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99화 >
“혹시 꽃이 너무 작은가?”
강태한은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꽃을 쥐고 있는 손을 아이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아, 아니요···”
어디선가 꺾어온 듯한 들꽃. 작고 투박하게 생겼지만, 은은한 보랏빛이 꽤나 아름답다. 방금 전 마술쇼의 영향일까, 아이는 대단한 거라도 보는 눈빛으로 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나보네.’
아까 전과 다르게 살짝 신이 나있는 모습.
그렇다고 병실생활로 초췌해진 인상이 확 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결 또래아이다워진 모습에 강태한은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한 씨. 마술도 할 줄 아셨어요?”
그때, 뒤로 물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세아가 어느새 다가와 귓가에다 조심스레 말했다.
한 아이를 위해 마술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흐뭇한 장면이기도 했거니와, 마술자체도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그녀는 살짝 흥분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뭐 예전에 기회가 닿아서 좀.”
강태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마술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마(魔)술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방금 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진짜 멋지던데.”
“으음···”
아이 못지않게 들떠있는 듯한 모습.
그 반응에 강태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명을 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서 흩뿌린 것은 허공섭물(虛空攝物)에다 발경(發勁)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었고, 그 뒤에는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그것들을 불태웠을 뿐이다.
그리고 허공섭물에 이형환위(移形換位)의 묘리를 섞어 잽싸게 근처 화단에서 들꽃 하나를 꺾어왔을 뿐.
예전이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있는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를 설명해주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마술사한테 트릭을 물어보면 안 되죠.”
그걸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리가 없기에, 강태한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그럴싸한 말을 입에 담았다.
“하긴, 그건 그렇네요···”
강태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아.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남았다. 물어보지 않는다고 해서 궁금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저한테만 따로 알려주면 안 돼요?”
“좀 봐서요.”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피식 실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러고 있던 와중.
“저기, 마술사 선생님.”
방금 마술을 본 것일까? 어느새 다른 아이도 한 명 다가와 강태한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마술 한 번만 더 보여주시면 안 돼요?”
“저도 보고 싶어요.”
“나도요···”
어느새 모여 있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 그들은 하나같이 방금 전 아이와 비슷한 또래 정도로 보였다.
병실로 돌아가다가 이쪽으로 관심이 끌려 되돌아온 모양이다. 하긴, 불꽃까지 피우면서 화려한 연출을 보였으니 시선이 몰릴 만도 한 일이다.
“이런, 어떻게 하지? 오늘 치 마술은 다 끝났는데.”
설레는 표정으로 모여든 아이들에게, 강태한은 짐짓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넌지시 말했다.
“에···”
“진짜요?”
그러자 아이들의 얼굴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아직 표정관리가 서투른 나이. 실망과 아쉬움이 곧바로 표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라, 잠깐만. 머리에 먼지가 묻어있네.”
그러다 갑자기, 강태한은 가장 키가 큰 아이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음 순간 강태한의 손에는 방금 전과 같은 팸플릿이 쥐어져 있었다.
아이들 눈에는 마치 사람 머리에서 팸플릿을 뽑아낸 것처럼 보이는 상황. 거기서 강태한이 반대편 손으로 손등을 탁, 치자, 팸플릿은 세 장으로 늘어났다.
“자, 대신 이거라도 줄게.”
그러면서 가장 왼쪽에 있는 아이에게 팸플릿 한 장을 건넨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이가 손을 내밀자, 바로 앞에서 팸플릿은 불꽃에 휩싸여 사라지고, 방금 전과 똑같이 생긴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우, 우와···”
“너도 받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이에게 똑같이 한 송이 더.
그러자 오른쪽에 서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신기하긴 하지만, 강태한의 손에 쥐어진 팸플릿은 이제 두 장. 이대로라면 자기들까지 차례는 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강태한이 손등을 한 번 더 두드리자, 손에 쥔 팸플릿은 단숨에 세 장으로 더 늘어났다.
“자, 여기.”
어디선가 자꾸자꾸 샘솟아 나오는 팸플릿과 들꽃!
강태한은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에게 꽃 한 송이씩을 모두 건네주었다.
“그럼 의사선생님들 말 잘 들어야한다.”
