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146화 >
“흐음··· 뭔가 사연이 있나 보군요.”
강태한이 나지막하게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장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아람에게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가 한 명 있네. 열두 살, 소위 띠 동갑이라 불리는 터울이지.”
그는 물 한 모금으로 잠시 목을 축이고는, 숯불이 타오르는 불판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람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양친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네. 한 번의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던 거지.”
당시 집안의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고, 최아람은 갑자기 보호자가 없는 고아가 되어버려 친척들 사이의 애물단지가 될 뻔한 상황이었다.
“거기서 보람이··· 그러니까, 아람이의 언니가 자기가 동생을 키우겠다고 한 거야. 다 큰 언니가 있는데 얘가 왜 고아냐면서 말이야.”
그녀는 당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동생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인이라고 해봤자 그녀도 갓 스물을 넘긴 나이.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그 일을 해왔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 평소에도 종종 다리가 꼬이거나 힘이 풀리는 일이 잦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마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아람이가 운동을 시작한 계기라네. 언니가 걸을 수 없게 됐다면, 내가 언니를 업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언니가 나를 돌봐줬으니, 나도 언니의 힘이 되겠다.
맨처음 최아람이 운동을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역도선수가 된 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다행히 최아람은 이쪽에 재능이 있었고, 금방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인의 성과만으로 재단의 후원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마침내 금메달리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훈훈한 이야기지만··· 문제가 생겼나보군요.”
“그렇지.”
장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아름다운 성공기이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미화(美話)일 뿐이다.
허나, 만약 그랬다면 장우영이 이렇게 강태한을 찾아올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시곤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번 달 초쯤이었나··· 아람이가 운동 도중에 쓰러지는 일이 있었네.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있던 도중에, 갑자기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넘어진 거야.”
“좀 크게 다쳤나보군요.”
“아니, 그 자체는 그냥 넘어진 정도였지. 허나 그 이후로도 다리를 절거나 힘이 풀리는 일이 잦아지다, 어느 순간부터 일어서는 것도 힘들게 돼버린 거야.”
집게로 고기를 뒤집고 있던 강태한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반응. 그는 다시 집게를 움직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직접적인 부상은 없었고요?”
“그렇다고 하더군. 언니 때와 거의 비슷한 증상인 모양이야. 검사를 해봐도 딱히 문제가 있는 부분이 보이진 않고··· 그냥 중추신경계에 뭔가 이상이 생겼을 거라, 추측만 하는 상황이지.”
장우영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섞여있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네. 병원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한 걸 자네한테 부탁하는 게,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부탁하고 싶다.
끝까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 뜻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말을 들은 강태한은 위턱에 손을 올리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하반신 마비라···’
그렇다는 건, 중추신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상단전, 즉 머릿속의 뇌 자체에 이상이 생겼거나, 아니면 머리에서부터 하체까지 신호가 전달되는 통로, 척수에 이상이 생겼거나.
“일단은··· 제가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확답을 드리진 못 하겠군요.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후자의 경우라면, 그래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허나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가 갈라지고, 전자의 경우에는 그냥 아무런 방법이 없다.
강태한이라고 해서 뭐든지 다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가.”
그 말에 장우영의 표정이 순간 침울해졌다. 강태한의 말을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 생각한 것이다. 허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강태한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덧붙이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그 아람 씨에게 다리를 고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하지마시고.”
세상에는 가능한 것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
가능한 걸 ‘잘 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응원이지만··· 불가능한 걸 ‘잘 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게 영구적으로 이어지는 장애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일에 관해선, 강태한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기분전환으로 안마나 한 번 받으러 가자,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태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는 말. 그러자, 그 말에 침울해져있던 장우영의 표정이 단박에 바뀌었다.
“그럼, 한 번 보겠다는 말인가?”
“보는 것 자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습니까.”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태한.
그 모습에 장우영이 긴장이 풀어진 것처럼 안도의 기색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한 이틀 전에만 연락을 주세요. 영업시간에는 먼저 잡혀있는 예약들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지만, 그 뒤에 저녁 시간에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진심어린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는 장우영.
마치 자기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도 되는 듯한 반응이다. 그 감사에, 강태한은 괜한 생색을 내는 대신 싱긋 웃으며 일정에 관한 설명을 입에 담았다.
“일단 이야기는 이걸로 일단락되는 건가요?”
“아,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장우영. 그러자, 강태한이 불판 위의 고기를 장우영 쪽으로 옮겨놓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고기도 좀 먹을까요?”
이미 아까 전에 먹음직스레 구워졌던 삼겹살.
허나 내용도 그렇고 이야기의 주제가 딱히 고기를 집어먹을만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그동안 불판 위에서 조용히 방치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래, 그래야지. 깜빡하고 있었군.”
장우영은 그제야 지금 상황을 떠올린 듯이 깜짝 놀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야기가 좀 오랫동안 계속된 것이다.
“그··· 고깃집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좀 더 좋았을까?”
“아무래도 요리가 나오는 쪽이 이야기하는 게 조금 더 편하기는 하죠?”
그러다 머쓱한지 괜스레 말을 꺼내는 장우영. 강태한은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 * *
대청그룹의 자회사 중 하나인 바디케어.
