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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90화 (90/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90화 >

“제 사인 말인가요?”

“예··· 안 되겠습니까?”

황 실장은 강주완의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내밀었던 종이와 펜을 살짝 거두었다.

사인을 받아 벽에 액자 하나를 늘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한 부탁으로 괜한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다.

그 또한 유명인이기 전에 한 명의 고객. 개인적인 부탁 때문에 고객의 만족도를 떨어트린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었으니까.

“어디보자. 뭐라고 써드리면 되나요?”

다만 황 실장의 걱정과 다르게 강주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엇··· 해주시는 겁니까?”

“사인지랑 펜까지 있으면, 금방이죠 뭐.”

황 실장의 말에 강주완은 사인펜의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 원래 사인 부탁을 받으면 완곡히 거절하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고마운 마음에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그러면··· 안마가 시원했습니다, 좋았습니다··· 뭐 이런 뉘앙스로 한 줄 적어주시죠.”

“알겠습니다.”

황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주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기 이름 세 글자를 종이 위에 적어 넣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강주완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사인. 그 아래에 ‘정말 시원하고 좋았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덧붙이며, 사인은 마무리되었다.

“사인이 좀 투박하죠?”

강주완은 머쓱한 표정으로 완성된 사인을 건넸다.

아직 뭣도 모르던 시절에 대충 만든 사인.

필기체처럼 휘갈겨진 다른 유명인들의 멋들어진 사인과 비교하면,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건 아무래도 멋이 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아뇨, 오히려 딱 좋은 데요!”

반면 황 실장은 강한 부정을 보이듯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의 엄지 하나를 치켜세웠다.

솔직히 말해, 일반인들 중에 유명인의 사인을 보고 이게 누구의 사인인지 바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멀리서 슬쩍 보면 ‘누구 유명한 사람이 왔다갔나 보다.’ 하고 넘어갈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들어가면?

누가 봐도 강주완 선수가 남기고 간 사인이라는 걸 알 수 있고, 멀리서 봐도 눈에 띈다. 전자의 경우보다 자연스레 더 깊은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십쇼.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한 번 직접 보라는 듯, 황 실장은 사인지를 들고 있는 손을 뒤쪽으로 쭉 빼냈다. 그 모습에 강주완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냥 드는 것도 아니고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황 실장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아래쪽 선반에서 액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는지, 사인지가 쏙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준비성이 참 좋으시구나.

강주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을 무렵.

“···저기.”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강주완이 뒤를 돌아보니, 안마사 복장을 하고 있는 세 명이 각자 사인지와 펜을 가지고 쭈뼛쭈뼛 서있었다.

“혹시, 시간 좀 되시면···”

먼저 말을 꺼낸 건 가장 앞에 서있던 최성현이었다.

방금 전까지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황 실장이 사인을 받는 걸 보고 결심한 듯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사인이요?”

“네! 맞아요.”

강주완의 말에 해맑게 미소를 짓는 최성현.

그 표정이 마치 산타할아버지를 만난 어린아이와도 같다. 강주완은 싱긋 웃으며 종이와 펜을 받아, 곧바로 사인을 적기 시작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성현입니다!”

그렇게 사인을 한 장, 두 장···

헌데, 앞에 서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네 명으로 늘어있었다.

“저희 애가 많이 팬입니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사람이 모여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는 법!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던 손님들도 하나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 해드릴 테니,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평소라면 이쯤에서 적당히 끊고 자리를 피했을 강주완이지만, 몸의 컨디션이 너무 좋은 탓인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연이어 사인을 그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여기는 그때 그대로구만···”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온 강주완은, 그대로 택시에 올라 수원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약속도 없겠다, 집에서 좀 있다가 운동이나 나갈 생각이었지만··· 어떤 변덕이 들었는지, 지금 그는 동네 근처에 위치해있는 한 고등학교에 나와 있었다.

“그래도 여기 담벼락은 고쳐놨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신의 모교.

따로 방문신청을 한 건 아니었기에, 강주완은 가볍게 산책하듯 학교 외부를 한 바퀴 돌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둘씩 옛날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땐 상상도 못했었지.’