“네, 오빠!”
인사를 마친 강태한은 아이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은 후, 뒤에 서있던 유세아에게 눈짓을 한 번 보내고서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게 아니라, 주변에서 하나둘씩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 여기에 계속 있으면 하루 종일 마술쇼를 해야 할 분위기였다.
“···태한 씨 장난 아니네.”
한편,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유세아는 입가에 손을 올린 채, 조그맣게 감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력이 장난 아니야.”
어쩔 때는 매너 좋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가, 캠핑에서 텐트치고 불을 피울 때는 야생미 넘치는 터프한 인상을 풍기더니··· 그러면서 오늘은 아이들에게 상냥한 모습까지.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새로운 모습이 나오는, 그야말로 다재다능하면서 매력이 넘치는 남자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유세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강태한이 눈짓으로 가리켰던 주차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요즘 바뀐 생각이 좀 있는데 말이야.”
천마안마의 사무실.
평소에는 대부분 비어있지만, 황 실장이 본격적으로 문서정리를 해야 할 때 작업공간으로 쓰거나, 손님과 따로 만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뭔데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황 실장이 넌지시 운을 띄우자,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던 강태한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원래는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요즘은 강습의 영향 때문인가, 자신이 휴게실에 있으면 다른 안마사들이 편히 쉬지 못하고 긴장하는 경향이 있어, 얼마 전부터 종종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강태한이었다.
“예전에 이 가게에 처음 와봤을 때, 나는 너무 넓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
한편 황 실장은, 아까 전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북을 강태한 쪽으로 슥 돌리면서 말했다. 거기에는 빽빽하게 글자가 채워져 있는 캘린더가 있었다.
“근데 성장세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가게가 조금 더 넓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
이 건물, 라이너빌딩은 엄청 높은 고층빌딩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한 개 층의 공간이 꽤 널찍하게 빠져있는 편이다.
그리고 천마안마는 그 한 층의 3할 가량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 찜질방에 있던 안마샵과는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넓이다.
때문에 한동안은 공간이 필요 이상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고, 손님방을 전부 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시기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것 같았다.
“일정만 보면 그리 빡빡하지 않은 느낌인데요?”
노트북 화면을 훑어본 강태한이 넌지시 말했다.
캘린더에는 물론 예약이 많이 잡혀있었지만, 그래도 꽉 찼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랑 비교했을 때 여유가 넘치는 수준이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봐봐.”
그 말에 강태한은 다시 화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지나간 날짜들인데도 듬성듬성 예약들이 잡혀있었다. 화면에 나온 건 이번 달 캘린더가 아니라 다음 달 캘린더였던 것이다.
“다음 달까지 벌써 이렇게 예약이 잡혀요?”
“요즘에 갑자기 확 늘었어.”
천마코스 같은 경우에는 주말 예약은 예전부터 다음 달까지 밀려있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평일에는 한가한 시간대에 드문드문 예약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취소표라도 나는 게 아닌 이상 얄짤없이 캘린더가 꽉꽉 채워져 있는 수준. 게다가 낙수효과마냥 장인코스도 예약이 빡빡하게 채워져 가고 있었다.
“태한 씨가 강습을 시작한 이후로는 일반코스도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고.”
본인이 안마사인 건 아니기에 강습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효과는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손님들의 반응과 만족도가 전체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근데 갑자기 손님이 늘어날 이유가 있나?”
“뭐 호텔 쪽에서 방문하시는 분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무엇보다 요 근래 SNS에서 화제가 되는 게 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네.”
가게가 SNS에 지나치게 목멜 필요는 없지만, 거기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천마안마는 예전부터 종종 관련 게시글들이 올라오더니, 얼마 전 블미션 멤버 세 명이 동시에 방문했던 걸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 있으면 연예인들도 종종 보인다고 해요~]
[연예인도 연예인인데 야구선수들도 자주 보임.]
[벽에 걸려있는 사인 보니까 강주완 선수 것도 있던데. 방문할 때마다 액자 한두 개씩 늘어나는 것도 또 다른 맛임.]
