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88화 >
“오늘··· 정말 호강 한 번 제대로 했네.”
넓고 넓은 프리미엄 스위트룸의 침대.
그 아래에 이불을 까고 누워있는 최씨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어두워진 방 안 때문일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근사한 야경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는 약간 붕 떠있는 듯한 몽롱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좋았지. 사우나도 좋았고, 안마도 끝내줬고, 밥도 맛있었고.”
옆에 누운 김씨가 동의하듯 끄덕였다.
빌딩 꼭대기의 사우나는 정말 최고였고, 안마는 태한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줄 거란 말을 듣고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피로가 싸악 사라지고 개운해질 수 있었다. 장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솜씨였다고 할까.
그 뒤에 찾아간 호텔 뷔페도 수준급.
그렇게 늦은 오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특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잠자리에 누우니, 마치 거짓말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강 씨가 진짜 아들 하나 잘 둔거지, 뭐···”
“주변에 성공한 아들놈은 많아도, 아버지 한 번 챙기는 놈은 별로 없잖아. 안 그래?”
“암만, 두 말하면 잔소리지.”
최씨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태한이에 대해 좋은 말을 자주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 호강을 한 덕분인지 유난을 떠는 수준이었다.
“거, 가만히 듣고 있자니 괜히 머쓱해지네.”
결국 듣다 못한 강호연이 한 마디 끼어들었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두 사람과 달리, 그는 침대 위에 혼자 누워있는 중이었다.
“뭐야, 다 듣고 있었어? 들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김씨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보다,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야? 침실이 두 개인데 왜 세 명이 다 여기에 몰려있어?”
“왜? 괜찮잖아. 다 같이 여행 온 기분도 들고.”
“나는 침대보단 바닥에서 자는 게 편하더라.”
“허, 참.”
강호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지만, 그 표정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거의 요 십여 년간, 강호연은 명절날에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가는 걸 제외하면 다른 데서 숙박을 한 적이 없었다.
가게에 나갔다가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외출을 하더라도 식자재 마트를 둘러보거나 동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지인들과 어디 멀리 놀러오는 것 자체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뭐 그리··· 나쁘지는 않네. 김씨 말마따나 여행 온 기분도 나고.”
“그렇지? 그보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 오늘은 태한이 덕분에 즐거웠지만, 내일은 대전으로 가기 전에 우리끼리 서울 구경이나 좀 하자고.”
“나는 그럼 남산 타워가 좋다!”
“최씨, 언제 적 남산 타워야?”
“거기가 마누라랑 처음 만난 곳이라고!”
“그럼 다음에 와이프랑 같이 가. 나는 싫으니까.”
안마를 받고 피로를 싹 씻어낸 덕분일까.
밤이 깊어감에도 세 사람은 쌩쌩한 모습으로 내일 일정을 비롯하여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다들 하나같이, 특히 강호연은 요 근래 중에 가장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강주완, 시즌 진행 중 부상회복을 위한 나홀로 귀국··· 어쩌면 방출을 위한 사전단계일지도.]
메인에 큼직하게 떠있는 기사 하나.
내용을 보아하니, 작년 시즌에 부상을 당한 내용부터 시작해서 지지부진한 성적, 출전 횟수 등을 언급하는 기사였다.
여기에 ‘이건 팀에서 방출을 시키기 위한 앨버트 감독의 계산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성 결말로 마무리.
[우리 주완이 형 다시 복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단물만 빨아 먹히고 토사구팽 각 실화냐?]
[토사구팽이 아니라 현실적인 거 아님? 솔직히 요즘 미스터 강 폼 떨어진 건 팩트잔슴 ㅋㅋ]
[딱, 봐도, 군대빼려고, 포석까는거다. 보면, 모르겠냐? 한번, 두번, 봐주니까 계속! 이런 쇼를 벌이는 거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병역기피쇼! 정부차원에서 막아야한다!]
“후우.”
스크롤을 쭉, 내리니, 메인에 뜬 기사답게 백 개 단위의 댓글들이 주루룩 달려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거기서 읽을 만한 댓글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제자리에서 기사 한 편을 훑어본 강주완은, 조금 씁쓸한 기색이 담긴 한숨을 조그맣게 내뱉었다.
“쇼였으면 나도 좋겠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혼잣말.
댓글창에는 자기를 응원하는 팬들의 댓글도 많았지만, 부정적이거나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적어놓은 댓글들도 상당히 많았다.
원래라면 대충 읽어보고 신경도 안 썼겠지만, 스스로 멘탈 자체가 좋지 못한 상황이라 그런지 이런 댓글들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냐. 신경 쓰지 말고 멘탈 케어에나 집중하자.’
오늘은 최태준에게 추천받은 안마도 받을 겸 이번에 새로 열렸다는 호텔에서 푹 쉬기로 한, 소위 호캉스를 보내기로 한 날이다. 기껏 에너지를 충전하러 와서 그런데다가 활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강주완은 한 차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궈낸 후, 꼭대기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뭐··· 나쁘지는 않네.”
옷을 갈아입고 탕 안으로 들어서자, 올림픽 대로 너머로 탁 트인 한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나 마음에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은 탓인가, 혹은 이제 이 정도로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일까. 강주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샤워를 하고는, 온탕에 몸을 담갔다.
“후우우우···”
목 아래까지 푹 몸을 담그자, 뜨끈한 탕이 전신을 덥혀온다. 마치 따스한 온기에 온몸이 젖어드는 듯한 감각.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목욕은 그 자체로 각별한 느낌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한다···’
허나 머리를 비우고 목욕에만 집중하기엔 강주완 개인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
팀에서의 휴식 권고. 사실 기사에 나와 있던, ‘팀에서 방출을 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라는 추측성 내용은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강주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복귀 후에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것뿐. 앨버트 감독은 기다리겠다고 말하면 최소한 한 번의 기회는 내어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이 큰 기대를 남겨두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강주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던 사람이었기에 아쉬움이 남아있는 정도. 아니, 어쩌면 일말의 자비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인대수술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상태가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폼이 돌아온다는 뜻은 아니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아지기는커녕 부작용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자신의 몸으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힘드네···”
만약 팀에서 방출되고 선수생활이 끝난다고 하면.
