삼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유세아는 조심스레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왠지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곧 있으면 다 되니까, 천천히 나와요.”

“뭐가요? ···아.”

강태한이 뭘 말하는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열려있는 틈 사이로 들어오는 북어국의 냄새.

북어 특유의 깊고 진한 맛에 살짝 칼칼한 향이 섞여있는 것이, 냄새만 맡아도 속이 다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국은 또 언제 끓이신 거예요?”

“금방이죠, 뭐.”

유세아의 말에 강태한은 피식 웃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유세아. 그녀는 갑자기 애꿎은 이불을 꽉 끌어안고는, 침대위에서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의 기분이다.

지금의 이 기분이라면 어떤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이라도 가뿐히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좀 뒤척였을까.

문득, 그녀는 의아한 생각에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숙취가 없네.”

전날, 원래는 강태한을 취하게 만들려고 했던 유세아였지만, 강태한의 주량은 상상 이상이었고 오히려 폭음으로 주량조절에 실패한 건 그녀 본인이었다.

물론 중간에 한 번, 정확히는 식탁에서 강태한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을 때 술이 확 깨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간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술을 잔뜩 마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 당연히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야 정상인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머리가 맑고 개운한 느낌이다.

“뭐지··· 술이 좀 세진 건가?”

턱 부근을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세아.

폭음을 했는데도 컨디션이 좋은, 아주 신기한 상황이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곧 고민을 내버려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자기가 끌어안아 잔뜩 구겨놓은 이불을 피고,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유세아.

그러자, 때마침 국그릇에 국을 퍼 담고 있는 강태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으로 시선을 돌리니, 조촐하면서도 든든한 아침상이 차려져있었다.

“···최고네요.”

“뭐가요?”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이요.”

비록 강태한을 취하게 한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야말로 대성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세아는 본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계속해서 입 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자주 놀러 와도 돼요?”

“안 될 이유가 없죠.”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는 강태한.

그런 그의 모습에 유세아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 * *

[황혼의 수레바퀴, 첫 공연 성공적인 출발!]

[부상으로 인한 불참? 언론의 의혹들을 단번에 날려버린 최고의 무대! 황지운의 완벽한 부활.]

[마지막 공연까지 모조리 매진! 암표도 없어서 못 구한다, 황지운이 일으킨 뮤지컬 열풍?]

황지운의 인기에 힘입어 기획된 황혼의 수레바퀴.

정작 핵심배우인 황지운이 부상을 입고, 연습 스케줄이 지체되며 업계 내에서 여러 우려가 있었던 공연이었지만···

정작 첫 공연이 시작되자, 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는 평가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표는 전 좌석이 매진되고, 암표에도 프리미엄이 잔뜩 붙어서 거래되고 있는 상황.

“우하하하, 이 기사들 보이냐?”

한편 천마안마의 카운터.

황실장은 ‘황혼의 수레바퀴’의 관련 기사들이 잔뜩 올라와있는 화면을 보여주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참 잘된 일이긴 한데··· 실장님이 왜 좋아해요?”

옆에 앉아 그 말을 듣고 있던 최성현.

그는 살짝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까지 관심이 가지는 않는 일. 허나 황 실장은 뭘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이 공연을, 그것도 특별석에서 보고 왔다는 것 아니겠냐.”

“아유, 난 또 무슨 소리하나 했네.”

황 실장이 ‘특별석’이란 단어를 꺼내는 순간, 최성현이 곧바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늘 아침부터, 심지어 어제 밤에도 카톡으로 한 번 말했던 내용인 것이다.

“난 특별석이 왜 2층에 있나 했는데,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냥 무대가 한 눈에 확 들어오는데···”

아직 감동이 남아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황 실장. 그만큼 감명 깊은 무대였던 것인가, 그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에휴···”

웬만하면 호응을 해주고 싶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네 번째 들으면 그럴 마음도 사라지는 법이다. 최성현은 귀찮은 티를 내며 턱을 괴고 앉았다.

“같이 보러 간 태한이는 가만히 있는데, 왜 같이 간 실장님만 그래요?”

“그··· 태한 씨는 이런 걸 잘 안하는 사람이지. 연륜이 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럼 실장님은요.”

“난 원래 이런 사람이고.”

최성현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 실장이 강태한보다 나이가 많지 않냐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요.”

“뭐가?”

“뭐랄까··· 태한이의 영향력?”

최성현은 황 실장의 스마트폰 스크롤을 슥슥 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엔 황 실장이 보여준 것 외에도 많은 기사들이 나와있었다.

[한국 뮤지컬의 떠오르는 신예, 황지운. 전성기는 아직이다? 브로드웨이 진출의 포부.]

[‘황지운의 로한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초청받은 브로드웨이 관계자, 비어있는 로한 역 황지운 배정 가능성에 ‘매우 긍정적’]

그 뒤로도 이어진 황지운과 관련된 기사들.

이미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인지도를 쌓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무대를 통해 더욱 커다란 도약을 해낸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강태한이다. 본인은 별 거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정말 별 일이 아니었다면 황지운 본인이 직접 찾아와 감사를 건네고 티켓을 주진 않았으리라.

“뭐,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더 신기한 거죠.”