어렸을 때부터 프리미어 리그에 나가는 걸 목표로 삼긴 했지만, 그건 초등학생이 장래희망으로 대통령을 적는 것처럼 막연한 꿈에 불과했었다.

성장기가 비교적 늦게 온 탓에, 당시에는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간당간당한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생각하면 나름 감회가 새로워지는 기분.

물론 자신은 지금 팀에서 방출 되냐, 아니면 마지막 기회를 붙잡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었지만 말이다.

“혹시, 강주완 선수 아닌가?”

그렇게 옛날 생각을 하며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무렵. 축구장을 따라 쳐있는 펜스 너머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

남자는 알이 큼직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강주완이 그를 알아보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치님?”

“맞네, 주완이! 하하하.”

고등학교 시절 그를 가르쳤던 장원송 코치.

그에게는 나름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고등학생 시절에 여러모로 신경을 써준 사람이었다.

“이거 월드스타가 다 알아봐주고, 영광인데?”

“아이, 무슨 월드스타에요··· 그냥 코치님이 하나도 안 바뀐 탓이지.”

“하긴, 내가 요새 관리를 좀 잘하긴 했지.”

“그보다는 그때도 좀 많이 삭아계셨었죠.”

“이 녀석이··· 그건 그렇고, 계속 담 너머에서 이야기할 거냐? 커피라도 한 잔 타줄 테니까, 안으로 들어와 봐.”

“그럴까요.”

강주완은 대답과 동시에 중간에 세워진 펜스를 넘어왔다. 학생 시절에 자주 넘어 다녔던 솜씨가 남아있는지, 그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거, 도둑놈처럼 넘어오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네요.”

옛 코치의 말에 강주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그렇게 둘이 같이 좀 걸었을까, 장원송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더니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커피 타주신다면서요?”

“누가 안 준 댔냐?”

강주완이 옆에 앉자, 장원송은 옆에 매고 있는 사이드백에서 보온병과 종이컵 하나를 꺼내들더니, 커피 한 잔을 담아 강주완에게 건넸다.

“와··· 예전에도 그 보온병이었던 거 같은데.”

“싫으면 마시지 말고.”

“잘 마실게요.”

얌전히 커피를 홀짝이는 강주완.

오래되었어도 성능은 그대로인지, 커피는 생각 없이 마시면 혀가 데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렇게 좀 있었을까.

“요즘··· 많이 힘들었던 것 같은데.”

말없이 축구장을 쳐다보고 있던 장원송 코치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축구장에서는 축구부원들의 연습경기가 한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좀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러다 강주완을 쳐다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강주완은 머쓱한 표정을 짓다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뭐··· 갑자기 괜찮아질 일이 있어서요.”

어제 안마를 받은 효과는, 강주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발의 감각이 돌아왔는지는 아직 확신을 갖기 어려웠지만, 컨디션만큼은 최상이었으니까.

“너는 학생 때도 고민이 있으면 몸부터 혹사시키고 보는 타입이라 걱정했는데, 괜히 그랬나보다.”

“하하···”

약간 찔렸던 탓에, 강주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커피나 한 모금 마시기로 했다.

“이거 월드스타는 확실히 다르네.”

그러던 중, 다시 축구장 쪽을 바라보던 코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연습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의 집중이 한참 흐려진 상태였다. 두세 명씩 모여 웅성거리고, 시선은 공이 아니라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고.

“바로 알아본 모양이다, 야.”

“그런가보네요.”

강주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긴, 길거리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곤 하는데, 축구부 애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괜히 연습만 방해한 모양이네.”

“왜, 그냥 가려구?”

“계속 여기 있으면 집중 못 할 거 같은데요?”

눈치를 살핀 강주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원송 코치가 느긋한 말투로 그를 붙잡았다.

“그럼 여기 있지 말고, 가서 한 경기만 뛰어줘.”

“···예?”

“쟤들한테는 얼마나 큰 경험이겠냐.”

다시 그를 쳐다보며 씨익 웃는 코치. 그 모습에 강주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이셨어요?”

