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108화 (108/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108화 >

‘어라···?’

유세아는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열이 올라 무의식중에 엄마를 찾았던 기억은 있다. 그 뒤에 이마 위로 시원한 손이 올라왔고, 덕분인지 많이 편해져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왜 강태한의 얼굴이 눈앞에 있단 말인가?

아직 몽롱한 탓인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탓인지, 계속해서 생각을 해봐도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면 꿈인 건가.’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앓으면서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기에,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한 상태였다.

결국 그녀의 결론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었던 강태한이, 자기 침대 바로 옆에 앉아서 병간호를 해주다 미소 짓고 있는 상황.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 자기 소망이 만들어낸 꿈의 광경일지,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높겠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후자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꿈이겠지.’

아직 정신이 살짝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좀 빡빡한 스케줄이 이어진 탓에, 만나고 싶어도 강태한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병이 나서 캠핑 약속도 갈 수 없게 되었으니.

하기야 이렇게 꿈에서 나올 만도 하지 않은가.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꿈이 이렇게까지 선명한 것을 보니 강태한이 보고 싶기는 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됐거나···”

유세아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이렇게라도 보니··· 참 좋네.”

내민 손은 곧 강태한의 뺨에 닿았다.

곧이어 따스한 기운이 그녀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마치 실제로 만져보는 것처럼, 선명한 감각이었다.

‘···선명해?’

허나, 머지않아 이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손에서 느껴지는 뺨의 촉감이 너무나도 생생했던 것이다.

만약 계속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였다면 별 생각 없이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그녀는 비교적 상태가 많이 양호해져있었다.

유세아는 확인을 위해 반대편 손도 뻗어 양손으로 강태한의 두 뺨을 매만졌고··· 덕분에 좀 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고.

“······”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현실을 파악하니, 안개처럼 몽롱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부끄러운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마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

유세아는 방금 전까지 뺨을 매만지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입을 벌린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저도 좋네요.”

그러자, 강태한은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쥐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세아 씨 얼굴을 볼 수 있어서요.”

“···저도 그래요.”

자신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깊은 눈.

그걸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참 좋았지만··· 괜히 부끄러워지는 탓에, 유세아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수줍은 목소리로 답했다.

‘왜 현실이 꿈보다 달달한 거야···'

이쯤 되면 치사량이 아닌가.

설령 꿈에서 강태한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까지 그리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아는 콩콩 뛰는 심장을 감추려는 듯 반대편 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열이 나고 있는 뺨을 감추려는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 때문에 나는 열은 아니었다.

* * *

“크흠, 흠.”

시간이 좀 지나 얼추 진정이 되었을 무렵.

손거울로 머리의 상태와 파자마의 매무새까지 점검하고 난 후, 유세아는 조그맣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다 끝났나요?”

“네. 고마워요.”

유세아는 손거울을 침대 위 선반에 올려놓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연인에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여자의 마음. 그건 병상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자리에서 화장 같은 걸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본인의 모습이 못 볼꼴을 하고 있진 않았는지,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저, 혹시 이상한 모습은 안 하고 있었죠?”

“예. 얌전히 잘 자고 계시던데요.”

유세아의 말에 강태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설령 그녀가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해도, 강태한이 그걸 볼 일은 없었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그녀의 어머니, 한주아가 먼저 체크를 했던 것이다.

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훌륭한 어머니의 어시스트. 그녀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물고 있었다는 건 한주아만의 비밀이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유세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손거울로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제야 유세아는 아까 전부터 갖고 있었던, 강태한이 자신의 간호를 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의문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세아 씨가 아프다고 했잖아요.”

그런 그녀에게 강태한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프면 걱정이 되고, 걱정이 되면 찾아오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세아 씨도 제가 아프다고 했으면 그랬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겠지만.”

싱긋 미소를 짓는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가 수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다음에 태한 씨가 아플 때 저도 병문안 가게 해줘요! 갈래요!”

“그러세요. 주소는 아시죠?”

“네. 그럼 아플 때 저한테 꼭 연락하는 거예요?”

강태한은 보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본인이 잔병치레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녀가 병문안을 오는 일도 아마 없을 테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다시 시간이 좀 지났을까.

“···캠핑은 미안해요.”

유세아가 새삼스레 사과를 입에 담았다.

원래 오늘 있었던 캠핑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아파서 못 가는 걸로 무슨 소리에요.”

“그래도···”

유세아는 깊은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사과하는 건 강태한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캠핑이야 다음에 다시 가면 되죠. 우리가 하루 이틀 만날 것도 아니고.”

그 마음을 헤아린 듯,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옆 책상에 올려놨던 찻주전자를 들어 차 한 잔을 따랐다.

“그보다, 잠깐 일어나서 이거나 한 잔 드세요.”

“···그게 뭐에요?”

“생강차요.”

증세를 보아하니 그녀는 감기에다 몸살이 겹쳐진 상황. 그럴 때는 따스한 생강차가 즉효다. 허나 유세아의 표정은 그리 썩 밝지만은 않았다. 생강차의 맛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 탓이었다.

“생강차···”

“싫어하세요?”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어찌 성의를 무시하겠는가.

유세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는, 강태한이 건넨 찻잔을 조심스레 받아들고 한 모금을 홀짝였다.

“···어라?”

맛을 보기도 전에 얼굴에 힘이 들어갔을 정도의 거부감. 헌데, 입 안에 퍼져가는 맛과 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그 몇 개월 사이에 취향이 바뀐 걸까. 그녀는 의문스런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 번 홀짝이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세아 씨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으니까요.”

