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141화 >
“후우우···”
담당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나온 직후.
황지운은 병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아무 벤치에 주저앉듯이 자리를 잡았다. 잠시 그렇게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을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여기 흡연구역인가보네.’
바로 앞에 보이는 재떨이. 이제야 발견한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크기가 있는 물건이다.
···담배라도 한 대 필까.
문득 강렬하게 밀려오는 흡연 욕구에 황지운은 침음을 삼켰다. 금연을 한지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이 착잡한 순간이 오면 담배 한 모금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정신 차려라, 황지운.’
하지만 그는 곧 스스로를 다그치듯이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목소리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담배는 독약.
컨디션 관리와 재활치료에 온힘을 쏟아 부어도 부족할 판에 담배를 피울 생각이나 하다니, 그야말로 안일한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피울 수도 없는 담배생각이나 하는 대신, 다른 벤치로 자리를 옮기고선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두어 번 쯤 신호음이 울렸을까.
[어, 지운아. 무슨 일이야?]
“최 PD님.”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공연, ‘황혼의 수레바퀴’의 총기획자이자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최PD. 그는 안 그래도 궁금했다는 듯이 황지운에게 넌지시 물었다.
[병원은 잘 다녀왔고?]
“예. 뭐. 진료 다 끝내고 나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뭐라시디? 괜찮을 것 같대?]
최PD의 목소리에선 자연스레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그렇기에, 황지운은 입은 열렸으나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말밖에 꺼낼 말이 없었기 대문이다.
[···그렇구만.]
그러자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하다는 듯이, 최PD가 먼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의 안타까움이 실린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부러진 게 뚝딱 낫기는 힘들지?]
“···대충 붙기는 붙었다는 모양인데, 재생이 더뎌서 깁스는 한동안 계속 차고 다녀야한다나 봐요. 깁스를 풀어도 격한 활동은 힘들고.”
저쪽에서 먼저 운을 던져주니, 그나마 말이 좀 나온다. 황지운의 말에 최PD가 너스레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나이를 먹으면 뼈붙이기도 좀 힘들지.]
“그러게요. 옛날에는 금방금방 붙었는데.”
가볍게 농담조로 오간 대화.
허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대화가 길게 이어질 수는 없다. 잠시 동안 흐르는 침묵. 그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수화기 너머의 최PD였다.
[지운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단은 재활에만 집중해라.]
“···기다린다고요?”
[그래. 정 뭐하면 휠체어라도 태우고 하지 뭐.]
“장난이죠?”
[장난 아니야.]
최PD가 반쯤은 장난기가 서린, 허나 나머지 반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공연 자체가 너 하나 보고 기획하기 시작한 건데, 주인공이 빠질 수가 있나. 그리고 이번 커리어 가지고 브로드웨이까지 갈 거라고, 네가 말했잖아.]
‘황혼의 수레바퀴’는 대표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 하나로, 작품 속 주인공 로한이 동양인이고, 그렇기에 대대로 동양인 배우가 주연을 맡아온 뮤지컬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의 이름난 유명 작품들 중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동양인이 주연으로 설 수 있는 무대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
그렇기에 아시아의 뮤지컬 업계에선 굉장히 상징적인 배역이지만, 여태동안 로한의 역할을 맡아온 것은 일본배우들과 홍콩배우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황지운은 자기가 한국인 최초로 그 배역을 따낼 수 있기를 오래 전부터 꿈꿔왔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오리지널 팀에서 로한의 배역이 교체될 것이라는 건, 업계 사람들 대다수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정보.
이번에 ‘황혼의 수레바퀴’ 공연이 기획된 것은, 황지운의 인기로 티켓파워를 끌어 모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이런 시기적인 요소도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 각색을 한 버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근에 해당 배역을 맡아본 것과 아닌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한 번 기다려보지 뭐.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하겠지만··· 네가 한국에서 로한 배역 제일 많이 맡아본 사람 아니겠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기에, 이 공연이 황지운에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는 최PD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벼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형,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허나 그게 그렇게 어물정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는 건 황지운도 잘 알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배역교체를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괜스레 감정이 울렁거린 탓일까, 그는 PD라는 호칭 대신 형이라는 보다 친숙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됐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에서 한국인이 주연 맡는 것 좀 보고 싶어서 그런다.]
“···그러다 일정 못 맞춰서 공연 망치기라도 하면, 나보고 형 얼굴 어떻게 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형 얼굴 보고 싶으면 재활 좀 빡세게 해보라고, 자식아. 그리고 설령 일정 못 맞춰도 대처방안이 다 있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알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최PD는 일이 있다며 통화를 끊었다. 황지운은 통화가 끊어진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한 번 터트렸다.
“참··· 말만으로도 고맙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해주면 뭐라도 노력을 해보는 게 맞지만. 몸의 회복속도라는 것이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겠는가.
그는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다시 화면을 켰다.
‘···천마안마라고 했었나.’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선배, 조찬혁 배우가 따로 불러내서까지 추천해줬던 안마원.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시큰둥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약장수에게 홀린 것마냥 저녁으로 소고기까지 사주고 예약을 양보 받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위광고 느낌이지만···’
예약이 잡혀있는 것은 이틀 뒤.
아직까지도 조찬혁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중요한 일만 적어놓는 주요 일정표에 천마안마의 예약 일을 조심스레 옮겨 적었다.
* * *
“후우우우···”
벌레울음소리마저 크게 느껴지는 한밤중의 산.
그곳에서 강태한은 한참동안 들이마시고 있던 숨을 조심스레 내쉬었다. 안에 차있던 공기를 전부 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숨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호흡을 갈무리하고 난 이후.