그건 비단 황지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최태준 선수, 강주완 선수, 한하나 에버튼FC, 대청···

그냥 앞에 보이는 저 사인들이 모두 강태한이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최성현은 대기실 뒤쪽에 줄줄이 걸린 액자들을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부러워?”

“아니, 뭐 부러운 건 아니고···”

최성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흐렸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더욱 긍정을 표하는 꼴처럼 보였다.

“뭐, 태한 씨가 워낙 솜씨가 뛰어나긴 한데··· 너도 지금 다른 곳에 가면 에이스 대접 받을 걸?”

그런 최성현의 모습에 황 실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장인코스에 넣길 반대할 정도로 실력이 애매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강태한 다음으로 가장 많은 예약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런 황실장의 말에 최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부러운 게 아니고요. 그냥··· 저도 저렇게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실력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살짝 뜸을 들였다가 툴툴거리듯이 말하는 목소리. 내용 때문인지 살짝 쑥스러워해 하는 기색도 담겨있다. 그 모습에 황실장이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안마계에 슈바이처 선생님이 납셨네.”

“아잇! 괜히 말했어. 나 들어갑니다.”

최성현은 신경질이 담긴 목소리를 내며 휴게실로 돌아갔다. 그런 최성현을 쳐다보며 황 실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최성현과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알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람이 좀 더 열정이 생겼다고 할까, 뭔가 목표가 생긴 느낌이라고 할까. 예전의 가벼우면서도 싹싹한 모습도 좋았지만, 거기서 훨씬 더 성장한 모습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변화의 기점이 되는 건···

아무래도 강태한이 안마샵에 찾아와 일을 하기 시작했던 날이 아닐까. 강태한이 영향을 준 사람 중에는 아마 최성현도 포함이 되어있으리라.

‘일등제자 같은 느낌이랄까.’

황 실장은 자신의 비유가 제법 어울린다 생각했는지, 혼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천마안마에서 안마를 받았던 날.

다리의 감각이 되돌아오고, 아주 잠깐이나마 다시 자신의 다리로 몸을 지탱했었던 날.

“후우, 후으으··· 후으읍!”

그 날 이후로, 최아람은 하루하루 재활훈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활, 다시 몸을 되살리기 위한 운동이었다.

본래 부상 초기에만 꾸준히 재활훈련을 해왔었고.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포기하듯 멈췄었으나.

이제 다시 희망을 붙잡은 것.

물론 강태한에게 안마 한 번 받는 것에 비하면, 이렇게 빰을 뻘뻘 흘려가며 훈련하는 효과는 다소 비효율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때에 비하면 힘을 내는 보람이 넘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

강태한에게 네 번째 안마까지 받은 삼주 째.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언니.”

그녀는 다시는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언니와의 산책을 나섰다. 최아람은 언니의 휠체어를 붙잡은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각은 돌아왔으나 움직임은 아직 발이 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어색하며, 특히 종아리 쪽을 움직일 때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걸을 수 있다.

요 근래 재활훈련에만 몰두했던 덕분일까, 이는 강태한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른 회복이었다.

물론 느리긴 하지만 혼자서도 걸을 수 있고, 뭔가를 붙잡고 걸을 수 있다면 더욱 안정적이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휠체어를 끌고 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최아람은 괜히 먹먹한 기분에 잠시 말을 잊었다.

“다행이다, 아람아.”

그렇게 좀 걸었을까.

휠체어에 타고 있던 그녀의 언니, 최보람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자매가 함께하는 산책에 감회가 새로운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가?”

“네 다리 말이야. 나처럼 영구적인 게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어서 천만다행이야.”

“아··· 그렇지. 하하. 아직 좀 어색하긴 하지만.”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고 재활훈련을 했더니 나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나, 어지간한 허풍보다도 믿기 힘든 내용이었기에, 최아람은 굳이 그 말을 언니에게 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괜히 날 업고 다녀서 그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내심 미안했엇거든.”

“아이,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역도할 때 드는 무게가 몇 키로인데 그런 걸 걱정해?”

“그래도, 요 근래 살이 좀 붙기도 했고.”

“언니가 붙어봤자 40kg 안팎이지. 40kg면 지금도 내가 한 손으로 들 수 있다. 언니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좀 더 쪄야 돼.”

최아람은 손을 저으며 언니의 최보람의 쓸 데 없는 걱정을 일축했다. 동생의 말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복잡한 미소를 짓는 최보람. 그러던 중,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본래 두 사람은 여의도 공원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공원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한참 되었었고, 이제는 빌딩들이 세워진 도심 속을 걷고 있었다.

“음··· 흠흠. 어디로 가는 거죠? 재만 씨.”

“예? ···아, 네.”

순간 생각해뒀던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는지, 최아람이 이재만에게 바통을 떠넘겼다.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다가 살짝 놀라는 이재만.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보람 씨도 요즘 외출을 별로 못하셨잖아요. 요 근방에 솜씨 좋은 안마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컨디션을 좀 회복하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아하··· 그렇군요.”

이재만의 말에 최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윽고 동생에게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비밀로 삼을 정도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음··· 약간 서프라이즈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아하. 그렇구나.”

대충 얼버무려 말하는 최아람.

그런 동생의 말에, 최보람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슬슬 건물들 사이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천마안마가 있는 라이너 빌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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