“선후배의 화합. 얼마나 그림이 좋니.”

“뭐··· 나쁘지는 않네요.”

본인도 내키지 않는 건 아니었는지, 강주완은 가볍게 몸을 풀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나마 집중해서 공을 몰고 있던 학생들까지도 벙 찐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얘들아. 방해해서 미안한데, 한 타임만 같이 뛰어도 될까?”

“···예? 예! 무, 물론이죠!”

그러자, 주장으로 보이는 학생이 말을 더듬으며 겨우 대답했다.

“그, 그럼 선배님이 저희 팀으로 오시고··· 경우랑 주한이, 이렇게 두 명이 상대 쪽으로 넘어가자.”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팀을 분배하는 것이 제법 주장다운 모습. 그 모습에 강주완은 저도 모르게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생각나네.’

자기도 이 축구장에서 뛰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시합이 재개되는 순간, 강주완은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살살 뛰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전력을 다해서 뛸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같이 시합을 뛰면서 후배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정도.

본인이 들어오면서 이쪽의 두 명이 저쪽에 붙기는 했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팀의 밸런스가 맞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선배님!”

그러는 사이 들어오는 패스.

서둘러서 그런지 조금 거칠었지만, 강주완은 능숙하게 패스를 받아내고 공을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순간 육성으로 새어나오는 당황.

강주완은 자기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 섰다.

공이 발에 착 감기는 감각. 예전의 그 느낌이,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뭐지?’

패스가 좋았다? 아니, 설마.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몸이 회복이 됐다.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억?!”

멈춰있는 동안 공을 빼앗으러 달려들던 학생을 물 흐르듯이 제치고, 강주완은 다시 공을 몰며 달리기 시작했다.

발에 돌아온 감각을 만끽하며 필드를 누비는 강주완. 그를 막기 위해 수비수들이 달려드는 순간, 왼발로 가볍게 슛을 때리니, 공이 거짓말처럼 골대 오른쪽 끝자리로 쏙 들어갔다.

“이야아아아!”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각이 되돌아왔다는 기쁨.

그 기쁨이 너무나도 벅찬 나머지, 강주완은 두 손을 힘껏 들어 올리며 거친 함성을 내질렀다.

“주완이 녀석, 아까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한편, 방금 전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원송 코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조그맣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긴 했나···?”

강주완으로선 충분히 기쁨에 취할만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프로선수가 고교시합에 뛰어들어, 지나치게 과한 드리블로 학생들을 농락하더니, 골을 넣고선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 *

“아, 원장님. 여기입니다.”

퇴근 후 5층의 호텔 로비로 찾아온 강태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그가 좌우를 두리번거리자, 라운지의 쇼파에 앉아있던 곽상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하죠.”

그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강태한이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늘은 곽상영이 강태한을 식사에 초대하는 자리. 딱히 사업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식사 한 번 대접해드리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건 그렇고, 호텔에 손님이 많군요. 번창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 뭐 번창하고 있기도 한데, 오늘 세미나실에 기업 행사가 있어서 평소보다 더 많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곽상영은 복도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쪽에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쁘셨겠군요.”

“하하,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직원들이 꽤 유능한 편이라서요.”

강태한의 말에 훈훈한 목소리로 말하는 곽상영.

헌데 방금 꺼냈던 말이 무색하게, 한 직원이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저, 매니저님, 잠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일인데요?”

“그게···”

직원은 강태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곽상영의 귓가에 손을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곽상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애매한 수준의 일인 모양이었다.

“원장님. 잠시 자리를 좀 비워도 괜찮을까요?”

“예. 이참에 호텔이나 구경하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후에 좋은 와인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태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곽상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다음 직원과 함께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연락이 오겠지.’

느긋한 마음으로 호텔을 걷기 시작하는 강태한.

퇴근한 이후였기에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허기가 진 것도 아니었기에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로비를 벗어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랐을 무렵.

“크흐으으···”

“회,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음?”

복도 끝부분에서, 가슴을 움켜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노인과, 그 옆에서 당황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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