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91화 >
“괜한 소란, 피우지 마라.”
“하지만 회장님···!”
노인은 허둥대는 남자를 만류하며 밀어냈다.
재계서열 11위, 대청그룹의 회장 장우영.
지금은 자식들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몸이지만, 쓸 데 없는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입장이다.
“여기서 내가 쓰러졌다고 이야기라도 나오면··· 막내 녀석 입장이 뭐가 되겠냐.”
이곳 라이너 호텔의 오너는 그의 아픈 손가락인 막내, 장재연이다. 입장이 있어 대놓고 관심을 표할 순 없지만, 그래도 계열사의 행사를 이곳에다 개최하고, 그걸 핑계 삼아 하루 묵고 갈 생각으로 왔었던 것.
헌데 그런 상황에서 본인이 쓰러졌다고 기사라도 한 줄 나오게 되면···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건 둘째 치고, 이제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호텔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으으윽···”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다시금 가슴 쪽을 죄여오는 극심한 통증에, 장우영은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회장님! 이, 일단 이것부터···”
옆에 있는 수행원은 그에게 자그마한 알약 한 알을 건넸다. 급성 심장질환에 도움을 주는 니트로글리세린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상비약 중 하나였다.
“후우우, 끄흐으으음···”
허나, 약을 먹으면 한동안 진정되던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장우영은 계속해서 고통을 참는 신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평소에 일어나던 협심증이 아니라 더 심각한 상황이신 것 같은데···!’
이쯤 되면 망설일 때가 아니다. 그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의료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던 와중.
“흐음···”
번호를 누르기 위해 잠시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 그 잠깐의 사이. 그 사이에, 주저앉은 장우영의 옆에 누군가가 나타나 등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몸집도 건장하고 훤칠한 젊은 남성. 얼핏 보기에는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옆에 앉아있었다.
눈치는커녕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상태.
허나 그 또한 장우영 명예회장의 말동무나 되어주라고 고용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옆에 있던 청년을 단숨에 제압··· 하려했다.
“어?”
무방비하게 앉아있는 모습 그대로, 청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단지 비어있는 왼손의 손가락으로 그의 하복부를 쿡, 하고 가볍게 밀었을 뿐. 헌데 그러자 갑자기 두어 걸음 뒷걸음질이 쳐지더니,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히 아직은 완전히 막히기 전이로군.”
그러면서 그 청년, 강태한은, 여전히 장우영의 등에 손을 올린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닥에 넘어진 수행원에게는 시선조차도 보내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새끼야! 당장 떨어지지 못해?”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남자는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힘이 풀어진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 낑낑거렸다.
“그만. 진정해라.”
그런 그를 만류하는 목소리.
허나 그건 청년이 꺼낸 말이 아니었다.
“재만아. 나는 괜찮다. 일단 가만히 있어봐라.”
어느새 한층 호흡이 가벼워져있는 장우영이, 손바닥을 내밀어 자신의 수행원을 제지하고 있었다.
“···회장님?”
쉿.
그제야 강태한은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반대쪽 손의 검지가 세워져있었다.
‘일단 막힌 혈관은 뚫어놓았고···’
협심증은 말 그대로 협심(狹心), 심장이 조여 오는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밀려오는 증상이다. 가장 큰 원인은 심장을 감싸고 있는 관상동맥이 막히는 것.
지금 같은 경우는 혈관 속에 응어리져있던 혈전(血栓)이 갑작스레 통로를 틀어막은 것이 원인이었다.
노인이 나이가 좀 있는 탓에 혈관과 심장이 쇠약하여 자칫 큰 일이 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때를 놓치지 않고 뚫을 수 있었고, 고비는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참에 인근의 혈도들도 좀 봐놓기로 할까.’
직접적인 원인은 고여 있던 혈전이 관상동맥을 틀어막은, 다소 우연과 관련된 부분이었지만, 결국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체내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이제 노인의 허리춤에 양손을 올려놓은 강태한.
그 상태로 신유(腎兪), 지실(志室)혈을 누르고, 거기서부터 척추를 따라 오르며 십여 개의 혈자리들을 자극, 연결되어있는 각 혈도에 숨구멍을 틔워놓는다.
‘힘 조절은 적당히.’
나이가 많아 노쇠한 탓도 있고, 방금 전 일 때문에 이미 몸의 기력이 꽤 소모된 상황이다. 그렇기에 무리한 교정을 시도하기보단, 자극을 통해 혈류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좀 더 집중한다.
“후우우우···”
그렇게 일 분 정도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을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던 장우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을 피고 앉아, 깊은 심호흡을 들이쉬고 있었다.
* * *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이윽고 강태한이 등 위에서 손을 떼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수행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 괜찮아.”
장우영은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사자 본인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태한이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목소리가 침착하면서도 덤덤한 것이, 마치 별 일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한동안은 별 일 없으실 텐데, 일단 응급조치만 해놓은 격이라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그···런가?”
장우영은 아직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답했다. 등에 손 올려놓고 좀 주물렀다고 통증이 사라진 것도 신기했는데, 막혀있던 게 쑥 내려간 것처럼 몸 자체가 편안했다.
“예. 그러니까 가까운 시일 내에 병원에 한 번 다녀오시는 게 좋겠고··· 혹시나 제 도움이 더 필요하시다면, 여기로 한 번 찾아오시죠.”
