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120화 >
“흐음··· 선생님께서 어느 정도의 인원을 말씀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남자는 턱 부근을 매만지며 침음을 삼켰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프로팀 한 개 구단 정도 인원이라면, 충분히 수용이 가능합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전용기라는 것이 대개는 소수의 승객들을 위해 설계되기 마련이지만, 마르케시의 전용기는 비교적 좌석을 많이 배치해놓은 편이었다.
본인 소유의 구단이 원거리 원정을 나갈 때, 여차하면 전용기로 이동할 수 있도록 따로 설계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그 말인 즉슨, 강태한이 어지간한 대식구를 이끌고 나타나더라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는 뜻.
“사돈에 팔촌까지 데려오셔도 문제없습니다.”
설령 그 이상의 인원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비행기를 한 대 더 추가시키면 그만이다.
그만큼 예산이 대폭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어지간한 범주 내에선 예산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 건 사장님이었으니, 전용기 한 대 더 띄우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 시기에 직원들 휴가가 잡혀있어서, 같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직원들과 함께 말입니까?”
강태한의 말에 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직원들의 가족까지 동행하는 것은 좀 버겁지 않을까, 싶네요.”
“···예? 설마요.”
“아, 그건 아닙니까?”
강태한의 말에 남자는 안색을 피면서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으로 보아한데, 농담으로 입에 담은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야 당연히 직원들만 같이 간다는 말이죠.”
“다행이군요··· 하긴, 여긴 한국이었죠.”
생각 없이 ‘다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가 가족의 팔촌에 그 친구들까지 따라오는, 인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는 대참사.
코미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지만, 인도에서라면 아직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미리 선을 그어둬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마 인원은··· 많이 간다면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명 정도가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 정도야 전혀! 문제없습니다.”
인도식 최악의 전개까지 고려했었던 남자에게 그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이런 때에 직원 분들을 먼저 떠올리시다니.”
약간의 오해로 살짝 머쓱해진 탓일까, 남자는 강태한의 칭찬을 입에 담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훌륭한 사장님이시군요.”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강태한은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직원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을 이렇게나마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의 말은 겸손이나 듣기 좋은 빈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강태한은 가게의 직원들, 특히 안마사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으니까.
강태한이 매주 정기적으로 강습을 열고, 거기서 핵심적인 안마기술들을 가르쳐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참가자가 없으면 소용없는 짓이다.
원래 교육이라는 게 가르치고 싶은 사람만 있어서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니까.
헌데 가게의 안마사들은 수업에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있고, 요 근래에는 강태한을 따라 퇴근 후에 체력 관리를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아졌다.
실제로도 다들 안마사로서의 기량이 크게 올라, 가게에서 매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상황. 그들을 보며 강태한은 자신의 인복(人福)이 적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있을 때나마 챙겨주고 싶은 게,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직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아버지였지만··· 요즘 가게 일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사실상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일단 나중에 여쭤보긴 하겠지만, 얼마 전 ‘휴가 때 같이 산에 다녀오자’는 말도 거절하셨으니까.
“허허··· 이것 참. 직원들이 부럽습니다.”
한편, 강태한의 말에 남자는 감탄을 담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저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사장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편, 강태한은 태블릿PC의 화면을 넘기더니, 뒤에 더 붙어있는 내용들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나와 있는 건 일종의 제안서. 이번 계약에 대한 간단한 조항들과 구체적인 조건들이 적혀있었다. 말하자면, 강태한 개인에게 별도로 들어가는 금전적인 내용들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음··· 나쁘지 않군.’
사실 리조트로 초대하는 것은 일종의 미끼상품이나 마찬가지고, 핵심적인 부분은 강태한을 리버풀로 불러 에버튼의 선수들 모두가 강태한에게 안마를 받는 것에 있다.
허나 그렇다고 그저 리조트에서 대접을 좀 하는 걸로 안마값을 퉁치려 할 만큼 마르케시의 씀씀이가 얕지는 않았다. 제안서에는 거기에 적혀있는 금액만으로도 충분히 출장을 다녀왔을 만한 정도의, 꽤 많은 금액이 적혀있었다.