강태한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리고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손바닥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연기와도 같은 모습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던 연기들은 서서히 선명한 빛을 띄더니.
이내 액체처럼 찰랑거리는 물방울의 형태가 되고.
머지않아 견고하게 굳은, 아주 작은 구슬이 되었다.
“흐음···”
손바닥 위에 둥실 떠올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자그마한 구슬. 강태한은 감고 있던 한 쪽 눈을 슬며시 떠, 구슬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정도인가.”
그 상태에서 추가로 형성되는 구슬들.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듯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었던 첫 번째와는 달리, 그 다음 번 구슬이 형성되는 과정은 훨씬 더 빨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슬이 총 세 개.
강태한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띤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쥐어냈다. 이내 손바닥을 다시 폈을 때, 신비롭게 빛을 뿜어내던 구슬들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나쁘지 않군.”
내공을 시각적인 형태까지 유형화시킨 강기(罡氣). 그리고 그 강기를 다시 압축시켜 구슬의 형태로 만들어낸 강환(罡丸).
경지 자체는 깨달음의 영역이기에 기술 자체는 무림시절 그대로 기억하고 있지만, 내공 자체가 없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강환까지도 별 무리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무림시절과 비교하면 그 규모와 파괴력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처음 현대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거기에 기간, 그리고 기(氣)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해진 현대라는 배경까지 감안한다면 더더욱 빠른 성취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길가다 치여 죽을 일은 없겠네.”
강기를 강환의 형태까지 압착시키는 건 꽤나 높은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에 비하면 강기를 몸에 두를 뿐인 호신강기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이 정도면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막연히 목표로 삼았었던, ‘제 한 몸 지킬 힘 정도’의 수준까지는 얼추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강태한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새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던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어찌 보면··· 무림에 다녀오길 잘했을지도.’
만약 그대로 현대의 강태한으로서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안마사로서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무공에 관한 높은 경지와 내공을 다룰 수 있는 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씩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조바심이 넘쳐나는 미숙한 시기와 그로 인한 수많은 시행착오들.
강태한은 이미 무림에서 그 시기를 겪었고,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깨달음들을 얻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선 같은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많은 걸 바꿀 수 있었다.
‘아버지 어깨도 고쳐드렸고 말이지.’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마저 집어넣었다.
한참 손님이 몰려들어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입가에는 계속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찌 보면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 사소한 부분이 강태한에겐 참으로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
무림에서 있었던 천마로서의 삶은.
설령 원하는 바를 이뤘을지언정, 즐거웠던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복수를 이루고 천마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그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허나 지금은··· 나쁘지 않다.
강태한은 잠시 손가락 끝에 강기를 끌어올렸고, 이내 그것으로 작은 구슬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무림에 있었던 시절, 강태한의 강기는 칠흑같이 검은 묵(墨)빛을 띠고 있었다.
흡성대법으로 아득바득 힘을 쌓고, 강해질 수 있다면 어떤 무공이라도 익히고. 그럼에도 수십 번의 죽을 고비와 수차례의 주화입마를 견디며 살아왔던 무림에서의 삶.
그런 강태한의 강기가 새카만 묵빛을 띄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손끝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투명한 구슬.
만약 무림시절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반대되는 기운이었다.
* * *
인도 뭄바이에 위치해있는 한 고급 호텔.
그 중에서도 가장 호화스럽다 할 수 있는, 어지간한 스포츠경기장보다도 넓은 큼지막한 파티장에서.
“오늘, 제 생일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모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아주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하하하!”
한참 소란스럽고 거창한 생일파티가 한참이었다.
그 파티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마르케시.
“그럼 다들, 치얼스(cheers)!”
“치어어어얼스!”
그가 단상 위에서 개막식 비스무리하게 건배사를 외치자, 파티장에 있던 모두가 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개최자의 텐션이 높은 탓일까, 사람들의 분위기도 굉장히 드높았다.
“아하하! 마르케시! 한 살 더 먹은 거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미스터 마르케시!”
“하하하! 다들 감사합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인사. 그럼 살짝 지칠 만도 한데, 마르케시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높아진 텐션으로 계속 인사를 받았다.
“와··· 진짜 체력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그런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한 남자가 감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던 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비즈니스적으로도 중요한 자리니까요. 미스터 마르케시도 텐션을 높여야겠죠.”
겉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생일파티 정도로 보일 뿐이지만, 여기에 모여 있는 면면들은 하나같이 인도 내의 주요 인사들이다.
정치인도 있고, 기업가도 있고, 지방지주도 있고···
말하자면 비즈니스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자리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모인 건 마르케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지만, 그래도 단순히 사적인 자리로만 볼 수는 없는 것.
다만 어찌됐거나 생일이라는 명분만으로 이렇게 많은 인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건, 그만큼 마르케시의 영향력과 평판이 뛰어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뭐 어쨌거나··· 저로서는 이 분위기 자체가 좀 어지럽네요.”
다만 이렇게 텐션이 높은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남자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마를 쓸어내리며 넌지시 말했다.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앉아서 나누실까요?”
“나쁘지 않네요.”
파티장은 크고 호화로웠지만, 옆으로 빠져나오면 다른 방들과 연결되어있는 복도들이 나온다.
파티를 즐기다 나와 휴식을 취하거나, 비교적 조용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이런 배려는 훌륭한 파티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음?”
그렇게 자리를 옮겨 티 테이블에 앉았을 때.
남자의 눈에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우주선의 조종석마냥 거창한 크기의 의자.
그것은 다름 아닌 바디케어의 신제품이자 대한민국에서 안마의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화제의 제품, 더 마이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