그러면서 강태한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천마안마··· 안마사란 말인가?”
“예. 여기 20층에 있는 가게에요.”
그는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쯤, 강태한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태한은 화면에 나온 수신자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약속이 있어서.”
“자, 잠깐!”
그대로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떠나갈 것 같은 기세.
그 모습에, 장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붙잡아 세웠다. 뭐라도 한 마디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도와준 건가?”
그는 대청그룹의 명예회장이다.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그걸 솔직하게 밝히느냐, 꿍꿍이를 따로 숨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장우영에겐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헌데 저 청년에게선 그런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명함 한 장만을 남겨놓은 채, 약속이 있다면서 자리를 뜨려 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그냥 복도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강태한은 뜻을 읽기 힘든 미소를 지은 얼굴로, 예, 아니오 대신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장우영은 잠시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군.”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 고마웠네.”
그러고는 대청그룹의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복도에서 모르는 청년에게 도움을 받은 한 명의 노인으로서, 감사의 말을 입에 담았다.
“덕분에 체면도 세우고 목숨도 건질 수 있었네.”
“별 말씀을.”
강태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용건을 마친 그는 다시 몸을 돌리고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강태한이 다시 뒤로 돌아섰다. 뒤늦게 뭔가가 생각난 건가. 장우영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혹시 가게에 절 찾아오신다면, 예약은 하고 오셔야합니다. 그냥 오시면 안 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정말 떠나갔다.
인적이 거의 닿을 일 없는 구석진 복도. 거기엔 장우영 회장과 그의 수행원인 이재만,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그렇게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멍하니 앉아있던 장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만족감이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과 엉덩이를 털었다.
“재만아.”
“예? 아, 네. 회장님.”
“너 아까 의료팀에 전화하지 않았냐?”
“···아!”
장우영이 약을 먹고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을 때, 다급한 심정으로 전화를 했었다. 이재만은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렸다.
“···오지 말라고 할까요?”
“빨리 전화해라. 허겁지겁 오고 있을 텐데.”
그룹 소속의 병원이기에 취소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소리 들을 생각에 풀이 죽는 이재만이다.
한편, 그가 전화를 하는 사이 장우영은 손에 쥐여져있는 명함을 유심히 살펴봤다. 방금 전 강태한이 건네고 간 명함이었다.
‘천마안마에 강태한이라···’
굉장히 인상깊은 만남이었다.
단지 도움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좀 더 만나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안마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그 솜씨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이가 대체 몇 살인 거야?”
보이는 외모는 청년.
헌데 느껴지는 연륜이나 분위기만 놓고 봤을 때는, 왠지 자기랑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느낌이 들었다.
* * *
“태한 씨, 혹시 물티슈 있나요?”
“예. 거기 조수석 서랍 한 번 열어보세요.”
유세아가 서랍을 열자, 그 말대로 안에는 물티슈 한 곽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수줍게 말했다.
“헤헤. 손에 팝콘 기름기가 남아있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로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
그들의 앞으로는 커다란 스크린 화면이 펼쳐져있었다. 자동차에 탑승한 채로 영화를 보는, 자동차 극장이었다.
“자동차 극장에 누구랑 같이 온 건 처음이에요.”
“그 말은 혼자서는 종종 온다는 뜻인가요?”
“예전에 몇 번 와봤었죠.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랑 마주칠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크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도 배우다. 그런 의미에선 아무래도 일반적인 영화관보다 자동차 극장 쪽이 여러모로 마음 편한 구석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만은 못해서, 요새는 그냥 영화관으로 보러가지만요.”
“···그럼 영화관에서 만날 걸 그랬나?”
유세아의 말에 강태한이 넌지시 물었다.
“어, 아뇨? 이렇게 태한 씨랑 같이 오니까 더 좋은데요? 혼자 왔을 땐 몰랐던 장점들도 있고.”
“그런가요.”
“네. 예를 들자면···”
자연스레 말을 이어가던 유세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단 둘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이렇게! 누워서 볼 수도 있잖아요.”
다행히 그녀는 그럴듯한 대안을 떠올린 다음, 잽싸게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확실히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다.
“하긴, 영화관에 오래 있으면 좀 불편하긴 하죠.”
“제 말이요. 하하하···”
말을 얼버무린 유세아는, 다시 등받이를 세우며 머쓱하게 웃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긴 했다.
같이 있어서 좋은데.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항상 이런 식으로 말을 피하거나 돌려서 표현해야한다.
‘지난 번 캠핑을 다녀왔어야 했는데···’
아침부터 폭우주의보가 나오는 바람에 취소되었던 캠핑. 그때를 기점으로 뭔가 바뀔 줄 알았는데, 애매하게 타이밍을 놓쳐버린 느낌이다.
“주연들이 연기를 잘하네요.”
“네? 아, 원래 잘하시기로 유명한 분들이죠.”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영화의 흐름을 놓쳤다. 유세아는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우리 관계가 무슨 관계인데요?]
때마침 나오는 여주인공의 대사.
그 장면에 집중을 하고 있던 유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태한 씨.”
“예.”
“우리는··· 무슨 관계에요?”
음?
허나, 그녀의 말에 정작 당황한 것은 강태한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희 사귀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예?”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묻는 유세아.
두 사람은 둘 다 당황한 얼굴로,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