이번 신제품이 생각이상의 대박을 터트리면서 생산라인 확보하랴, 인원 늘리랴, 물건 보내랴, 어느 부서 가릴 것 없이 정신없게 회사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헌데 그런 와중에 한 가지 일거리가 더 늘어났으니.
“차장님, 방금 거래 제안이 하나 더 들어왔는데요.”
“거래제안? 혹시 또 인도회사야?”
“···네. 맞아요.”
“하아··· 알았어. 일단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놔.”
바로 인도에서 일어난 의문의 대히트였다.
이번 히트를 터트린 것도 다름 아닌 더 마이스터.
대체 어떻게 인도에서 안마의자 수요가 갑자기 늘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엘리펀트 인더스트리의 마르케시가 뭔가 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었다.
그 자체는 상당한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으나.
이런 희소식은 높은 확률로, 더 많은 일거리를 가져오는 법이다. 특히나 영업부서 같은 경우에는 인도회사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십 통 이상의 문의전화와 메일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내 참,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네.”
영업팀에서 꽤 오랫동안 일 해왔던 박 차장.
엑셀로 현황을 정리하고 있던 그는,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안을 건네온 인도의 회사들, 그 중에서도 나름 굵직한 회사들로만 명단을 짜놓은 건데, 그럼에도 한 페이지를 가뿐하게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건을 팔 수 없다면 렌트라도 해주시죠!]
[더 마이스터는 팔 수 없다고요? 그럼 다른 제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저희 백화점에 입점만이라도 해주시죠. 프로모션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미 엘리펀트 인더스트리와 계약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 다른 거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거래부터 트자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원래라면 어떻게든 물건 좀 팔아보려고 여기저기 연락도 돌리고, 거래처 찾아 발품팔고 해외로 출장도 나가고. 이런 게 영업부서의 주된 업무였다.
특히나 경쟁업체, 릴렉스홈에게 밀리고 있었을 때는 어떻게든 건수 하나 올리려고 안간힘이었었는데.
‘오히려 묘한 기분이란 말이지···’
어찌 된 게 요즘에는 입장이 좀 바뀐 듯한 느낌.
팔려는 사람보다 사갈려는 사람이 더 안달이 나있는, 그런 보기 드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국내에서 대히트를 쳤을 때부터 약간 그런 기미가 보이고 있었는데, 엘리펀트 인더스트리의 마르케시가 방한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지금 상황에 이른 것이다.
“뭐 그래도··· 나쁠 건 없나.”
박 차장은 잠시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스마트폰으로 주식 창을 띄웠다.
온통 빨갛게 물들어있는 화면.
애사심이 엄청 높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장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사둔 대청 관련 주식들이 연이은 우상향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흐흐흐.”
이렇게 화면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올 지경!
잠시 뿌듯한 마음을 충전한 박 차장은, 스마트폰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스으읍··· 후우···”
고요한 체육관.
적막함마저 흐르는 그 공간 속에선, 한 여성의 조심스러운 심호흡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소리에 맞춰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바벨. 그 반복동작이 한동안 계속되었을까.
“후우우우···”
그녀, 최아람은 바벨을 거치대에 올려놓으며, 마무리하듯 긴 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운동을 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운동이 끝나자, 체육관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 장우영 전 회장이 다가오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회장님 오셨어요? 오신 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내가 조용히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최아람의 말에 장우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가는 말투가 제법 자연스러운 것이, 나름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장우영이 말했다.
“좀 더 쉬는 편이 좋지 않겠니.”
“뭐··· 가만히 누워만 있는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이 몸에도 되도록 빨리 적응을 해야죠.”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운동은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방금 전까지 하고 있었던 벤치프레스.
물론 하반신의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도 무게는 언제든 들 수 있어야하거든요.”
그녀의 말에 장우영의 시선이 바벨 양쪽의 플레이트로 향했다. 좌, 우에 15kg짜리가 하나씩. 봉 자체의 무게를 합하면 50kg가 되는 무게였다.
“그래도 우리 언니 정도는 들 수 있어야죠.”
“···그렇구나.”
최아람의 말에 장우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기 뒷바라지를 하다 하반신이 마비된 언니를 위해, 그녀의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했었다.
실제로도 한 달에 한두 번씩, 언니를 등에 업고 경치 좋은 산에 오르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을 정도니까.
원래라면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미담이다.
허나, 이제는 누구든 가슴 한 켠이 씁쓸해지는 비극이 되어버렸다. 그 차이가 장우영에게는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요즘은 패럴림픽도 잘 되어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고 그쪽으로 계속 열심히 해봐야죠.”
그런 장우영의 기색을 알아차린 걸까.
괜스레 더 밝은 목소리를 내는 최아람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장우영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좀 쉬면서 해라. 너무 빨리 가려고 하면 오히려 넘어지는 법 아니겠니?”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최아람에게 건넸다. 다름 아닌 천마안마의 명함이었다.
“이게 뭐에요?”
“내가 종종 다니는 안마원인데, 솜씨가 상당해.”
내 심장도 고쳐준 사람이니, 너도 한 번 받아봐라.
장우영은 그 말을 꺼내려했지만, 도로 삼켜냈다.
뭔가 희망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강태한이 당부하듯 덧붙였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질 못해 몸도 많이 굳었을 텐데, 안마나 받으면서 한 번 풀어두려무나.”
대신 그는 애써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평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