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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110화 (110/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110화 >

“···요즘 들어서 유독 느끼는 건데.”

5층에 위치해있는 라이너 호텔의 로비.

한하 호크스의 투수, 최태준은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서는 꽤 익숙한 얼굴이, 보다 정확히는 마운드 위에서 종종 봐왔던 다른 팀 선수의 얼굴이 있었다.

“슬슬 업계에 소문이 거의 다 퍼진 것 같네요.”

주변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은 그 선수 한 명만이 아니었다.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 자신들처럼 로비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들은 각각 대성 웨일즈, 세양 피플즈, 도원 드래곤즈의 선수들로, 모두 다른 팀에 소속되어있는 선수들이었다.

야구시즌도 아닌데 한 폭의 시야에 프로야구선수 세 명이나 들어와 있는 나름 신기한 광경.

얼핏 지나치게 우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최태준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 빌딩의 20층에 자리해있는 천마안마.

그리고 그곳의 원장을 맡고 있는 강 선생님.

원래는 한하 호크스의 선수들만 알고 있는 숨겨진 보물단지 같은 분이셨는데, 언제부터인가 대성의 선수들도 가게에 간간히 보인다는 제보가 나오더니, 근래 들어선 이렇게 다양한 구단의 선수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뭐.”

최태준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광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이며 말했다.

“솔직히 강 선생님 실력이랑 솜씨가 소문이 안 날 수 없는 수준이잖아?”

본래 소문이라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옛말에도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입에서 입으로만 소문이 퍼지던 시기에도 그런 말이 있었을 정도인데, 요즘 같은 정보의 시대에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강태한 선생님 같은 수준의 솜씨라면야··· 소문이 안 나는 것이 이상하고, 오히려 너무 늦게 알려진 편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시즌 말에 연승을 때려 박기도 했잖아. 그 전까지 맨날 얻어터졌는데.”

“···그랬죠.”

“툭하면 연패하던 팀이 갑자기 활약을 하니 궁금할만도 하지. 내가 상대팀 감독이었어도 필사적으로 수소문하고 다녔을 걸?”

“하긴··· 그건 그렇네요.”

이광호의 말에 최태준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속해있는 팀이기는 했지만, 이번 시즌 중반까지 한하의 성적은 상당히 처참한 수준이었었다.

그랬던 팀이 갑자기 기량이 확 올라서 파죽지세처럼 순위를 치고 올라갔었으니, 업계 사람들의 의문과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온갖 스포츠뉴스에서 오랫동안 화제로 오르내리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업계 내에서 그 비결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소문도 퍼져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결과.

현재, 천마안마와 이 호텔은 야구선수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새로운 선수가 나타나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쪽 선수들도 머지않아 이곳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최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여러모로 좋은 일이지.”

커피를 마저 비운 이광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와 다르게 살짝 감정이 섞여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다. 나는 이번 시즌까지만 하고 은퇴하려고 했었거든.”

“어, 그랬어요?”

이광호의 나이는 선수진이 살짝 노후했다는 평을 듣는 한하에서도 가장 많은 편에 속했다.

은퇴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허나 평소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었기에, 최태준은 조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응. 몇 년쯤 쉬면서 코치로 전향할 준비나 하려고 했었지. 솔직히 슬슬 여러모로 힘들었었거든.”

자신의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광호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필드 위에 서고 싶어 고집을 부렸었지만, 거기에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던 참이었는데···

“하지만 요즘엔 제2의 전성기 아니겠냐. 감독님한테도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했다.”

이제는 다 옛말이다.

신체능력은 거의 회춘한 것처럼 되돌아왔고, 거기에 경험이 더해진 덕분에 실력은 전성기 시절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모두 강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이광호는 들고 있던 빈 잔을 내려놓으며 히죽 웃었다.

“근데 이런 걸 나 혼자만 누리기에는 좀 아쉬울 것 같더라고. 만약 정말 우리 팀만 봐준다고 하면, 선생님의 귀한 재능도 썩히는 꼴이 될 거고 말이야.”

다른 팀에도 벽에 부딪히고 은퇴를 고민하는 선수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 선수들 모두가 자신처럼 기적 같은 경험을 한다면···

선수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리그 전체에도 긍정적인 바람이 불지 않을까. 이광호는 예전부터 조심스레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다.