그렇다고 당장에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전 프리미어 리그 출신 선수라는 간판은, 그 자체로 막대한 힘이 실려 있는 타이틀이다. 적어도 제 앞길 못 챙겨서 굶어죽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그가 원하는 건 축구선수로서 필드 위에서 뛰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프리미어 리그. 설령 방출을 당한다하더라도 한 시즌이라도, 아니 한 경기라도 더 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마음만으로 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제 역할을 못하는 선수는, 팀에 필요가 없다.
프로의 세계에서도 열정과 노력은 중요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한 수준 이상의 실력이 갖춰졌을 때, 그 다음에서야 평가받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강주완의 고민은, 그리고 착잡한 심정은 더욱 깊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 * *
“어서 오세요.”
손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있던 최성현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예약자 분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예약은 안 하고 왔는데요.”
“그러시면 천마코스나 장인코스는 받기 힘드십니다. 일반코스로 안내해드리려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접객. 그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최성현은 눈짐작으로 사이즈를 재서 아래선반에 있는 옷을 꺼내 손님에게 건넸다.
“그럼 일단 옷부터 받아주시고··· 저쪽에 보이는 탈의실에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혹시 옷이 작거나 크면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최성현은 탈의실로 걸어가는 손님에게 가볍게 목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카운터 뒤로 들어갔다.
‘아니, 이 양반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최성현의 업무가 아니다.
최성현은 장인코스를 담당하고 있는 안마사. 카운터에서의 접객은 황 실장과 담당직원들이 교대로 맡아가며 하고 있으며, 지금은 황 실장의 차례였다.
다만 황 실장은 급한 복통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달려간 상황. 점심에 평소보다 과식을 하더라니, 기어코 탈이 난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대타를 찾고 있던 찰나··· 방금 안마를 마치고 30분간의 휴식을 취하려던 최성현을 붙잡고, 다짜고짜 여기에 세워놓은 것이었다.
‘휴식시간은 보장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카운터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만을 표하듯이 다리를 흔들거리는 최성현. 그러는 와중에도, 가게의 문이 열리자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참으로 성실한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 요.”
허나 인사를 하면서 숙였던 고개를 들던 도중.
손님과 눈을 마주친 최성현은 순간 말을 잊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닮은 사람?’
그게 누구인지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강주완. 해외파 축구선수.
그 중에서도 한국출신 프리미어 리거의 명맥을 이어오는 선수 중에 한 명으로, 현재 국내 축구선수들 중에 손에 꼽히는 인지도를 갖고 있는 선수다.
그런 사람과 여기서 맞닥뜨릴 확률과.
그냥 닮은 사람이 우연히 찾아왔을 확률.
둘 중에 뭐가 더 높은지를 짐작해본 최성현은, 후자 쪽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약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 친구가 예약을 했을 텐데,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최태준입니다.”
순간, 최성현의 머릿속에 예전에 봤던 왓튜브 영상의 내용이 떠올랐다. 야구의 최태준과 축구의 강주완이, 중학교 동창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라는, 그 내용이.
“···혹시 본인 성함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이건 필요 없는 절차였지만, 최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호기심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강주완입니다.”
그에 강주완은 별 의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최성현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사이즈에 맞는 옷을 꺼내 건넸다.
“샤워실은 저쪽입니다.”
“샤워실이요?”
“아뇨.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저기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아, 예···
강주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옷을 받아들고는 최성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미안하다, 성현아.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지 뭐냐. 이제 가서 쉬어라.”
“···실장님.”
“아이, 미안하다니까···”
최성현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게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 황 실장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재차 사과를 건넸다.
“으잉?”
허나 최성현의 반응은 황 실장의 생각과 달랐다.
최성현은 어깨 위에 올라온 황 실장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그래?”
“전 태한이 따라오길 잘한 거 같아요.”
“직장만족도가 높은 건 좋은 거지··· 만족스럽다니 다행이네.”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최성현의 맞장구를 쳐주는 황 실장이었다.
* * *
“뭔데 저렇게 호들갑이야.”
가게의 복도를 걸으며, 강태한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태한아! 3번방으로 가봐, 빨리!’
황 실장의 대타로 잠시 카운터에 나갔던 최성현이,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면서 휴게실로 들어왔던 것. 그렇다고 동네방네 소란을 피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과한 리액션이었다.
‘성현이가 그러는 걸 봐선 아마 스포츠 관련 선수일 거 같긴 한데.’
그것도 아마 많이 유명한 선수이지 않을까.
복도를 걸으며 나름대로 추론을 하던 강태한은, 3번방의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강태한의 인사에 마주 인사를 건네는 남자.
확실히, 어디서 봤는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강태한은 주의 깊게 남자의 모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야구 쪽은 아니고···’
얼굴을 살피고 자연스레 시선이 닿게되는 상체.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야구선수처럼 집중적으로 단련한 것은 또 아니다. 이윽고 하체 쪽을 살펴보는 순간···
‘···아하.’
딱히 흠잡을 곳 없이 탄탄하게 단련된 하체의 근육.
그리고 왼쪽 종아리에서부터 발목까지, 살짝 뒤틀려있는 혈도를 타고 흐르는 불안정한 혈류를 보고, 강태한은 요 근래 인터넷 기사에서 자주 언급되던 강주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