[그냥 유명인이 왔다간 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안마 솜씨가 그냥 남다릅니다. 제 오아시스에요···]
[회사 다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을 때 반차 내고 다녀오면 진짜 최고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유명인들도 봤다는 목격담, 직접 다녀오고 올리는 리뷰 등등···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확 늘어나고, 그에 따라 손님들도 자연스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으음.”
잠시 생각에 잠기는 강태한.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거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 하하.”
그 말에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 실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가게에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 이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새로운 변화가 조금 필요할 것 같아. 일단 안마사들도 좀 더 뽑아야겠고··· 장인코스에도 한두 명 더 추가되면 좋을 것 같은데.”
“장인코스라. 지금 안마사분들 중에 꽤 솜씨가 좋아 보이는 사람이 한 분 계시기는 한데.”
“그러면 말이야, 태한 씨 마음이긴 하지만 강습을 하루 정도 더 늘려보는 건 어떨까? 새로 뽑는 안마사들만 따로 가르치는 용도로 말이야.”
“나쁘지 않네요. 한 번 생각해볼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오고가는 의견.
강태한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황 실장의 표정에는 활기차다 못해 생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찜질방에 있던 시절에는 거의 없었던 일인데.’
예전엔 이런 이야기가 자주 오가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설령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 지금은 이런 대화가 자연스레 오가지 않는가.
더군다나 강태한이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업파트너로 대하고 존중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자신의 의견에 진지하게 고민에 잠긴 강태한을 보면서, 황 실장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웠다. 천마안마에서 직장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안마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 * *
“최씨, 나 왔어.”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열린 틈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함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만.”
“그렇지 뭐. 내가 한동안 보문산을 안 올라왔으니.”
이곳은 보문산 공원 입구 쪽에 위치해있는 최준석, 이른바 최씨의 카페.
단체등산객이라도 오지 않는 한 붐비는 일은 없지만, 오랜 세월 쌓인 단골들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그런 고즈넉한 가게였다.
“여긴 어째 항상 한가하네. 인건비나 나오겄어?”
“허허, 이렇게 한가하게 노는데 인건비 받을 생각하면 날강도 놈이지.”
오랜만에 찾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멀어진 건 아니다. 단골의 농담에 최씨는 털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뭐가 잘 나오나?”
카운터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으며, 남자는 메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최씨가 넌지시 말했다.
“칡차는 어때, 칡차.”
“···칡차? 텁텁해서 싫어.”
마셔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 들어도 쓰지 않은가. 남자는 휘휘 손을 저었다.
“한 번 마셔봐. 내가 원래 이렇게 안 권하는데, 우리 전씨 기운이 좀 안 좋아보여서 권하는 거야.”
확실히··· 요즘 몸이 좀 무겁고 피곤하기는 하다. 오랜만에 산이라도 갔다 오면 괜찮아질까 했는데, 그마저도 별 소용이 없었으니까.
“으음··· 그럼 약 한 사발 먹는다 치고 마셔볼까?”
“그래, 잘 생각했어. 따뜻하게 한 잔하라고.”
최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컵에다 적정량의 칡청을 덜어내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잘 저어내기만 하면 끝.
허나 오랜 세월 카페를 한 덕분일까.
겉보기로는 대충 손을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저울로 재기라도 한 것처럼 칡청과 뜨거운 물의 비율은 딱 맞아 떨어졌다.
“···뭐 이렇게 빨리 나와? 커피믹스야?”
“됐으니까, 한 모금 쭈욱, 마셔봐. 일부러 물 온도도 적당히 맞춰놨으니까.”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컵을 붙잡았다.
빈말은 아닌지, 컵 너머로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은 온수의 느낌이 전해졌다.
“···냄새는 좋네.”
거기에 은은하게 퍼져오는 차의 향기.
칡하면 떠오르는 느낌과는 다르게, 달착지근하면서도 은은하게 퍼지는 쌉쌀한 향이 꽤나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후르릅.
일단은 조심스레 맛을 보는 남자.
“···어라?”
다음 순간, 남자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맛이 좋고 별로이고를 떠나 묘한 느낌이.
마치 하루 종일 갈증을 느끼다가 물 한 컵을 마신 것처럼, 온몸에서 이 한 모금을 쫙!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