“가끔 보면 말이죠.”

한편, 그런 이광호의 말에 최태준은 턱을 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은 보기보다 속이 참 깊단 말이죠.”

“뭐? 난 딱 봐도 속이 깊어!”

“그럼 그런 걸로 할게요.”

최태준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팔짱을 끼고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내년 시즌은 보는 맛이 상당하겠어요.”

팀에 에이스가 몇 명씩은 더 추가되는 느낌일 테니, 아마 리그의 수준 자체가 몇 단계는 더 올라갈 것이다. 한 명의 선수임을 떠나,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인으로서 상당히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그렇지. 가장 잘하는 건 우리겠지만.”

이광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그의 자신감에는 단순한 패기만이 아니라, 나름의 근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번 강 선생님이 직접 약속했듯, 한하의 선수들은 선생님이 퇴근하는 시간인 8시 이후에도 한 타임 정도 따로 예약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일종의 지인찬스라고 했던가.

물론 그렇다고 매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당연히 선생님의 일정이 비어있어야만 가능했지만, 그래도 다른 팀 선수들보다 예약을 잡기가 좀 더 수월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이건 야구랑 별개의 이야기인데.”

그러던 와중, 이광호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선생님이 좀 도와주면··· 내년 월드컵에서 4강도 한 번 더 뚫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그 말에 최태준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짝’치며 발을 굴렀다. 딱히 생각을 해본 적 없었지만 듣는 순간 느낌이 팍! 하고 온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그러는 동시에 약간의 아쉬움도 함께 몰려왔다.

“아··· 선생님을 1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올해 WBC도 우승했을지도 모르는데.”

월드컵보단 규모도 인지도도 훨씬 작지만, 그래도 나름 세계적 야구대회라 할 수 있는 WBC.

최태준은 아쉽게 4강에서 그쳤던 이번 WBC의 성적을 떠올리며,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 * *

“흐으음.”

천마안마의 사무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황 실장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뭐하고 계세요?”

“아, 태한 씨 왔어?”

마침 사무실로 들어온 강태한이 넌지시 묻자 인사는 건넸지만, 그의 고개는 노트북 화면을 향한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바둑 두고 계신 거에요?”

강태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분명 황 실장이 쉬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업무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일이라도 있나 싶었던 것이다.

“실장님이 바둑 두시는 줄은 몰랐네.”

“나? 예전에 취미로 좀 했었지.”

황 실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더니, 오랫동안 고민한 자리에 흰 돌을 올렸다. 그러자,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돌이 올라왔다.

“아으, 이 녀석은 고민도 안 하나?”

“저쪽 입장에선 굳이 고민까지 할 필요가 없는 그림이긴 하네요.”

보아하니 얼추 후반부에 들어서고 있는 대국.

하지만 이미 형세가 기울어지고 있어, 상대 쪽에서 손쉽게 승기를 가져갈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건 나도 알 것 같긴 해···”

게임 내에 보이는 급수는 상대편과 동급.

하지만 오랜만에 하는 만큼 실질적으론 실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괜히 켰나.”

쉬는 시간에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켰을 뿐이건만, 도리어 정신력이 소모되고 있는 상황에 황 실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훈수 하나만 해도 되요?”

“···태한 씨 바둑 둘 줄 알아?”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 세대서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특히 강태한 또래에서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탓이었다.

“어느 정도요?”

“뭐 들어둬서 나쁠 건 없지.”

어차피 재미로 하는 바둑.

게임을 뒤집기에는 이미 꽤 기울어진 상태이기도 했고, 강태한의 바둑 솜씨에 나름 흥미도 갔기에 황 실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여기 흑돌 한 칸 아래에다가 두세요.”

“···여기?”

황 실장은 강태한이 가리킨 곳을 마우스로 빙글빙글 돌리며 묻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핏 보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는 수. 공격적이긴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수였다.

‘뭐 어차피 진 거긴 하니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두는 황 실장.

“여기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도 봐야하는데··· 오케이. 그럼 이제 여기다 두시면 되요.”

이번에도 큰 고민 없이 돌을 올리는 상대.

방금 전 수를 단순한 실수나 객기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강태한은 빙긋 웃으며 다음 지점을 가리켰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훈수.