“일단 나와 있는 내용은 다 읽어봤습니다.”
맨 뒷장까지 확인을 마친 강태한은, 태블릿PC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남자는 깍지를 낀 채 조용히 강태한의 답을 기다렸고, 이윽고 강태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희 가게 직원들도 같이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동행한 인원들의 이동부터 숙박까지 모든 부분을 책임지신다는 것. 이 부분은 확실한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쿨거래로 가시죠.”
강태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쿨거래라는 말, 알고 계시죠?”
“···하하하. 그야 물론이죠!”
뒷말 없이 서로 깔끔하게 거래하는 것.
남자는 교환학생의 경험으로 이미 그 뜻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찻잎이 들어있는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어낸 다음, 차가 우러나는 동안 찻잔에도 물을 받아 한동안 그대로 내버려둔다.
찻물의 온도와 잔의 온도를 미리 맞춰두기 위함.
차를 우리는 시간은 찻잎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찻잎이 여리다면 그만큼 우려내는 시간을 줄이고, 억센 편에 속한다면 좀 더 오랫동안 우려낸다.
그렇게 찻물에 충분한 맛과 향이 배어들었을 무렵.
잔에 받아뒀던 물을 다른 곳에 따라 잔을 비우고, 거기에다 첫 잔을 조심스레 따라낸다.
중요한 건 주전자에 되도록 물이 남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따라낸다는 점이다.
찻잎이 일정부분 이상 잠길 정도의 물이 남으면, 그 상태로 계속 찻잎이 우러나 주전자 바닥에 쓴맛이 우러나게 되니까.
“음, 좋구만.”
그렇게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조심스레 마시는 한 모금. 황 실장은 그 한 모금이 꽤 만족스러운 듯 히죽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소감을 입에 담았다.
“이젠 잘하시네요.”
“태한 씨가 처음 소개해주고 꾸준히 마셔왔으니까.”
그를 지켜보던 강태한이 넌지시 말하자, 황 실장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요 몇 달 동안은 커피보다 차를 더 많이 마시지 않았을까.”
급하게 카페인을 보충해야할 때는 커피를 마셨지만, 그 외에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걸 좀 더 선호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가게에도 본인의 다구 세트를 따로 갖다놓았을까.
“근데 그동안 이것저것 많이 마셔봤는데··· 신기할 정도로 이것만큼 입에 맞는 게 없단 말이지.”
황 실장은 들고 있던 찻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연녹빛의 녹차. 그러자 은은하면서도 맑은 느낌의 향긋한 냄새가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야 뭐, 실장님 체질에는 그게 잘 맞으니까요.”
육안과편(六安瓜片).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 하나이자, 그 이름처럼 찻잎이 과편(瓜片)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은은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특징으로 꼽히는 찻잎이다.
따뜻하면서도 맑은 기운을 품고 있다고 할까.
평소 몸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탁기가 많이 쌓인 이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며, 기본적으로 몸에 열을 좀 지니고 있는 황 실장 같은 이들에게는 체질적으로도 몸에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허허, 참. 처음 들었을 땐 설마 했었던 말인데.”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은 새삼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강태한과 같이 차를 마셨을 때, 그때도 ‘체질에 잘 맞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 거 없이 그냥 우연히 입맛에 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들을 때는 느낌이 달랐다. 강태한이 하는 말이라면 정말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하지.’
강태한이라면 체질 정도는 순식간에 파악하고도 남을 것 같은 느낌. 그동안 보여준 게 워낙 많다보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내가 실장으로서 태한 씨를 불렀었는데, 지금은 태한 씨가 사장이고 태한 씨가 나를 부르네.”
업무 외 시간에 찻집에서 강태한과 둘이 앉아있는 상황. 맨 처음 같이 차를 마셨었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서로의 입장은 정 반대가 되어있었다.
“좀 어색하신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로부터 대략 반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길다고 하면 길지만, 그 사이에 강태한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짧게 느껴지는 시간. 왠지 묘한 기분에 황 실장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실장님. 이번 휴가 때 짜두신 계획 같은 거 있나요?”
“계획이라면?”