유세아의 체질에 맞도록 기운을 조정하는 과정을 한 차례 거쳤으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능글맞으시네.”

다만 듣는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들릴 뿐. 유세아는 그 상투적인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듯 입 꼬리를 씰룩였다.

“다 드셨어요?”

“네. 태한 씨의 마음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더 맛있었네요.”

생강차를 마시면서 떠올린 회심의 멘트.

하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잔만 받아가는 강태한의 모습에 유세아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그럼··· 잠깐 등 좀 돌려보실래요?”

“등을요?”

“네. 제 쪽으로요. 잠깐 좀 봐드릴게요.”

한편, 강태한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세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자··· 강태한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은 뒤, 그녀의 등 위에 오른손을 슬며시 올려놓았다.

‘어···?’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끼는 유세아.

강태한의 두 손에 딱히 힘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헌데 왠지 마치 놀이기구의 안전장치라도 멘 것처럼, 몸이 단단히 고정되고 지탱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마사인 건 알고 있었는데···’

장인의 실력은 한 수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그동안 듣고 본 게 있었기에, 강태한의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그녀도 짐작하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이 느낌은,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범주를 한참 벗어나있었다.

“으음··· 요 일주일간 비가 온 적이 없었는데.”

한편, 그녀의 상태를 살피던 강태한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기감을 펼치자마자 느껴진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 촬영하는 장면에 물에 빠지거나 비를 맞는 장면이 있었나 봐요?”

“네? 아, 예··· 한 장면 있었어요.”

이틀 전에 촬영한 내용이다.

영화 초반부터 여주인공이 실연을 당하는 장면. 유세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연기가 좀 마음에 안 들어가지고 몇 번 재촬영을 했었거든요.”

“누구 마음에 안 들었는데요?”

“···저요.”

강태한이 짐짓 언짢은 목소리를 냈지만, 유세아는 나지막하게 진실을 실토했다. 그러자 강태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다 병나면 앞뒤가 바뀌는 거죠.”

“예··· 조심할게요.”

얌전하게 대답하는 유세아. 그러고 그녀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세아 씨가 여기다 적어놓고 다니잖아요.”

두 손을 떼 낸 강태한은, 유세아의 등의 한 지점을 짚으면서 말했다. 체내 기력순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요 혈 중 하나였다.

“비 맞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물론 거길 본다고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며칠 사이에 급격한 변화 정도는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기를 일으켰다거나, 물에 젖은 채 찬 바람을 오래 쑀다거나.

“그게 어떤 식으로 티가 나는··· 어흣?”

강태한의 말에 잠시 의문을 품던 유세아.

허나 그녀의 고찰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강태한의 두 손이 어깨에 올라가더니, 이내 지압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비 맞고 찬바람을 쐰 거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에 있다.

몸의 면역력이야 둘째 치더라도, 감기에 몸살까지 연쇄적으로 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거니.’

응원 정도는 해줄 수 있으리라.

강태한은 어깨부터 시작해서 허리, 종아리, 손목의 뭉친 근육들을 순서대로 풀기 시작했다.

“끄흐으으윽!”

분명 처음엔 상체만 일으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침대에 엎드린 채 안마를 받고 있는 유세아다.

당연한 말이지만.

뭉쳐있는 근육은 예민하다. 덕분에 시원함도 크지만, 그만큼 고통도 더해지는 것. 때문에 유세아의 목소리에 그 고통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강태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자리를 비워주기는 했지만서도.’

한편, 안방에 들어가 TV를 보고 있던 한주아.

‘문도 활짝 열어놓고선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오해는, 활짝 열려있는 문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동안 살펴본 후에야 풀릴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대전 동구의 한 주택.

“······”

아직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었지만, 강호연은 부스스 일어나 두어 차례 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이구만.”

알람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 시간에 일어나 가게에 나가는 것이, 이미 그의 몸에 당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아들놈의 성화로 가게를 쉬게 된 수요일에도, 한동안은 이 시간에 재깍재깍 일어났겠는가. 그나마 요새는 수요일에라도 느즈막하게 일어나는 것이 그나마 바람직한 부분이었다.

“끄흐으으!”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곤 하품을 뱉는 강호연.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오늘 해야 할일들의 목록이 줄줄이 떠오른다. 이 또한 반평생 반복해온 일이다보니, 딱히 의식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되뇌어진다.

매일같이 이어져 온, 그야말로 반복적인 아침.

하지만, 그 이전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전에는 낡은 차에 애써 시동을 거는 것 마냥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들게 아침을 시작했다면, 지금은 의욕도 넘치고 매일 아침이 상쾌했으니까.

‘···다 태한이 녀석 덕분인가.’

그 분기점이 어디인가를 생각해보면.

아들 녀석이 갑자기 집으로 내려와 어깨를 주물러줬을 때부터다. 새삼스러운 생각에, 강호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음?”

헌데,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심히 정신을 기울여보니··· 들려오는 방향은 주방 쪽. 강호연은 옆구리를 긁적이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일어나셨어요?”

“···넌 왜 아침에 오면 맨날 요리를 하고 있냐?”

국자를 들고 있는 강태한에게 강호연이 한 마디 꺼냈다. 지난번에 아침부터 백숙을 끓이고 있었던 모습과 겹쳐 보인 것이다.

“아침 차려드리려고 오는 거니까 맨날 요리를 하고 있죠. 그리고, 오늘은 그럴 만한 날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강호연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이며, 식탁에 앉았다.

“···고맙다, 태한아.”

“뭘요.”

아까 전부터 풍겨오고 있는 냄새는 미역국.

날짜를 더듬어보니,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강호연 자신의 생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