그렇게 예닐곱 점의 백돌이 더 올라갔을까. 다섯 번째 쯤부터 상대방의 고민이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어?”

어느 순간 황 실장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로(死路)에서 빠져나가는 생로(生路) 동시에, 자연스레 상대방의 축머리 중 한 곳을 감싸먹고 형세를 뒤집을 수 있는 길이.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변화는 모두 강태한이 처음 훈수를 뒀던 백돌 한 점에서부터 비롯되어 있었다.

상대의 방심을 이용하여 실책을 유도하고, 거기서부터 단번에 전세를 뒤집어버리는 한 수. 황 실장은 저도 모르게 멍을 때리며 탄성을 터트렸다.

“여기서부턴 실장님이 하실 수 있죠?”

“어? ···아, 응.”

다음 수까지 짚어놓은 다음, 강태한은 볼 일을 마쳤다는 듯 쇼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묘수에 감탄은커녕,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태한 씨, 혹시 바둑 따로 배웠었어?”

“음··· 옛날에 약간 정도요.”

강태한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고는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 무림에 있던 시절 꽤 오랫동안 취미로 즐겨왔고, 따로 선생을 불러 배운 적도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기는 복잡하여 ‘약간’이란 말로 일축하는 강태한이었다.

* * *

“선배님! 여깁니다.”

여의도 QBS방송국 인근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서경우 PD는,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에게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오랜만이다, 경우야.”

“그러게요, 선배님. 음료는 뭘로 하실래요?”

“내가 선배인데 네가 골라야지. 뭐 마실 거냐?”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말투.

그 말에 서경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오케이. 점심은 먹었냐?”

“네.”

“그럼 디저트도 먹어.”

남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안 먹었다고 하면 ‘배고플 테니 빵도 먹어’라고 했으리라.

‘한결 같으시구만.’

자연스레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그러면서 저렇게 뭐라도 하나씩 챙겨주려고 하는 한결 같은 모습에 서경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 먹어봤는데, 여기 치즈 케이크가 좋더라.”

잠시 후,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에 케이크 두 조각이 담긴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래요?”

“일단 먹어봐.”

남자는 시범을 보이듯 크게 한 조각을 떼어낸 후, 그대로 입 안에 집어넣었다.

KBC의 주태현 PD.

드라마로 유명한 업계의 대선배이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제목만 들어도 ‘아, 그거?’라고 할 만한 걸출한 작품들을 두세 개나 뽑아낸 드라마 감독이다.

서경우가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 참여했던 작품이 주태하의 작품이기도 했고, 따로 도움을 받은 것도 많았기에, 항상 존경과 감사를 품고 있는 선배이기도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나? 평소처럼 지내지 뭐.”

주태현은 물고 있던 빨대를 놓으며 말했다.

“저번에 새로 들어간다 하셨던 건 어떻게 됐어요?”

“그거야 얼추 진행되고 있지. 근데··· 하, 사소한 문제 하나가 막히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고 있었던 문제인 건가.

가볍게 던진 서경우의 말에, 주태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뭔데요?”

“초반에 잠깐 나오는 단역인데··· 이거다! 싶은 느낌으로 꽂히는 배우가 없어. 어제도 추가 오디션 하고 나왔는데, 없더라.”

사실 단역 정도야 드라마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 힘들지만, 그래도 왠지 계속 마음에 걸려 다른 장면들을 먼저 짜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1화에 나오는 역할이라 마냥 뒤로 미룰 수도 없는 상황. 주태현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음··· 어떤 역할인데요?”

“이번 작품에 대해선 저번에 말해줬었지?”

“네.”

고려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무관의 제자가, 모종의 사건으로 성균관에 위장입관하게 되면서부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가벼운 사극 드라마···

였을 것이다. 서경우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반에 주인공을 지켜주다 쓰러지는 사형의 역할인데··· 그 이미지에 딱 맞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그러면서 주태현은 자기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하소연하듯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딱 봐도 듬직한 느낌이 드는데, 외모는 주인공의 사형인만큼 살짝 앳되고, 그러면서도 진중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있고···

“혹시 아는 배우 중에 그런 사람 없냐?”

“그게··· 이것 참.”

한편,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경우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울리는 이미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배우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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