“가게 차원에서 다 같이 어딜 간다든가.”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바로 어제 다른 직원이 말했던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탓이었다.
“···친목도모 등산회 같은 거?”
“뭐 그런 느낌으로?”
“요새 그런 거 하면 뒷담 듣기 딱 좋은데··· 태한 씨가 가자고 하면 또 어떨지 모르겠네. 일단 세워둔 계획은 없어.”
의외의 반응을 보였던 직원의 모습을 생각하며, 황 실장은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음··· 등산 말고 다른 곳도 싫어할까요?”
“다른 곳이라면?”
“영국의 호화 리조트요.”
“하하하.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네.”
갑자기 튀어나오는 생소한 단어. 그 말에 황 실장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농담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태한 씨도 가끔 농담을 할 때가 있단 말이지. 조금 뜬금없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아뇨, 정말로요.”
“···어?”
차 한 모금을 마시려다 멈칫하는 손.
그와 동시에, 강태한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찾더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거기엔 장문으로 적혀있는 이메일이 나와 있었다.
“타르빈 마르케시였나. 아무튼 그분이 초대를 해주셔서요. 직원들이랑 같이 와도 된다더라고요.”
타르빈 마르케시. 평소 들어볼 일이 거의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메일에 박혀있는 어떤 그림을 보니 황 실장은 곧바로 기억이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게 왜 진짜야?”
그 그림은 바로 에버튼FC의 로고.
타르빈 마르케시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에버튼FC의 구단주 이름이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황 실장은 저도 모르게 황당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 * *
“···대충 납득은 되는 상황이네.”
잠시 후.
강태한의 설명을 듣고, 황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놀란 나머지 찻물을 부어놓고 잊어버린 탓에, 뒷맛에서 씁쓸한 맛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그 중요한 경기가 뭔지도 알겠고.”
머지사이드 더비.
리버풀FC와 에버튼FC의 경기를 뜻하는 말로, 나름 팬들 사이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기다.
다만 오랫동안 머지사이드 더비는 리버풀의 일방적인 게임이라 여겨지고 있었는데···
요 근래 강주완과 고드윈이 미칠듯한 폼을 보여주면서, 이번 더비에서는 에버튼의 팬들도 꽤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팀에 관심이 많은 구단주라면야, 그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 그렇게 생각하면 강태한을 이렇게까지 섭외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됐다.
“그래서, 태한 씨는 직원들도 같이 가는 걸 조건으로 내밀었다?”
“그렇죠. 그쪽에서도 이미 일행이 있을 걸 감안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어요.”
“참 복 받았네, 복 받았어···”
“그렇죠? 신기할 정도로 운이 좋단 말이죠.”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태한 씨 말고 이 녀석들 말이야.”
그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화면에는 직원들이 모인 단톡방이 띄워져있었다.
휴가 날 호화 리조트 예약을 잡아주는 사장님이라니. 어디 대기업, 그것도 임원급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파격적인 복지다.
‘성현이 녀석은 완전 좋아 죽겠구만···’
특히 최성현 같은 스포츠팬들한테는 돈을 내서라도 가고 싶어 할 것이다. 안마는 강태한이 도맡아 하겠지만, 그래도 에버튼의 선수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볼 기회가 있을 테니까.
“뭐 어쨌거나.”
강태한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살짝 기대며 입을 열었다.
“직원 분들이 좋아하면 좋겠네요. 괜히 휴가 날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그런 고민도 했었거든요.”
“하하, 설마.”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이 휘휘 손을 저었다.
“등산을 가자고 하면 오지랖이 맞겠지만··· 호화 리조트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다들 좋아할 걸?”
황 실장은 테이블에 내려놨던 스마트폰을 슬쩍 확인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봐. 다들 아주 그냥 난리가 났지.”
[진짜로요? 미쳤다. 전 무조건 갑니다.]
[ㄷㄷㄷㄷ 저도요!]
[딱 봐도 황 실장님이 장난치는 것 같은데··· 일단 줄은 서봅니다.]
실시간으로 죽죽 올라가는 메시지들.
피식 웃음을 터트린 황 실장은, 이것 좀 보라는 듯이 강태한 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스윽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